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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추상표현주의자’ 최욱경 회화의 재해석 | 오유진

현대미술포럼





‘추상표현주의자’ 최욱경 회화의 재해석1)

한국 현대미술의 초반부는 서구 미술 경향의 수용과 우리 미술의 독자성을 확립하고자 하는 시도가 동시에 이루어지는 가운데 미술가들이 두 과업을 함께 성취하기 위한 방안을 치열하게 모색하던 시기였다. 유럽의 앵포르멜과 미국 추상표현주의의 영향으로 1950년대 후반 등장한 한국 앵포르멜 운동에서 볼 수 있듯이 작가들은 서양의 조형 양식에 한국적 전통을 접목시킴으로써 우리 미술을 현대화해야 한다는 시대적 요구에 응답하고자 하였다. 미국 유학을 통해 추상표현주의 대가들의 작품과 다양한 최신 미술 사조를 접한 최욱경(1940∼1985)은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독자적 양식을 구축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였다. 작가가 추상표현주의 화풍을 중심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고민하며 작업 방식을 변화시켜나간 여정은 한국 현대미술의 화두인 서구 경향의 능동적 수용과 전통성의 추구 과정을 보여주는 흥미로운 사례로 주목할 만하다.  
   
거대한 추상 화폭을 다루는 여성
최욱경은 어린 시절부터 미술에 흥미와 재능을 보였고 이를 아낌없이 지원한 부모님 덕분에 당시로서는 훌륭한 환경에서 미술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그는 1950년 김기창, 박래현 부부의 화실을 다닌 것을 시작으로 이화여중 재학시절 미술교사인 김흥수, 장운상의 지도를 받았으며 1956년 서울예고에 입학하여 김창렬, 문학진, 정창섭의 수업을 들었다. 그 후 1959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에 진학하였고 다수의 공모전에서 입상하는 성과를 올렸다. 1963년 대학을 졸업한 최욱경은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8년간 체류하면서 당시 유행하였던 추상표현주의, 팝아트 등 여러 경향을 작업에 수용하였다. 특히 그는 윌렘 드 쿠닝(Willem de Kooning, 1904∼1997)과 잭슨 폴록(Jackson Pollock, 1912∼1956) 등 추상표현주의 대가로부터 강한 영향을 받아 자신의 스타일을 구축해나가기 시작하였다. 1960년대 초반 집중적으로 제작된 그의 추상회화 작품들은 대담한 붓놀림과 화려한 색채의 사용을 특징으로 하는데, 이는 이후 선보이게 될 추상표현주의적 화풍의 전조로 여겨진다.

1960년대의 작업 목록을 보면 최욱경이 추상 작업 외에도 여러 점의 구상 작품들을 통해 당대의 다양한 사조를 실험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전시에 출품되어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킨 것은 주로 거대한 캔버스와 강렬한 색채를 특징으로 하는 그의 추상 작품들이었다. 흥미롭게도 대형 추상 작업은 1960년대 후반에 집중되었고 1970년대 이후에는 간헐적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그의 작업 전반을 포괄하는 특징은 아님에도 불구하고 많은 비평이나 신문기사에서 작품의 거대한 크기를 언급하는 부분을 발견할 수 있다. 

이처럼 작품의 대담하고 자유분방한 화풍이나 큰 사이즈에 관심이 쏠린 것은 ‘거대한 추상 화폭을 다루는 작은 여성’에 대한 세간의 호기심을 반증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당시 언론에 보도된 사진을 보면 거대한 캔버스를 당당하게 마주하고 작업하는 그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는데, 이는 곧 새로운 여성 예술가의 이미지를 탄생시켰다. 여성의 사회 진출이 자유롭지 않은 시대에 미국 유학까지 다녀온, 한국 미술계의 이채로운 존재였던 그는 여성 작가에 대한 사회의 고정관념에 반하여 남성의 것으로 여겨지는 조형 어법을 구사함으로써 탈여성화된 예술가 이미지를 획득하였고 당대의 주류 미술계에 다가설 수 있었다.

한국 화단의 이방인
최욱경은 1971년 귀국하여 전시와 활발한 학술 활동을 펼치다 1974년 다시 미국으로 떠나게 된다. 그가 귀국한 1970년대 초는 국내에서 앵포르멜 미술이 하나의 정형으로 자리잡게 되면서, 다른 한편에서는 기하추상과 오브제, 설치 작업이 활발히 이루어지던 시기였다. 또한 민족주의적 성향이 강한 사회 분위기 속에서 단색조 회화가 부상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추상표현주의 화풍은 쇠퇴기를 맞고 있었고, 그의 작품은 1960년대의 경향을 답습하는 것으로 인식되어 큰 주목을 끌기 어려웠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이 시기 최욱경은 미국 사조를 답습한 화가라는 선입견에 도전하듯 한국적 요소를 작품에 도입하는 다양한 시도를 선보였다. 당시 국내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장판지, 골판지, 한지 등의 재료에 작가 특유의 자유롭고 강한 필치를 결합시킨 작품들이 그 예이다. 또한 우리 민화의 구도와 소재, 색채에서 영감을 받은 작품과 한지에 먹을 사용한 서체추상과 흡사한 작품을 제작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짧은 시기 동안 이루어진 다양한 시도는 우리로 하여금 한국적 요소를 서구적 양식에 접목하기 위해 고군분투했을 작가의 고민을 짐작케 한다. 
  
