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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윤영자의 생명주의 조각, 그 모성적 근원 | 윤난지

현대미술포럼







윤영자의 생명주의 조각, 그 모성적 근원



한국미술의 현대화 과정 초기에 미술사에 남은 여성미술가들 중에는 남성과 동등한 조형어휘를 구사하고 동등한 사회적 인정을 얻음으로써 자기실현에 이른 선구자적 작가상에 상응하는 경우가 많다. 이들은 여성주의가 동의의 지평을 확보한 현 상황보다 훨씬 어려운 조건에서 작업해야 했으므로, 전위의식이라는 문자 그대로 앞서서 투쟁하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한다는 것을 통감하고 이를 실행에 옮긴 작가들이다. 한국 현대조각의 기수의 대열에서 빠지지 않는 윤영자(1924∼2016)가 그 대표적인 예로, 그는 여성이라는 조건을 뛰어 넘고자 한 초기 여성 모더니스트의 한 전형이다. 그는 당대 보편적인 조형어휘로 정착되어 간 모더니즘 조각의 형식을 공유하면서 자신의 독자적 영역을 구축하여 한국 현대조각의 리더의 위치에 서게 되었다.


윤영자가 작가로서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한 것은 우리 미술사가 이 땅에서 교육받은 미술가들로 구성되기 시작한 1950년대 중엽이었다. 주로 토쿄 유학생들이 주도해 온 우리 미술의 현대화 과정이 이 시기에 이르자 순 한국산 미술가들에게 넘겨진다. 해방을 기점으로 신설된 미술대학들을 통해 배출된 소위 ‘전후 세대’가 6ㆍ25 전흔의 복구기였던 1950년대 중엽부터 본격적으로 활동하게 된 것이다. 홍익대학교 미술학부가 창설된 1949년에 동 대학교에 입학한 윤영자도 그 중 한 사람으로, 여성으로서는 매우 드문 경우였다.


1950년대는 우리 사회가 전반적으로 현대화를 지향하는 시기였으나 여성의 사회적 조건은 근대 이전 상태에 머물러 있었다. 그것은 현대화 담론 자체가 근본적으로 여성을 배제한 담론이었음을 드러내는데, 미술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었다. 특히 근육적 에너지를 필요로 하는 장르이자 그 표상인 조각은 남성의 미술로 성별화되었으며, 따라서 조각의 현대화 과정은 다른 어느 영역의 그것보다도 여성을 소외시켜 온 과정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정황에서 한 여성작가가 조각을 전공하였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주목받을 만한데, 윤영자는 더하여 당대의 새로운 조형언어를 과감하고 진지하게 실험하였다.


성차별적 구조를 넘어서는 윤영자의 투철한 작가의식은 형식과 재료 뿐 아니라 작업의 양과 폭을 통해서도 드러난다. 그의 작업은 고전주의, 사실주의, 생명주의, 순수추상 등 다양한 양식과 석고, 시멘트, 브론즈, 스테인레스 스틸, 석재 등 각종 재료들을 아우르며 작품의 종류도 소품으로부터 거대한 기념물에 이르기까지 넓은 스펙트럼을 이룬다.


윤영자가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한 것은 대학교를 졸업한 1955년경으로, 초기 작업은 고전주의에서 사실주의에 이르는 조각의 전통을 충실하게 계승한 것이었다. 인체를 사실적으로 묘사한 <여인상>(1955)이나 부르델의 헤라클레스를 연상시키는 <하늘을 찌르는 사나이>(1956)가 그 예다. 그러나 그는 이런 사실적인 재현에 머무르지 않고 단순화된 곡선형 매스를 강조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기다림>(1959)이 그 예로, 이를 통해 그가 표면의 세부를 정리함으로써 내부로부터 용솟음치는 힘의 강도와 방향 그 자체를 드러내고자 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인체나 생명체의 외관을 묘사하기보다 그 내부에 함축된 생명력을 표출하고자 한 ‘생명주의(biomorphism)’ 조각의 조류에 동화되어간 것이며, 1960년대 중엽부터는 완전한 추상조각 또한 실험하게 된다. 이와 같은 과정은 새로운 자극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그의 실험정신을 확인하게 한다. 서구의 다양한 경향들을 단기간에 압축적으로 수용한 당대 한국미술의 일반적인 정황에서 윤영자도 예외가 아니었으며 따라서 그러한 제3세계적 조건이 만들어낸 독특한 전위정신을 공유하였던 것이다.


