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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배형경: 청동으로 사유하고 청동으로 깨어나다 | 김홍희

현대미술포럼




배형경: 청동으로 사유하고 청동으로 깨어나다

1.
내가 조각가 배형경을 처음 접하고 그의 작업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2010년 김종영 미술관 개인전 ≪생각하다 말하다≫를 통해서이다. 전시장에 진열된 그의 작업은 요즘 흔히 볼 수 없는, 언뜻 레트로 감성을 환기시키는 청동 인체상이었다. 그러나 배형경의 조상들을 관조하며 느끼는 감흥은 정통 고전 청동상의 진선미 미학과는 다른, 그 범주를 넘어서는 묵시록적 중압감이었다. 인간의 원죄, 이승의 업보를 짊어진 듯, 그의 피조물들은 머리에 쇠막대를 이고 벽면에 머리를 처박고 웅크리거나 거꾸로 서있다. 분명 인체의 재현이지만 성별도 없고 이목구비도 생략된 채로이다. 그것은 인간의 모습과 닮게 만들려는 모방적 의지보다는 플라톤식의 초월적 “이데아”를 담보하는, 그 자체로 존재하는 절대형상이었다. 그의 피조물이 풍기는 중압감 또는 비극적 감흥은 거의 동일한 개체를 반복적으로 배열한 군상의 미장센으로 더욱 극대화된다. 너와 내가 아니라 너 없는 나의 무리들인 그의 군상은 서로가 서로의 분신으로서 혼란스러운 복수 정체성, 또는 제로 상태의 주체성을 암시한다.

배형경의 조상은 인간존재에 대한 근원적 물음이자 자코메티(Alberto Giacometti)에서 아부라모비치(Marina Abramović), 안토니 곰리(Antony Gormley)로 이어지는 추상적 사유방식과 탈재현적 조형탐구의 결과물로 여겨진다. 나아가 1990년대 이후 시대적 화두인 “포스트휴먼”의 존재론적, 인식론적 고뇌의 반영으로 비춰진다. 카르마적 고행의 주체로서 비인간적 초월성, 비종교적 신성, 타자적 소외감을 표출하고, 신체 변형과 단일 섹스 발상으로 보는 이를 동요시키고 당혹시키는 그의 조상은 섬뜩하고 공포스럽기까지하다. 이것이 바로 정체성 위기를 겪는 포스트휴먼, 고전 신체, 모던 신체의 정상성과정형성을 위반하는“그로테스크” 신체, 또는 염세적 파토스 미학과 맞닿아 있는 배형경 고유의 “묵시록적 중압감”의 정체가 아닐까?

2. 
포스트휴먼 풍모를 지닌 배형경 조상이 고전 재료인 청동으로 만들어진다는 흥미로운 아이러니가 그의 작품 세계를 이해하는 하나의 단서가 된다. 무엇보다 기원전 4000년전 금속제련 기술로 발명된 청동이 비자연주의적으로 고양된 정신성을 표현하기에 적합한 조형매체로 간주되었던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외부세계에 대한 인간의 호기심이 약화되고 심리적 내면화가 일어났던 청동의 시대, 미술도 점차 사실적, 구상적 모방에서 상징적, 추상적 표현으로 변화하면서 나무나 돌보다는 청동이 조각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공했다는 것이다. 청동의 발생적 기원으로 볼 때도 그렇거니와, 비가시적인 것에 대한 비상한 관심으로 형태의 왜곡을 선호했던 신비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미지의 인간 내면을 형상화하는 배형경이 청동에 이끌린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작가는 청동으로만 가능한 조형적 표현에 매료되어 고난도의 공정 과정을 마다하지 않고 청동상 제작에 매진한다. 철근을 용접하여 만든 1차 점토 원형위에 석고 거푸집을 올려 2차 플라스틱 원형을 만든 후 그것으로 몇 차례의 청동 (때로는 알루미늄, 쇠, 스텐리스) 캐스팅을 수행한다. 여기까지가 통상적인 주조 단계라면, 약품과 불로 산화 채색을 하고 암모니아로 부식시킨 후 컬러링과 왁싱하는 마무리 과정은 오롯이 배형경 만의 것이다. 이 후기제작에서 작가는 장인적 노동과 기교로 점토 원형의 디테일을 살려가며 추상적 붓질 같은 일획 일획의 터치로 표면 텍스처를 만들어 나가는데, 이를 통해 그는 청동 피조물에 자신의 표현적 DNA를 불어넣는 것이다.

