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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원문자의 ‘부드러운 욕망’ 들여다보기 | 김현숙

현대미술포럼










원문자의 ‘부드러운 욕망’ 들여다보기 1)
                         
“여성성의 힘과 발현은 발견되는 것이기 보다 내재되어 있다”고 말하는 원문자(1944∼)에게 여성성이란 투쟁이나 혁신을 통해 획득되어지는 차원이 아니라 ‘휴머니튜드’로서의 포용과 조화의 영역에 해당한다. 자신의 작품 속에 여성성이 내재되어 있음을 부정하지 않았음에도 현재까지 원문자 작품에 대한 여성주의적 해석을 발견하기 어려운 것은 작가 스스로 적극적이고 전략적인 여성주의와 거리를 두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글은 원문자 작업 전체를 관통하는 특성으로 여성적 감수성에 주목하였으며, 1970년대 한국 단색화와 동일 계열로 파악되었던 종이부조 작업을 여성주의적 시각으로 재검토하였다. 특히 2004년에 제작된 <부드러운 욕망> 시리즈에 주목한 것은 이 작품들이 《부드러운 욕망》전을 위해 제작된 일시적 경향에 불과할지라도, 바로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내면 깊숙한 곳에 감추어진 욕망이 작가의 자기 검열 레이더망을 빠져나와 과감하게 드러날 수 있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화조화로 드러난 여성적 터치와 감수성
원문자는 1944년 부천에서 출생하여 1966년 이화여자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를, 1968년에 동대학원 회화과를 졸업하였다. 학부시절에 이화문화상 장려상(1964)과 제3회 신인예술상(1964)을 수상하면서 두각을 나타냈으며,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서 국회의장상(1970), 대통령상(1976)을 수상하는 등 일찍부터 실력을 인정받았다. 작가로서의 데뷔와 성공이 화조화를 통해 이루어졌는데, 산수화가 자신과 맞지 않았기 때문에 화조를 그렸다는 작가의 언술을 통해서 수묵화보다 화려하고 장식적인 채색화 쪽에 더 친숙감을 느꼈음을 알 수 있다. 이상범, 변관식, 허백련, 노수현 등 수묵산수화가 화랑가에서 큰 인기를 끌고 서세옥, 신영상, 안동숙 등에 의해 서구의 앵포르멜과 미니멀 아트를 수용한 수묵추상 작업이 크게 유행하던 시기에 화조화에 주력한 것은 시류보다 자신의 기질을 따르는 태도를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산수화가 조선시대의 유교적 가치관을 가장 첨예하게 응축시킨 화목이라면 화조화는 민화, 이불, 배갯모, 가구 장식 등 일상생활 속에 존재하고 장식적, 기복적 성격을 지니는 등 여성적 접근이 용이한 분야이다. 1976년 제 19회 국전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한 작품 <한정>에서 볼 수 있듯이 자연에 대한 신뢰와 경외감을 바탕으로 온화하고 섬세하게 표현된 새들의 평화로운 서식지 풍경의 여성적 터치와 감수성에 관해서는 일찍이 평론가 오광수와 박영택에 의해 주목된 바 있다.

“여성성에 대한 은유”로서의 종이부조 작업
1980년대로 넘어가면서 초기 화조화의 섬세함과 부드러움은 농묵의 구사, 활달한 필선, 구성적 공간 운영으로 변화하였으며, 종이부조 작업으로의 전환은 이 시기 직후에 감행되었다. 화조에서 종이부조로, 구상에서 추상으로의 전환으로 특징되는 종이작업은 <무제>(1990)에서 보듯 펄프의 유연성이 만들어낸 요철과 굴곡, 흰색에 가까운 펄프 그대로의 색을 조형 요소로 한다는 점 때문에 1970년대 단색화와 같은 계열로 이해되었다. 김영기는 한지 표면의 질감과 형태의 추상화를 통하여 종이 자체의 아름다움을 자연스럽게 드러냈다고 평하였고, 최광진은 “환원적이고 물성적인 특성을 강조하는 모더니즘”으로, 김혜주는 평면성, 정적과 적막, 고도의 심미적이며 명상적인 측면을 부각시켰다.

변화무쌍한 자연의 리듬과 숨결을 회화 자체의 법칙에 종속시켜서 기하학적 형태로 단순화시킨 서구 추상미술과 달리 한국의 단색화는 이성의 자리를 종이, 안료, 천, 나무 등 자연의 물성에 양도함으로써 서정적이고 자연스러우며 편안한 추상화를 탄생시켰다. 단색조의 비구상이며 종이의 물성을 발현시킨 점에서 원문자의 종이부조는 단색화와 동일 계열로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단색화가 서구 모더니즘 미술의 조형 원리인 그리드와 평면성을 수용하여 현대성을 획득한 것에 반해 원문자의 경우는 오히려 그것을 부정한다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음을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그리드는 모더니즘 추상미술의 발전을 견인한 인간 사고의 합리적, 이성적 가치체계를 대변하는 상징물이었으며, 평면성이란 현실계의 3차원적 재현을 거부하는 회화 고유의 문법이다. 그리드와 평면성을 토대로 하는 추상미술은 이성-감성, 문화-자연, 남성-여성, 보편-개별, 추상-재현의 이원론적 대립구도 내에서 가부장적 이데올로기를 확고부동한 가치로 확립하기 위하여 자연의 리듬에 가까운 여성성을 침묵의 커튼 뒤로 밀어냈다. 역사상 힘과 권위를 상징하는데 동원되어 온 그리드가 전자회로나 도시의 수학적 구획의 냉정하고 권위주의적인 패권을 연상시킨다면 펄프의 자연스러운 곡선을 윤곽으로 취하는 원문자의 종이부조 작업은 그리드의 미학을 위반한다. 펄프의 성질과 형태가 그림의 바탕과 윤곽이 되며, 종이의 요철을 조형요소로 적극적으로 끌어들이는 부조 형식이므로 전면이 균일한 올오버(all-over)의 평면 구조도 아니다. 단색조 비구상으로 물성의 발현을 지향한다는 측면에서는 단색화와 상통하지만 그리드와 평면성을 위배한다는 점에서는 단색화에 반하는 것이다. 