여성성과 한국성의 자각
1974년 미국으로 떠났던 최욱경은 1979년에 영남대학교 사범대학 회화과 부교수로 부임하면서 한국으로 돌아오게 된다. 이후 1980년대에 그는 꽃을 모티프로 한 작품을 다수 발표하였다. 이전 작품들이 추상적 형태와 역동적인 선, 화려한 색채를 특징으로 하였다면 이 시기 작품들은 구체적인 형상을 통해 꽃, 열매, 여성의 성기 등을 연상시키고 밝은 색감을 주조로 하여 여성적 감수성을 드러낸다. 이 작품들은 색채와 표현 방식에서 조지아 오키프(Georgia O'Keeffe, 1887∼1986)의 작품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측된다. 확대한 꽃의 형태를 감각적으로 표현한 그림으로 잘 알려진 오키프는 1980년대까지 뉴 멕시코에 거주하며 작품활동을 펼쳤다. 최욱경은 1976년 뉴 멕시코에 위치한 로스웰 미술관의 레지던시 프로그램에 선정되어 10개월 간 그곳에 머무르며 작품 제작에 몰두하였다. 당시 미국에서 여성주의의 부상과 함께 오키프의 작품이 다시금 주목 받고 있었고, 그가 뉴 멕시코에 거주하며 작업한다는 사실이 잘 알려져 있었음을 감안하면 최욱경의 작업에서 오키프의 영향과 여성적 감수성을 언급하는 것이 비약은 아닐 것이다. 

한편 그가 영남대 교수로 재직하던 시기에는 전통의 보존과 근대화의 달성을 강조하는 사회ㆍ정치적 분위기와 맞물려 미술에서도 당대성과 독자성을 추구하는 단색조 회화가 화단의 주류로 자리잡고 있었다. 단색조 회화의 절제된 색과 평면성이 강조되는 화면이 초월적 정신성을 표상하며 한국의 전통미와 연결되던 이 시기에 강렬한 색채와 생동하는 움직임을 특징으로 하는 최욱경의 작업은 낯선 것, 혹은 시대의 흐름을 거스르는 것으로 받아들여졌을 법하다. 작가가 귀국 후 산을 모티프로 한 일련의 작품들을 그리게 된 데에는 이러한 미술계의 맥락과 개인적 상황이 함께 작용했으리라 여겨진다. 

그는 영남대학교에 재직하면서 그 지역의 산의 형상에 큰 관심을 갖고 이를 작품의 소재로 삼았다. 이 시기 제작된 여러 점의 작품에서 산과 바다는 비교적 구체적인 형상으로 묘사되고 있으며, 산들이 중첩되어 부드러운 선의 흐름을 만들어내는 가운데 이전보다 절제된 색의 사용이 눈에 띈다. 일부 작품에서는 직선이나 원을 사용하여 프레임을 통해 산을 바라보는 것 같은 효과를 주며 화면에 깊이를 부여하거나 단절된 느낌을 표현하기도 한다. 이들 작품에 나타난 자연에 대한 관심은 김환기, 유영국, 류경채 등 우리나라 초기 추상 작가들의 작업에서 자주 발견되는 것이기도 하다. 그들은 서구적 조형 어법을 따르면서도 우리의 문화적 전통을 담아내기 위해 자연 풍경을 즐겨 그렸다. 최욱경 역시 당시의 주류 경향인 단색조에 동화되기 보다는 우리 자연에 대한 관심을 통해 민족적 정체성을 추구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한 예술가의 특정 면모를 부각시키고 신화화하는 것은 그를 사람들의 뇌리에 깊이 각인시키지만 작품을 바로 보는 데는 장애물이 되기도 한다. 최욱경에게 따라붙는 ‘한국적 추상표현주의의 선구자’라는 간단한 수식어는 다채롭게 변모해온 그의 작업을 하나의 흐름으로 단순화시키는 위험성을 안고 있다. 또한 작가의 예술가적 기질과 45세에 요절한 짧은 생에 초점을 맞춘 다수의 평론과 언론 기사는 그를 당대 한국 미술계에 적응하지 못한 염세적 태도를 지닌 인물로 묘사해 왔다. 이와 함께 그가 한국 주류 화단의 흐름에서 벗어난 작업을 지속했다는 점은 그의 작품을 작가의 개인적 성향과 미국 사조의 영향에서 비롯된 산물로 한정시켜 한국 현대미술사의 맥락에서 소외시켜 왔다.  

최욱경의 작업을 전반적으로 살펴보면 그가 처한 상황의 변화가 작품에 고스란히 반영되고, 그에 대한 작가의 반응과 고민이 담겨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그의 작업을 한국 미술계와의 관계 속에서 살피는 것이 작품에 나타나는 변화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열쇠가 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미국의 최신 사조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그의 초기 작업과 우리 것에 대한 고민을 보여주는 후기 작업들, 여성성의 자각과 자연 모티프의 도입을 통해 한국성의 추구로 나아가는 과정은 한국 현대미술이 안고 있었던 서구 사조의 수용과 민족적, 개인적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일어나라! 좀 더 너를 불태워라!” 화가의 작업실에 걸려 있었다는 이 문구는 여성에게 주어진 제약을 극복하고 예술가로서의 확고한 정체성을 구축하기 위해 쉼 없이 정진했던 그의 치열한 인생에 오버랩된다. 


오유진(1980~), 이화여대 대학원 미술사학과 박사과정 수료, 한경대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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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키워드로 읽는 한국현대미술』(윤난지 외 지음, 사회평론, 2019)에 실린 「‘추상표현주의자’ 최욱경 회화의 재해석」을 일부 수정하여 게재함.







최욱경, <무제>, 1964, 캔버스에 유채, 63×51cm



최욱경, <당신은 여기 있읍니다>, 1972, 한지에 아크릴, 136×91cm



최욱경, <섬들처럼 떠있는 산들>, 1984, 캔버스에 아크릴, 73.5×99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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