청동은 또한 복제를 가능케 하는 주물 기법이라는 점에서 군상을 제작하는 작가의 매체로서 효력을 갖는다. 물론 배형경은 청동상 하나하나의 표피 디테일을 달리하고 있지만 기본적으로 동일한 군상을 제작하기 위하여는 캐스팅이 필수적이다. 군상은 형이상학적 단일 주체를 해체시키고 그 자리에 복수 정체성, 분열된 자아를 대치시킨다는 맥락에서 후기신체를 실현하는 한 가지 기제가 될 수 있다. 그는 대표적인 고전매체 청동으로 비/반고전주의적 파토스 감성을 표출할 뿐 아니라, 군상의 아이디어로 유일성과 정통성이라는 모더니즘 이데올로기에 도전하며 모던맨 이후의 인간상, 즉 포스트휴먼을 창조하는 것이다.

3.
청동으로 정평을 얻고 조상으로 일가를 이룬 작가는 2017년 갤러리 시몬 개인전 ≪말러와 눕다(Lying with Mahler)≫에서 청동대신 폴리에스터로 기법상의 변화를 시도한다. 점토 원형에 실리콘 액으로 거푸집을 만든 후 안의 점토를 제거하고 그곳에 폴리에스터 원액을 채운 후 실리콘 겉틀을 뜯어내면 안의 폴리 원형이 나온다. 실리콘 거푸집으로부터 얻어낸 동일한 원형들은 몇 차례의 사포질과 왁싱을 거쳐 윤기 나는 피부색의 폴리 인물군으로 탄생된다. 그 중 먹물로 채색한일부 조상들은 물감이 자연스럽게 스며들면서 청동스러운 느낌을 준다. 작가는 실리콘, 폴리, 수성페인트 등 실용적 현대 재료를 사용하여 청동의 고전적 아우라의 무게를 덜어 내는 한편, 전시 방식에서도 등신대 인물 군상을 평소처럼 세우지 않고 바닥에 눕히는 극단적 설치방식으로 전통 기념비적 입상의 규범을 깨는 죽음의 드라마를 연출했다.

<말러와 눕다>에서 작가는 청동의 연금술에 집중하기 보다는 인간의 실존적 번뇌라는 자신의 영구 주제를 죽음의 문제로 확장, 심화시키고 있다. 비영구적 재료인 폴리의 사용으로 죽음을 은유하고, 무기력하게 사지를 늘어뜨린 채 바닥에 너부러져 있는 군상의 재현을 통해 죽음에 이르는 삶, 삶을 마감시키는 죽음의 극한 상황을 시각화하는 것이다. 우연처럼 예측할 수 없고, 실체를 알 수 없는 삶과 죽음 자체가 그렇듯, 그 광경은 공포스러우면서도 환상적이다. 동전의 양면처럼 맞닿아 있는 환상과 공포의 이중 감흥, 이것이 바로 실존적 고뇌와 고통의 무게로 짓눌린 배형경 작품에 생명력과 공감의 동기를 부여하는 미학적 포인트이다. 

4.
고전의 무게를 덜어내기 위한 재료와 양식상의 실험은 2019년 갤러리 시몬 개인전 ≪채색하중(Colorful Weight)≫에서 크롬, 캔디, 고스트 등 광물성 칼라 페인트를 사용하는 새로운 국면으로 전개된다. 자동차, 화장품케이스 등 산업제품에 많이 쓰이는 광물성 페인트를 청동위에 분사방식으로 도포하여 분홍, 빨강, 파랑, 초록 색상의 칼라 청동상을 제작한 것인데, 이 뜻밖의 칼라 청동상을 채색하지 않은 원래의 청동상과 함께 배치하여 칼라 효과를 더욱 강조하였다. 2017년 개인전에서는 폴리에스터 표면에 먹물을 입혀 청동 효과를 낸 의사 청동상이 그랬듯이, 이번에는 청동에 크롬칼라 옷을 입힌 컬러풀한 “팝” 청동상이 전시의 하이라이트가 된 것이다.