1920년대와 1930년대에 헨리 무어나 장 아르프가 주도한 생명주의 조각은 동시대에 공존한 기하추상 조각과는 다른 경로로 조각의 추상화(抽象化)를 이끌었다. 기하추상 조각이 형태에 대한 논리적인 분석을 통해 전통과의 단절을 시도한 예라면 생명주의 조각은 주관적인 감정이입을 통해 형태를 변형시킴으로써 전통을 새로운 국면으로 계승한 예다. 무기물인 돌이나 흙에 생명을 부여한다는 생명주의 원리는 조각가의 작업을 조물주의 창조에 비유하여 온 조각의 오랜 전통을 이끌어온 원리인데, 현대의 생명주의자들은 보다 축약된 양식으로 이를 구사하였던 것이다. 즉 그들은 유기적 형태의 단순화와 변형을 통해 생명현상 그 자체를 시각화하고자 하였다.


한국의 현대조각가들은 기하추상 조각보다는 생명주의 조각에 더 이끌렸는데, 그것은 아마도 조각을 살아 있는 유기체로 보는 생명주의 예술관이 예술행위를 자연의 일부로 보는 동양의 전통 예술관에 상응했기 때문일 것으로 보인다. 윤영자 또한 실험기의 과감한 도전 이후 생명주의라는 자신의 길을 발견한 후부터는 여타 경향들에 휩쓸리지 않고 그 길을 고수하였다. 이런 점에서 그를 한국의 대표적인 생명주의 조각가로 지칭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추상조각을 실험한 이후에도 그의 작업 목록은 단순화된 인체 형상에서 완전히 추상화된 형상에 이르기까지 유연성을 보인다. 그는 구상과 추상 중 어느 한 진영에 헌신해야 한다는 모더니즘의 순수주의 강령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입장을 견지했던 것이다. 즉 조각의 현대화에 동참하면서도 다양한 양식에 대하여 열린 태도를 보여주었던 것인데, 이는 그의 작업이 남성적 배제의 논리가 아닌 여성적 포용의 원리에 근거하여 이루어졌음을 드러낸다.


윤영자의 작업은 그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대강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즉 단순화된 윤곽선의 여체 또는 모자상, 알 같은 형상을 품고 있는 익명의 생명체, 그리고 율동적 움직임의 일루전을 내포한 추상형상 등인데, 이들은 결국 ‘모성’이라는 주제로 수렴된다. 그의 작업에는 여성으로서의 주체의식이 내재되어 있는 것이다. 물론 남성 작가들 또한 모성 주제를 다루는 경우가 빈번하지만 이는 당연히 여성의 경우와는 다른 태도에 근거한 것이다. 스스로가 어머니 혹은 잠재적 어머니인 여성 작가에게 있어 모성을 다루는 시선은 자신을 향하게 되고 따라서 이에 근거한 작품은 자서전적인 것이 된다. 심지어 그 형상이 남성을 포함한 타자의 시선을 재생산한 것이라고 해도 그 시선에서 자기반영적 의미는 배제할 수 없다. 또한, 그 시선은 몸을 통한 경험에 근거한 것이기 때문에 촉각과 긴밀하게 짜여 있다. 윤영자의 작품은, 외견상 여타 생명주의 조각과의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이같이 지극히 주관적이고 또한 신체적인 차원에서 경험한 생명현상의 표상이라는 의미를 또한 함축한다.


