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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서울에서 파리로, 대지에서 우주까지: 이성자의 유목적 여정 | 전유신

현대미술포럼






서울에서 파리로, 대지에서 우주까지: 이성자의 유목적 여정 1)


이성자(1918∼2009)는 일본의 짓센(實踐) 여자대학에서 가정학을 전공했고, 귀국 이후 줄곧 전업주부로 지내다가 이혼을 계기로 1951년에 홀로 도불(渡佛)했다. 같은 시기에 프랑스에 진출했던 다른 한국 미술가들이 모두 기성 작가였던 것과 달리, 그는 프랑스 진출 이후에야 처음으로 미술수업을 받고 화가가 된 독특한 이력의 소유자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성자는 2009년에 작고하기까지 프랑스를 중심으로 활동했던 대표적인 재불 작가 중 한 사람이자, 초기 도불 미술가들 중 이응노와 더불어 현지 미술계에서 가장 두각을 나타낸 작가로 손꼽힌다.  

도불 전에는 미술과 연관된 이력이 전혀 없었던 이성자가 프랑스에서 화가로 데뷔할 수 있었던 것은 그랑드 쇼미에르 아카데미(Académie de la Grande Chaumière)와 스승 앙리 고에츠(Henri Goetz)의 조력 덕분이었다. 특히 페르낭 레제(Fernand Léger)와 아메데 오장팡(Amédée Ozenfant)의 제자였던 고에츠는 이성자를 포함한 한국 작가들에게 모더니즘 미술을 지도해 이들이 구상적인 화풍을 탈피할 수 있도록 해주었던 스승이자, 이들의 프랑스 미술계 진출을 적극 도왔던 조력자이기도 했다. 특히 그의 조교로 일하기도 했던 이성자의 초기 이력 대부분이 고에츠가 참여했던 그룹의 회원전이나 그가 제자들을 위해 열어준 그룹전이었던 점이 이를 방증해준다. 

이성자는 자연을 추상화한 <여성과 대지> 연작으로 1958년에 라라 뱅시 갤러리(Galerie Lala Vincy)에서 개인전을 개최하며 프랑스 미술계에 데뷔하게 된다. 이 연작은 자유로운 붓 터치와 거친 마티에르를 강조한 앵포르멜 풍의 작품을 시작으로 삼각형, 사각형, 원이 화면 위를 자유롭게 유영하는 듯한 작업을 거쳐 점차 기하학적인 형태들이 보다 복잡하게 구조화되는 경우로 변화를 거듭하면서 1960년대 말까지 제작되었다. 이성자가 여성과 대지를 연계하고자 한 것은 여성이 아이를 낳고 기르는 양육의 과정과 대지에서 생명을 키워내는 경작의 행위를 유사하게 인식했던 때문으로 보인다. <여성과 대지> 연작은 한국에 남겨두고 온 자녀들을 직접 양육하지는 못하지만 캔버스에 대지를 그리는 행위를 통해 그것을 대신하면서 아이들에 대한 그리움을 해소하는 과정에서 등장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한편 이 연작을 통해 이성자는 프랑스 미술계에서 상당한 주목을 받게 되는데, 이 작업이 앵포르멜 미술가들과 더불어 전후의 프랑스 미술계를 주도했던 소위 ‘바젠느 그룹(the Bazaine group)’의 ‘추상 풍경화’와 연계되어 평가된 때문이었다. 이 그룹은 인상주의와 입체주의를 프랑스 미술의 핵심적인 전통으로 상정했고, 특히 프랑스의 자연을 입체주의를 통해 추상화하는 작업들을 주로 선보였다. 즉, 이들은 프랑스 미술의 ‘전통’과 그 핵심으로서의 ‘자연’에 주목했던 작가들이다. 이성자의 <여성과 대지> 연작은 특히 1920∼30년대에 랑송 아카데미(Académie Ranson)의 교수로 재직하면서 바젠느 그룹을 지도했던 로제 비시에르(Roger Bissière)의 작업과 양식적인 측면에서 여러 공통점을 드러낸다. 이성자의 스승이었던 고에츠가 그랑드 쇼미에르 아카데미에 재직하기 전인 1951-55년에 바젠느 그룹이 탄생한 산실(産室)인 랑송 아카데미에서 회화를 지도했다는 사실은 그가 이성자에게 바젠느 그룹의 미술을 소개한 매개자이기도 했음을 짐작하게 한다.   

