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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전통을 거스르는 특유의 서정성, 박래현의 회화 | 김효정

현대미술포럼








전통을 거스르는 특유의 서정성, 박래현의 회화
   

시골 고향(鄕)에 비(雨)를 내려 씨앗이 잘 자라도록 하고 열매를 거두어 드리라. 박래현(1920∼1976)의 아호가 담고 있는 비, 하늘에서 땅으로 오직 한 방향으로 내리는 비는 끊임없이 한 길로 향했던 그의 예술 행적과 닮아있다. 1920년 4월, 평안남도 농가에서 지주의 맏딸로 태어난 박래현은 어렸을 때부터 무엇을 선택함에 있어 주저함이 없었다. 고등보통학교 재학시절 전선(全鮮; 일제 강점기 시대의 조선을 이르던 말) 여자 올림픽에 출전하여 은메달을 딴 일, 졸업 후 나이팅게일의 생애를 읽은 후 의사가 되고 싶어 누구와의 상의도 없이 동경제국여의전에 원서를 제출했다가 자신에게 주사공포증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포기하게 된 사실 등은 그의 진취성을 느끼게 하는 대목이다.  

1943년 박래현은 당시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여러 번 특선을 수상하며 중견작가로 자리를 굳히던 운보 김기창과 만났고 3년 뒤인 1946년 결혼한다. 이들의 결혼은 김기창의 표현대로 “귀먹고 가난하고 학벌도 없는 나와 지주의 맏딸로 최고학부를 나온 당신”의 결합이었고, 그 해 한국 화단에 큰 사건으로 기록된다. 겉으로 보기에 상반되는 두 남녀의 결혼이 당시 큰 이슈가 된 것은 사실이지만, 박래현에게 이 선택은 평생의 반려자로 인해 자신의 예술인생이 지속될 것이라는 사실을 감지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1) 

결혼 1년 뒤인 1947년, 《김기창·박래현 부부전》을 시작으로 박래현의 작품 발표는 공모전 출품이나 그룹 초대전을 제외하고는 주로 부부전이라는 형식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이들은 우향이 병세로 갑작스레 죽기 전까지 총 14회의 부부전을 가졌는데, 작품의 수나 전시의 형식면에서 운보가 우위에 있음을 거론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보여 진다. 대략 2년에 한 번씩 열린 이 전시에서 우향과 운보는 서로 선의의 경쟁자이자 예술적 동반자였기 때문이다.


분절된 선, 입체적인 선
동양화에서 일획은 마치 정론처럼 여겨져 왔다. 한 획을 긋기 전에 마음속의 운미가 모두 드러나고 한 획 한 획 그려내는 것으로 만물을 낳는다는 중국 청초 시기 화가이자 이론가였던 석도는 일획론으로서 하나의 선에 작가의 정신을 함축하여 담아낼 것을 주장한다. 2) 동양화에서 의미 없는 선은 없으며 모든 선은 세계와 인상에 대한 완전한 이해를 담는 창조적인 기초이기에 작가의 존재는 그 선을 통해 확인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박래현이 선을 다루는 방식은 이와 다르다. 1955년작 <자매>는 색동저고리를 입고 복주머니를 매단 한국 소녀들을 묘사한 작품인데, 여기서 그가 다룬 선들은 석도의 일획론과는 거리가 있다. 먹선의 시작과 끝의 굵기가 중간 중간 울퉁불퉁한 것으로 우향이 이를 한 번에 긋지 않았음을, 그럴 의도가 없었음을 알게 된다. 또한 전통적인 동양화에서 먹선은 사물이나 인물의 외곽선으로 쓰이지만 이 작품에서는 한복의 주름을 묘사하는 데 주로 할애되고 있다. 대신 분절되고 중첩된 먹선과 함께 채색 또한 여러 번의 짧은 선의 합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1955년은 우향에게 중요한 해였다. 1950년 6·25 전쟁 때 가족 모두 군산으로 피난을 가게 되었고, 1955년 다시 서울로 돌아오기 전까지 박래현은 기존에 해왔던 사실적인 묘사에서 벗어나 입체적인 표현을 모색했다.     