생명현상이라는 보이지 않는 힘을 시각화하기 위해 윤영자가 기용한 형식은 ‘정과 동의 변증법’이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다. 세포가 분열하여 두 개의 개체로 정착되고 그것들이 또 다시 분열하여 또 다른 힘의 균형점에 이르는 것과 같은 탄생과 성장의 과정은 끊임없이 유동하는 힘과 그 힘을 구체화하는 정적인 물질 간의 상호작용 속에서 이루어진다. 움직이는 힘은 정착할 물질을 요구하고 불활성의 물질은 역동적인 에너지를 통해 되살아난다. 윤영자의 작품은 바로 이러한 변증법적 과정을 조형언어로 옮겨 놓은 것이다. 꽉 찬 덩어리와 텅 빈 공간들, 수직적 견고함과 수평적 유동성, 매끄러운 윤곽선과 거친 표면, 전체 구성을 제어하는 탄탄한 구조와 그것을 뚫고 불거져 나오는 곡선형의 매스 등이 팽팽한 긴장의 절정에서 균형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베르그송이 말한 ‘생의 약동(élan vital)’의 시각적 구현에 다름 아니다.


윤영자의 작업에서 이러한 생명의 에너지를 가시화하는 태도로 특히 주목되는 것은 ‘재료에 충실하기(truth to material)’다. 타틀린같은 구축주의자(Constructivist)가 물질 그 자체의 본성을 강조하기 위해 외친 지극히 유물론적인 이 구호가 윤영자에게는 물질에 깃든 생명력을 찾아내는 길이 되었다. 윤영자는 각종 재료들을 그 물성에 가장 적합한 형태를 위해 사용함으로써 그것이 함축한 생명의 힘을 구현하고자 하였다. 예컨대, 곡선형의 매스에는 부드러운 대리석을, 즉흥적인 얼룩을 위해서는 브론즈의 부식된 색채를, 날카로운 윤곽처리를 위해서는 스테인레스 스틸을 사용하였다. 그는 또한 대리석의 결을 이용해서 볼륨감을 강조하거나 흐르는 율동감을 나타내기도 하고 금속의 반사표면으로 형태가 공간으로 확산되는 효과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물질이 조각의 재료가 되는 순간 살아 있는 생명체로 환생하게 하는 것, 그것이 그의 예술적 목표였다.


이같이 재료의 물질적 본성에서 생명력을 이끌어내는 태도 또한 생명에 대한 모성적 경험, 즉 신체적이고 따라서 매우 구체적인 경험과 관련지을 수 있다. 일반적인 생명주의 조각이 생명력을 단지 ‘재현하는’ 조각이라면, 이 여성작가의 조각은 작가자신의 신체적 경험의 등가물이라는 매우 주관적인 의미를 함축한다. 그것은 모성적 숨결을 불어 넣은 작가의 자식인 셈이다. 이렇게 객관적 대상인 동시에 주체의 경험인 윤영자의 조각은 타자와 자아가 하나가 되는 모성성의 한 증거라고 할 수 있다.



이상에서와 같이, 윤영자는 구체적 내러티브나 사회적 메시지보다 형태의 미학을 우선시해 온 탐미주의자이자 그런 신념을 일생 지켜온 전형적 모더니스트였다. 이런 점에서 그는 한국 현대미술사의 초기 모더니스트 조각가 반열에 자리매김 될 수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는 미술이 진공의 작업실이 아닌 공적 소통의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사회적 활동임을 의식하고 그 제도 공간을 바로 잡고자 한 여성 미술인이었다. 그는 고등학교 교사와 대학교수를 합쳐 30여년을 미술 교육계에 봉직했고 퇴임 후에는 석주미술상을 제정하여 여성 작가들의 활동을 지원했다. 그는 예술의 사회적 조건을 이론적인 비판의 차원에서가 아니라 시행착오로 열린 실천을 통해서 넘어서고자 한 몇 안 되는 미술인 중 하나다. ‘순수한’ 작업과 그 작업에 교차하는 ‘불순한’ 맥락들, 중성적인(실은 남성적인) 형식주의 모더니스트의 얼굴과 사회적 불평등 구조를 체감해 온 한 여성작가의 얼굴, 그 사이에 조각가 윤영자의 진정한 정체가 있다.


윤난지(1953∼), 이화여대 대학원 미술사학과 박사, 이화여대 교수(∼2019), 현재 현대미술포럼 대표



윤영자, <기다림>, 1959, 화강석, 70×42×32cm




윤영자, <율(律)>, 1979, 대리석, 79×42×18cm




윤영자, <애(愛)>, 1988, 브론즈, 95×30×22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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