이성자와 바젠느 그룹의 또 다른 접점은 샤르팡티에 갤러리(Galerie Charpentier)가 개최했던 ≪에콜 드 파리(École de Paris)≫전이다. 이 갤러리는 바젠느 그룹의 작업과 같은 비구상 미술을 프랑스 미술의 전통을 계승한 전후의 현대미술로 규정하고, 상대적으로 전통과는 ‘또 다른 미술(Un Art Autre)’을 표방했던 앵포르멜에 대해서는 매우 적대적인 면모를 보여주었던 보수적인 성향의 전시 공간이었다. 더 나아가 20세기 전반기의 ‘에콜 드 파리’ 시기에 미술 중심지로서의 프랑스의 위상이 절정을 맞이했고, 이 시기의 프랑스 미술을 계승한 바젠느 그룹과 추상 풍경화가들이 이와 같은 과거의 영광을 되찾아 줄 적자(適者)적자라고 평가했다. 여기에 더해 또 다른 에콜 드 파리, 즉 파리에서 활동하는 외국인 미술가들 역시 이들에게는 과거의 영광을 상징하는 대상으로 인식되었다. 이 때문에 샤르팡티에 갤러리는 이 두 에콜 드 파리를 위한 전시를 1954년부터 1963년까지 매년 개최했는데, 그것이 바로 ≪에콜 드 파리≫전이었다. 이성자는 1962년에 이 전시에 참여했는데, 그가 여기에 참가할 수 있었던 것은 바젠느 그룹과의 친연성을 보이는 작품을 제작한 외국인 미술가로서 에콜 드 파리의 두 가지 의미를 충족시킨 작가였기 때문이었다. 

이성자의 작품에 관한 프랑스 비평가들의 비평문에서 가장 빈번하게 등장한 용어 역시 ‘에콜 드 파리’였다. ≪에콜 드 파리≫전에 참여했고 생테즈 갤러리(Galerie Synthèse)에서 개인전을 개최하기도 했던 1962년은 이성자에 관한 주목할 만한 비평들이 등장하기 시작한 기점이기도 하다. 프랑스의 유명 비평가이자 ≪에콜 드 파리≫전의 심사위원이기도 했던 조르주 부다이유(Georges Boudaille)는 이성자의 생테즈 갤러리 개인전을 “에콜 드 파리의 부흥(Renouveau de l’École de Paris)”2) 을 알리는 사례로 『레 레트르 프랑세즈(Les Lettres Française)』지에 소개한 바 있다. 그는 민족적인 요소와 프랑스 미술의 양식을 종합한 이성자의 작품을 에콜 드 파리 미술의 특징을 집약한 사례로 평가했다. 프랑스의 일간지인 『레 제코(Les Échos)』에 소개된 단신에서도 이성자는 “에콜 드 파리라는 용광로 안에서 동·서양 미술의 행복한 종합”3)을 이룬 작가로 소개되었다. 이와 같은 비평들은 공통적으로 프랑스 현대미술의 영향을 수용하면서도 자국 미술의 전통을 현대적인 양식으로 드러내는 작업을 에콜 드 파리, 즉 외국인 미술가들의 덕목으로 강조했다. 

이성자도 1960년대 초부터는 한국적인 정체성을 드러내는 것에 점차 관심을 갖게 되는데, 특히 한국적인 전통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일깨워준 계기 중 하나는 목판화였다. 프랑스 작가들의 목판화 작업을 보면서 어린 시절 한국의 사찰에서 보았던 스님들의 목판화를 기억해낸 뒤 이성자는 이를 ‘자연’과 한국적 ‘전통’이라는 두 가지 요소를 결합할 수 있는 매체로 인식하게 된 것이다. 프랑스 작가들의 목판화에서 받은 영향에 한국적인 전통이라는 주제를 결합시켜 자신만의 독자적인 목판화를 제작하게 된 이후로, 이성자는 판화를 주요한 매체로 삼고 지속적으로 이와 같은 작업을 제작했다. 