종이부조 작업에서 발견되는 여성적 특질은 그것이 남성적 권위를 상징하는 그리드와 평면성을 위배한다는 점뿐 아니라 종이를 선택한 작가의 취향에서도 여실하게 드러난다. 그는 자신이 종이의 백색을 좋아하는 이유로 “따뜻하고 여성만이 가질 수 있는 색깔”이기 때문이며, 종이의 흰색으로 추상 작업을 하는 이유가 “여성성에 대한 은유”를 찾기 위함이라 하였다. “종이의 본래 순수한 질감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따뜻한 흰색의 미감”이 가슴에 와 닿는다는 것이다. 

고도의 정성과 섬세함이 요구되는 수공 작업은 직조, 바느질, 자수에 비견된다. 작가는 닥을 물에 풀어서 형태를 뜨고 조형하는 힘든 공정을 아기 낳는 일에 비유하기도 한다. “아기를 돌보듯 세심하게” 오랜 시간과 노동의 과정을 거치면서 생명력을 체험하고, 조용하고 포근한 백색의 미감에서 단아한 한국 여인의 이미지를 발견한다는 것이다. 우둘투둘한 펄프의 요철로 인한 촉각적 질감의 강화, 요철에 부딪히는 빛의 음영이 단색조 화면에 다채로운 색 변화를 조성하는데, 이 또한 모더니즘 미술의 역사가 확립해온 이원론적 경계를 교란시킨다. 미묘한 음영 효과로 단일 색조를 교란시키는 은밀한 방식이야말로 원문자 작업의 요체로서 여성적 특질과 만나는 지점이라 하겠다. 

물과 풀로 반죽시킨 펄프를 두껍게 떠서 건조시켜 그 자체로 회화적 효과를 지니는 화판 위에 꽃, 나무, 새를 연상시키는 드로잉과 설채가 가해진 1990년의 작품 <무제>는 설화적, 서정적, 장식적인 아름다움의 절정에 달하였다. 새나 꽃과 같은 이미지가 화려한 추상적 패턴 속에 명멸하는 환상적 톤은 형식주의 모더니즘에서 부인되는 섬세한 직관력, 서정적 감수성을 극대화하는 동시에 추상화 고유의 영역이라 할 수 있는 상상의 영토에 닻을 내렸다. 추상과 구상의 경계를 오가면서 여성적 추상의 가능성을 펼친 원문자의 작품에서 추상화의 젠더적 구획은 효력을 잃고 마는 것이다. 

‘부드러운 욕망’의 생명체 
종래의 그림들이 내부의 질서 안에서 균열을 꾀하였다면 <부드러운 욕망> 시리즈는 거침없이 확산하는 독특한 형상이다. 유래 없이 큰 규모로 제작된 <부드러운 욕망>은 같은 종이 서로 엉겨 붙어 하나의 유기체로 살아가는 무척추동물, 일정한 형태 없이 자유자재로 몸통 구조를 바꾸는 해양 생물, 공상 과학 영화에 나오는 변신 생명체나 외계 생명체 같기도 하다. 곡선의 부드러움으로 먹이를 유혹하여 순식간에 감아버리거나 액체를 방사하여 상대를 제압시키는 길게 뻗은 촉수는 팜파탈의 치명적인 관능성, 욕망의 거침없는 분출을 연상시킨다. 

“주체는 결핍이요 욕망은 환유”라는 라캉의 유명한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욕망의 드러냄은 주체의 드러냄이자 주체의 확인이기도 하다. 주체는 결핍을 통해서 욕망을 형상화하며 이러한 과정을 거침으로써 자아는 거울 단계를 벗어나 다음 단계로 나아가게 된다. 욕망의 무한한 부드러움이 과감하게 드러난 <부드러운 욕망>을 들여다보면서 우리는 원문자의 감추어진 열정을 확인할 수 있다. 어머니의 눈, 어머니의 말이 여인의 눈, 여인의 말로 변화하면서 그의 촉수는 잃어버린 ‘진짜 나'가 있는 곳, 스스로에게 가한 통제와 규제와 검열을 벗어나 자기 안의 창조적 역량이 잠자고 있는 곳을 향해 뻗어 있었다. 그리고 어쩌면 지금도 은밀하게 뻗어나가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김현숙(1958∼), 홍익대 대학원 미술사학과 박사, KISO미술연구소장, 고려대학교 겸임교수


1)『한국현대미술가100인』(한국미술평론가협회 엮음, 사문난적, 2009)에 실린「원문자, ‘부드러운 욕망’ 들여다보기」를 일부 수정하여 게재함.





원문자, <정원>, 1976, 화선지에 수간채색, 165×130㎝



원문자, <무제>, 1990, 한지에 수묵, 190×167㎝ 



원문자, <무제>, 1990, 한지에 수묵채색, 268×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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