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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평론 | 스스로를 집어 삼킨, 사이존재의 그림자 - 문소현

김종길




스스로를 집어 삼킨, 사이­존재의 그림자


- 문소현의 다채널 흑백 영상과 환(幻)의 미학


 


그렇다! 나는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 안다. 불꽃처럼 탐욕스럽게, 빛을 내며 스스로를 집어 삼킨다. 내가 손대는 모든 것은 빛이 되고, 내가 버리는 모든 것은 숯이 되니, 나는 불꽃임에 틀림없다.


_ 니체, 「이 사람을 보라」중에서


 


#1. 사이­존재, 섬뜩한 욕망


문소현의 영상 작품은, 아니 그의 모든 작품들은 이것과 저것의 사이, 이승(삶)과 저승(죽음)의 사이, 현실과 초현실의 사이, 마음의 안과 밖 사이, 그러니까 그 없으면서 있는 ‘사이’의 어떤 틈/갈라짐/균열/층/구조들의 투명한 계면(界面)을 들춰냈다. 그것은 가 닿을 수 없는 듯이 보이지만 너무도 선명하게 실재하는, 부정할 수 없는 존재/현실의 실체적 그림자이다.


인간(人間)의 뜻말이 ‘사이­존재’이니 어쩌면 그 실체적 그림자로서의 ‘사이’는 아주 운명적인 개념어일 수 있을 것이다. 존재와 그림자를 구분할 수 없는. 그는 그 ‘사이’에서 존재의 불안과 욕망과 폭력과 저항을 엿보고 폭로한다. 그의 다채널의 영상들은, 몽타주 장면의 편집으로 심리적 공포를 극대화 시키는 히치콕의 영화를 닮았다. 관객들은 다채널 영상들 ‘사이’에서 마치 궁지에 몰린 배우처럼 극도의 ‘(존재)공포’를 체험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의 초기 작품들은 일반적인 전시들처럼 ‘보는 감각’의 구조였다. 관객을 소름 돋게 하는 매우 즉물적이고 그로테스크한 장면들의 애니메이션이었는데, 이상하고 기이한, 낯익은 두려움(uncanny)이 영상으로 타전될 뿐이었다. 그러나 보고 느끼는 감각으로는 그가 들춰내고 폭로하는 ‘섬뜩한’ 인간의 속물적 욕망이 더 심층적으로, 더 본질적으로 파고들기에는 다소 부족했던 것 같다.


그는 그의 작품들이 인간의 파렴치한 내부로 깊게 파고들어 두더지가 땅을 뒤엎듯 뒤집고 싶었던 게 아닐까 생각된다. 안을 뒤집어 까는, 그림자를 밖으로 끄집어내는, 안 보이는 것을 보이게 하는, 초현실을 현실로, 저승을 이승으로, 저것을 여기로 불러내는 그의 미술은/전시는 그래서 2차원→3차원→4차원→3차원을 자주 차원 이동한다. 평면과 입체의 ‘영상’을 다시 재구조화하는 방식으로 인간의 더러운 속내를 증강현실화 하는 것이다. 그 속내는 뻔뻔하고 때로 당당하다!

 


#2. 건너는, 우물 그림자


최근 그의 흑백 영상작업은 우물 밑 그림자로 이어지는 ‘사이­통로(길)’의 장면들을 보여준다. 그것은 마치 블랙홀의 ‘사건 지평선’처럼 이곳에서 저곳으로 빨려드는 형국이다. 사이­통로의 지평선은 밀물과 썰물로 넘실거린다. 이곳으로 쓸려가고 저곳에서 밀려오는 그 세계의 풍경은 ‘사건 지평선’의 표면들처럼 파편화된 빛의 기억들/회화들로 구성되어 있다.


사이/틈은 하나의 개념에 불과했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실체적 공간으로 인식되기 시작했고, 최근 작업들에서는 구체적으로 인식되는 ‘(어떤) 장소들’과 마주하고 있다. 언 듯, 실재하는 장소들에서 그의 ‘사이­통로’의 작업들은 환(幻)의 이미지로 살아 오른다. 장소의 빈 공간을 미세하게 가르고 벌려서 ‘겹 풍경’의 매혹(魅惑)을 생성시킨다. 그리고 그 겹의 사이를, 그 사이의 우물 그림자를 건너는 물컹한 이미지들이 엿보인다.


그의 희미한 존재들은 액체 그림자다. 그 그림자에서 나는 사회학자 김홍중이 『마음의 사회학』에서 말한 ‘우울자’를 떠올린다. 우울자는 멜랑콜리로 권태, 슬픔, 무기력, 허무함, 피로감의 정서가 ‘우울질’이라는 체액적 감정형식, 즉 열정의 결여, 감정을 느낄 수 있는 능력의 쇠락, 감정의 불가능성을 가진 자로 해석할 수 있다. 줄리아 크리스테바는 상실, 사별, 부재가 상상적 행위를 계속 유발시키고, 위협하고, 강화시킬 경우 멜랑콜리가 작품이라는 물신(fetish)을 만들어낸다고 했는데, 문소현의 작품들에서 그런 물신의 형체들을 종종 발견한다. 그것들은 녹아 흐르기도 하고, 완전한 연소를 통해 증발되기도 하면서 어딘가로 건너가는 중이다. 사이­통로의 세계는 어디이며 그 세계를 건너가는 그림자는 누구일까?

 


#3. 환(幻)의 싱싱한, 살아 있는 숨[氣]


그가 그린 드로잉들은 헛것의 환영으로 피어오른다. 연기처럼 살아 올라서 불현 듯 사라질 것 같은 형상들로 우리 앞에 현존한다. 가물가물 홀려서 주춤주춤 눈길을 주저하는 이미지들이 마음으로 쑤욱 스며드는 것이다. 그 환의 싱싱한 물신의 형체들이 젤 왁스로 제작한 형상들이다. 흐물흐물 꿈틀거리면서 살아 있는 듯 숨을 쉬는 형상은 형체를 상실하거나, 혹은 다시 돌아오면서(어떤 것들은 아예 완전히 사라져 버려서 돌아오지 못하지만), 마음에 스며든 이미지를 토해내도록 유도한다. 그에게 ‘마음’은 사회학적 풍경이 아니다. 마음의 밑바닥 저 멀리 가라앉은 심연의 심리학적 풍경이다. 그 심연은 하늘 없는 바다로 둘러싸여서 흐른다.  


흑백! 전시공간에 흑백 영상으로 상영되는 작품들은 무겁고 낯설고, 어떤 것들은 현기증이 난다. 컬러풀한 현실 세계에서 흑백이, 심한 파도에 배가 한쪽으로 기우뚱 기울 듯, 공간을 기울이기 때문이다. 펄펄한 현실로 흑백이 틈을 벌리면서 넘어오고 있는 꼴이다. 흑백의 현실이 살아 숨을 쉬면서 환의 그림자가 형체로 일어서며 형상으로 잉태되고 있다! 그러나 그런 장면들이 하나로 이어져서 단일한 서사를 만들고 있지는 않다. 장면들은 굴절되고 파편화 되어서 이어지지 않는 것이다. 이곳의 전경(前景/현실)이 넘어가서 저곳의 풍경을 만들고는 있으나, 그 풍경은 후경(後景/초현실)의 그림자로 뒤바뀌면서 나선형으로 꼬이고, 어떤 것들은 뚝뚝 끊겨서, 층층이 어긋나 분절되고 있다. 그는 이 분절된 풍경들을 하나하나 이어서 영상을 만들었다. 그렇게 안녕하지 못한 그의 세계는, 피안도 차안도 아니다.      



#4. 술수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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