한편 이성자가 목판화에 관심을 갖도록 해 준 또 다른 계기가 되 주었던 것은 화가 알베르토 마넬리(Alberto Magnelli)였다. 그와의 친분은 ‘추상-창조(Abstration-Création)’ 그룹과 ‘그라스 그룹(Groupe Grasse)’에서 마넬리와 함께 활동했던 장 아르프(Jean Arp) 부부와 소니아 들로네(Sonia Delaunay)와의 친교로까지 이어지게 된다. 이들은 1945년에 르네 드루앵 갤러리(Galerie René Drouin)에서 열린 ≪구체 미술(Art Concret)≫전을 통해 전후의 파리 미술계에서 기하추상의 입지를 새롭게 하는 계기를 마련했던 작가들이다. 이들과의 교류는 이성자가 바젠느 그룹과의 친연성이 두드러졌던 반추상 작업인 ‘여성과 대지’ 연작을 탈피해 1970년대에 접어들면서 기하학적인 형태가 부각된 완전한 추상미술 작업인 ‘도시’ 연작을 제작하는데 있어 주요한 동인이 된 것으로 보인다.

‘도시’ 연작에서 특히 강조된 것은 음과 양으로 분리된 원의 형상이다. ‘여성과 대지’ 연작에서 땅의 생명력을 상징하는 형상으로 자주 사용되었던 원이 ‘도시’ 연작에서는 대도시가 지닌 활력을 상징하는 모티프로 변주된 것이다. 이 연작은 이성자가 파리와 뉴욕 등 서구의 대도시 풍경으로부터 감화를 받아 제작하기 시작했지만, 여기에 동양의 음양론을 연계해 도시를 음과 양의 상반된 기운이 조화를 이루는 공간으로 표현해낸 것이 특징이다. 음양의 구조로 이루어진 이와 같은 원의 형상은 이후의 작업에서도 지속적으로 등장하게 된다. 1970년대 말부터 제작되기 시작한 ‘극지로 가는 길’ 연작부터는 이와 같은 원형의 크기가 작아지는 대신 배경 공간이 보다 강조되는 양상으로 작업이 변모하게 된다. 도시 공간에 대한 관심이 전 세계 곳곳의 대도시를 이동하는 비행기 안에서 바라본 하늘 풍경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 이 연작 속의 배경은 점차 광활한 우주 공간으로까지 확장되었다.


이성자의 작업에는 프랑스 진출 이후 대지에서 정주하는 삶을 벗어나 도시를 거쳐 우주 공간에 이르기까지 보다 넓고 광활한 세계로 끝없는 이주를 거듭했던 유목민으로서의 그의 삶의 여정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이와 같은 여정 속에서 이성자는 바젠느 그룹의 미술을 비롯한 서구 미술의 여러 경향들을 이정표로 삼아 자신이 나아갈 방향을 설정했지만, 한편으로는 서구 미술의 영향과 한국적 정체성을 어떻게 연계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늘 이 여정에 함께하고 있었다. 도불 이후 화가가 된 이력과 국내보다는 프랑스를 주요 활동 무대로 삼았던 점 때문에 이성자는 한국 미술사에서는 아직 뚜렷한 위치를 점하지 못하고 있는 작가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의 유목적 여정을 탐색하는 과정은 한국 미술의 지평을 보다 국제적인 맥락으로까지 확장시켜 줄 가능성을 열어준다는 점에서 이성자에 대한 보다 다양한 후속의 연구들이 이어져야 할 것이다. 


전유신(1975∼), 이화여대 대학원 미술사학과 박사, 중앙대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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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간미술』(2018. 03)에 실린 「서울에서 파리로, 대지에서 우주까지: 이성자의 유목적 여정」을 일부 수정하여 게재함.
2) Georges Boudaille, “Renouveau de L’École de Paris”, Les Lettres Française, 7 Juin, 1962.
3)“Seung Ja Rhee”, Les Échos, 14 Juin, 1962.






이성자, <갑작스러운 규칙(Subitement La Loi)>, 1961, 캔버스에 유채, 146×114cm


이성자, <5월의 도시 N.1, 74(Cité de mai N.1, 74)>, 1974, 캔버스에 아크릴, 81×65cm 


이성자, <은하수에 있는 나의 오두막, 8월, 2000(Mon Auberge de Galaxie, aout, 2000)>, 2000, 캔버스에 아크릴, 55×46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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