그는 왜 청동 원형위에 메탈릭한 컬러를 도색한 것일까? 일반적으로 크롬은 거울광의 매끄러운 표면 효과를 내기 위해 플라스틱이나 제프 쿤스(Jeff Koons) 경우와 같이 스테인리스 모델위에 도포한다. 그런데 그는 구태여 청동을, 힘든 캐스팅 공정을 요구하는 청동을 단지 칼라 페인트를 올리는 표피로 사용한다. 이 물음에 대한 작가의 대답은 청동 표면만이 크롬의 선명한 발광 효과와 텍스처 디테일을 살려준다는 것이다. 산화, 부식, 컬러링, 왁싱으로 표면 효과를 강조하는 청동상의 후기제작 과정이 말해주듯이, 청동만이 작가가 원하는 칼라와 질감, 그 “악마 같은 디테일”을 충족시켜 주는 것이다.

그러면 어둡고 칙칙한 청동색에서 컬러풀한 메탈릭 컬러로의 변신, 칼라 테마 청동상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이 작품 역시 “인간본성과 존재의 근원에 대한 관심”의 연장선상에서 “인간이 태어나서 살다 죽는 여정을 그린 것”임에 틀림없지만, 여기서 작가는 강렬하게 발광하는 칼라를 등장시키며 인생의 무상함을 강조하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무거운 삶의 수많은 이야기를 위장하고 포장하며” 살아가는, 욕망이라는 심리적 “벽을 넘지 못하고 추락”하는 나약한 인간 존재를 표현하고자 했다는 작가의 진술이 암시하듯이, 현란한 칼라의 근작 청동상은 허영과 허무, “바니타스”의 메타포로 묘사한 17세기 플랑드르 여성 화가들의 화려한 꽃 정물화를 환기시킨다.

4. 
근자의 폴리에스터 실험, 크롬칼라 시도에도 불구하고 배형경은 청동작가이다. 그는 청동으로 생각하고 청동과 유희하며 청동에 의해 깨어난다. 청동과의 배틀, 또는 청동과의 한판 승부를 통해 이 시대의 청동작가로서 자리매김 될 것임에 틀림없다.

통상적으로 조각은 돌이나 나무를 깎거나 점토나 회반죽으로 조형하거나 금속을 붙이거나 주물을 떠서 만드는 3차원의 시각 조형예술을 일컫는다. 주로 인체 묘사에 의거했던 고전 조각과 달리 순수 추상조각이 성행했던 모더니즘 시대 이후에는 재료나 기법이 다양해지고 양식상의 자유가 주어지면서 조각의 범주가 확장, 미니멀리즘 조각, 파운드 오브제 등 새로운 현대조각 장르가 탄생했다. 한편, 고전 인물상을 대변하는 조상(statue)은 그것이 재현적이거나 추상적이거나 간에 돌, 나무, 점토, 청동 등을 사용하여 인간이나 동물 형상을 본뜬 3차원 예술을 통칭한다. 조상, 즉 스태추가 “스탠딩(standing)” 이라는 어원에서 비롯되었듯이 대부분 입상이며, 역사적 인물이건 신화적 인물이건 휴머니즘이나 인간적 풍모를 강조하기 위하여 많은 경우 등신대 크기로 제작된다. 

위의 기준으로 볼 때 배형경의 인물상이 현대적 의미의 조각이라기보다는 고전적인 조상으로 분류된다는 점이 분명해진다. 매체적으로도 그는 설치미술, 퍼포먼스, 개념미술, 비디오아트, 뉴미디어아트가 대세인 현대미술 장면에서 동떨어져 보이고 구식 같은 청동 조상을 고수하고 있지 않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조상은 이상화된 신체적 아름다움과 거리가 먼, 신비주의, 표현주의 경향의 비고전성, 나아가 정신분석학적 시각으로 감지되는 뜻밖의 현대성으로 고전주의를 벗어난다. 청동 조상의 규범을 깨는 역발상, 청동으로 청동을 초극하는 동종요법으로 고전주의를 벗어나고 모더니즘을 건너뛰어 포스트모더니즘으로 진입하는 것이다. 고전성과 포스트모던 동시대성을 왕래하면서 획득된 양면가치와 애매모호함의 미학으로 독자에게 새로운 미학적 경험을 안겨주는 점에서 배형경 작품의 진가를 평가할 수 있다.


김홍희(1948∼), 백남준문화재단 이사장, 전 서울시립미술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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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형경, <생각하다 말하다>, 2010, 김종영미술관 설치장면 



배형경, <말러와 눕다>, 2017, 갤러리 시몬 설치장면 




배형경, <채색하중>, 2019, 갤러리 시몬 설치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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