“형태와 색채의 융합을 생각하게 되고 색의 변화가 이룩하는 고유한 형태의 화면 통일에 신경을 쓰게 되며 때로 특유한 선이 암시하는 입체성을 생각하게 되었다”
박래현, 「동양화의 추상화」, 『사상계』, 1965. 12.

<자매>에 나타난 선에서는 작가의 정신, 만물의 모습을 함축한 유일무이한 육중함을 느낄 수 없다. 대신 화면 구성의 한 요소로서 채색의 선과 동일선상에 놓여 그 거대한 무게를 나눠 갖고 있다. 막중한 위치에서 벗어난 필선은 작가가 위에서 직접 언급했듯이 ‘때로는 특유한 선’이 되어 ‘입체성’을 나타내는 결과를 가져온다. 작품을 자세히 보면, 단순하고 평범한 두 소녀의 모습이지만 언니의 살색과 저고리의 색이 같아 구분이 되지 않고 동생의 치마 또한 어디가 시작이고 끝인지 알 수 없게 표현되어있다. 인물의 형상을 마무리 짓는 데서 탈피한 먹선은 고정된 위치에서 벗어남으로써 그림의 입체감을 부여한 것이다. 물론 그가 직접 언급한 ‘입체적’이라는 표현 때문에 1950년대 중반부터 한국 화단에 수용된 큐비즘의 영향을 떠올릴 수 있다. 하지만 수없이 짧은 선으로 대상의 존재를 조금씩 보듬어 가는 박래현의 감성은 여러 각도에서 본 대상을 ‘분석적’으로 접근하여 평면에 재구성하는 큐비즘과 다소 거리가 있어 보인다.      


작품의 주제보다 화면의 구성과 재료에 몰두하다
박래현은 군산 피난시절 동양화의 새로운 조형적 가능성을 실험했고, 이는 전통 동양화에서 보기 힘들었던 감각적인 구성미로 구현되었다. 《대한미협전》에서 최고상인 대통령상을 수상한 그의 대표작 <이른 아침>(1956)은 구성미의 정수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장날을 맞아 이른 아침부터 시장에 내다 팔 것들과 어린 아이들을 이끌고 가는 여인네들의 행렬을 차분하게 담아내고 있는데, 처음 우리의 시선을 끄는 인물들은 동요하지 않는 어미들의 묵묵한 시선과 대비되는 두 아이다. 엄마의 손에 팔을 잡힌 채 이탈을 제지당하는 큰 아이와 고개가 젖힌 줄도 모르고 잠에 흠뻑 빠진 채 등에 업힌 작은 아이의 머리 방향은 화면의 정 가운데에서 사선으로 떨어지며 아낙네들의 조용한 행렬에 긴장감을 준다. 이에 더해 세 번째로 가고 있는 여인의 큰 과일 바구니에서 삐져나온 꽃가지도 아이들과 같은 각도로 떨어진다.    

1960년대 한국 화단에는 앵포르멜 경향의 작품들이 나타났다. 비정형이라는 뜻의 앵포르멜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아카데믹한 기하학적 추상에 반발하여 나타난 것으로 추상의 서정적인 측면을 강조했고 두터운 유화물감의 질감을 살려 표현했다. 1959년, 박래현 역시 자신의 화면이 점점 추상화되는 것을 경험하고 있었다. 뚜렷한 형태가 사라질수록 화면 전체의 구성과 이미지의 분위기에 더 집중하게 되었고, 새로운 조형적 요소를 탄생시키며 작가로서의 희열을 느꼈던 것 같다.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우향이 앵포르멜 경향을 받아들이면서도 동양화가 갖는 재료적 특수성을 더해 독자적이고 서정적인 화면을 구축해 나갔다는 사실이다.     

1960년대 중후반 박래현의 작품에서는 추상적이고 선명한 색면들과 함께 기다란 띠들이 등장한다. 이것은 맷방석의 엮음을 연상시키기도 하고 줄줄이 꿴 엽전 같기도 하며 현미경을 통해 본 세포들처럼 보이기도 한다. ‘엽전 시리즈’라고 불리는 이 작품들 중 1967년작 <작품 19>를 보면 우향이 아교를 쓰는 방식, 긴 띠 안에 무수한 가는 선들을 새기는 방식을 통해 화면의 추상화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먼저 아교물은 동양화의 물감인 분채나 석채를 쓸 때 이를 화선지에 접착시켜주는 역할을 하는 재료이다. 아교를 물에 희석시킬 때 그 비율을 어떻게 하는가에 따라 색이 종이에 스며드는 효과가 달라지는데, 이를 이용해 그림을 메우고 있는 긴 띠들의 외곽이 마치 불에 그을린 종이의 끝처럼 표현했다. 마지막으로 긴 띠를 보면 붓의 큰 움직임이 주는 효과에만 기대지 않고 그 안에 세필로 하나씩 선들을 새기고 번지게 하여 작품의 완성도를 높였다. 결론적으로 우향은 동시대 퍼져있던 앵포르멜 경향을 흡수해 화면의 추상화를 이끌어 내었지만 철저히 자신의 방식으로, 동양화의 매체적 특성을 살리는 방식으로 방향을 잡았던 것이다. 


박래현의 창작열은 쉰이 가까운 나이에도 현재 진행형이었다. 우향은 운보와 함께 1964년부터 1967년까지 미국과 유럽, 중동지역과 남미, 멕시코 등지를 여행했고 그 이후 뉴욕에 남아 7년여 기간의 유학생활을 갖는다. 현대 미술의 중심지였던 뉴욕에서 그가 선택한 매체는 판화였다. 왜 판화였을까? 이 시기 작품들을 조형적으로 분석하는 것 대신, 그가 판화를 선택한 이유를 유추하면서 박래현의 예술인생을 소급해 보는 것으로 이 글을 끝맺고 싶다.  

서두에서 언급했듯이 박래현은 청각장애가 있는 예술가를 남편으로 맞아들였다. 때문에 남편이 할 수 없는 일상의 잡무들이 주변에 늘 쌓여 있었고 그가 “붓을 들 수 있다는 것은 모든 일이 민속하게 정리된 후가 아니면 안정이 될 수 없는 일”(「남편시중기」, 『여원』, 1962. 11.)이었다. 듣지 못하는 배우자를 위해 항상 소리로 가득 찬 편에 서는 일, 그것이 박래현의 일상이었던 것이다. 

짐작하건데 박래현에게 예술은 시끄러운 세상 속 도피처, 혹은 그 세상을 살아가기 위한 힘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엽전 시리즈 회화의 긴 띠 속 무수한 선들을 하나씩 그으며 자신이 살아가는 이유를 찾았기에 작업실 안에서 만큼은 평온한 마음으로 예술 속으로 침잠해 들어갔을 것이다. 또한 판화라는 매체는 회화와는 다르게 직접 작가가 손으로 그 물질성을 느낄 수 있고 그의 장기인 세밀한 터치가 물질에 그대로 드러나는 결과를 즉각적으로 보임에 따라 그 작업 과정은 우향에게 더없는 기쁨을 줬을 것으로 생각된다. 유학, 결혼, 출산, 여행, 또 다시 유학, 박래현의 일생에서 했던 모든 선택은 예술로 향하는 것이었다. 예술이 소멸되지 않는 길을 가는 것이 자신을 잃지 않는 것이었다. 



김효정(1983∼), 이화여대 대학원 미술사학과 석사, 현재 독립 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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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당시로서는 다소 충격적인 박래현의 결혼 전 서약이 그 증거이다. “첫째 우리가 같이 살아가다가 헤어질 경우 서로 친구로 우정을 계속해 줘야 해요” “둘째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예술에 대해 간섭치 않고 계속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야 할 것” “셋째는 서로 인격과 예술을 존중할 것”, 김기창, 「나의 아내 박래현」, 『여성중앙』, 1976. 3.

2)  저우스펀, 『석도』, 서은숙 역, 창해, 2006.



박래현, <자매>, 1955, 종이에 수묵담채, 72.5×57cm, 개인소장



박래현, <이른 아침>, 1956, 종이에 수묵채색, 238×179cm, 개인소장



박래현, <작품19>, 1967, 종이에 채색, 121.2×104.2cm, 개인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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