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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강애란의 “디지털 책”, 페미니즘의 옷을 갈아입다 | 김홍희

현대미술포럼







강애란의 “디지털 책”, 페미니즘의 옷을 갈아입다
 
1. 
강애란(1960∼)은 2000년대 초부터 전자 시대 이후 책의 변화와 그 의미에 대해 숙고하며 공감각적으로 확장되는 디지털 책의 제작에 전념하고 있다. 작가의 디지털 책은 몰드로 만든 책의 모형(replica) 내부에 LED 라이트를 장착시킨 조명책을 근간으로 이루어진다. 빛으로 탈물질화 된 조명책은 시각에만 의존하던 인쇄본과 달리 온몸으로 감지하는 공감각적 인지력을 요구한다. 공감각적 반응을 요구하는 전자매체에 의해 인간 주체는 인쇄매체에서 붕괴되었던 감각의 다양성을 회복하고 지각체계의 변화를 경험한다. 이것이 마샬 맥루한(Marshall McLuhan)이 전자매체의 메시지로 파악하는 “인간의 확장”의 의미인 바, 강애란 역시 미디어 책의 메시지를 책의 확장, 문명의 확장, 역사의 확장을 통한 인간의 확장이자, 책과 인간의 통섭적 상호작용으로 인식하고 있다.
 
강애란의 디지털 책 프로젝트는 애초에 지식의 보고라는 책에 대한 경의이자, 동서양 문화사, 지성사, 미술사 서적의 “시뮬레이션” 또는 가상의 책으로 개념화되었다. 그러나 2015년경부터 작가는 한국 여성 예술가라는 자신의 정체성과 관련된 주제의식으로 내용상의 일대 변화를 이끌어낸다. 허난설헌, 신사임당과 같은 조선시대의 여류 시인들, 박에스터를 비롯한 개화기 의학 분야 여성 선구자들의 궤적을 조명책과 투영작업으로 재조명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나혜석, 김일엽 등 타고난 재능에도 불구하고 불행한 말로를 겪은 문예 분야 신여성, 이름 없이 사라진 여성 독립운동가, 일본군에 강제 징발된 위안부 등 일제 강점기의 다양한 계층의 여성들의 서사와 그들에게 가해진 억압과 폭력을 고발한다. 그의 <디지털 책 프로젝트>가 이제 시공간적으로, 젠더적으로 특정적인 역사 속의 주역을 만나 <디지털 페미니즘 책 프로젝트>로 재탄생하는 순간이다.
 
작가는 이제 서구문화와 예술에 대한 지적 호기심을 잠시 멈추고, 아직까지도 무의식적, 무비판적으로 용인되고 있는 서구중심주의, 남성중심주의 담론에 인식론적 비판을 가하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심장한 변화의 배경은 무엇일까? 필자는 가부장제가 최적화된 사회에서 여성은 누구나 성적 불평등의 경험과 때로는 성폭력, 성희롱의 비밀스런 기억의 트라우마로부터 해방되고 싶은 욕망을 갖고 한번쯤은 성정체성과 젠더를 의식하는 본연의 페미니스트가 되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해본다. 중요한 점은 강애란 경우 이러한 행보를 일시적 관심이 아니라 지속적 매체 연구와 주제 발굴로 이어가면서 “테크노 페미니즘”의 함의에  주목하는 페미니스트 미디어 아티스트로서 앞날을 기대하게 한다는 점이다.
 
2.
2000년대 초부터 제작된 오브제 타입의 디지털 책은 2006년 이후 관객과 상호작용하는 “인터랙티브” 설치로 확장된다. 2009년 카를스루에 ZKM 전시 《책의 공간-숭고》와 시몬 갤러리 전시 《숭고-헤테로토피아 공간》에서와 같이, 관객이 디지털 책을 들고 “책 읽어주는 방”으로 들어가면 센서에 의해 책 내용을 알리는 텍스트와 이미지가 사방 벽면에 비춰지고 텍스트 내용이 낭독된다. 텍스트, 비디오 이미지, 낭독 음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상영될 때에 관객은 온몸으로 느끼는 새로운 공감각적 독서를 경험하게 된다.
 
상기한 <숭고> 시리즈에서와 마찬가지로, 2011년 <빛나는 시(Luminous Poem)>에서는 디지털 조명책으로 만들어진 10권의 시집이 센서로 관객에 반응하며 시를 읽어주는 전자 환경으로 변환된다. 전자에서는 프리드리히(Caspar Friedrich), 터너(William Turner), 로스코(Mark Rothko), 뉴먼(Barnett Newman), 터렐(James Turrell) 등 숭고미학과 관련된 근현대 대가들의 작품세계가, 후자에서는 밀턴(John Milton), 에머슨(Ralph Waldo Emerson), 앨런 포(Edgar Allan Poe),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 키츠(John Keats), 바이런(George Gordon Byron) 등의 낭만적 시구들이 관객과 상호작용하며 미학적 감흥을 불러일으킨다.
 
그런데 왜 서구의 남성작가들인가? 작가는 자각의 질문을 던지기 시작한다. 왜 우리에게, 나에게 역사적 남성 예술가들이 칭송의 우선적 대상이 되는가? 왜 그들이 표준이 되고 우리 여성들은 그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것일까? 젠더 의식이 일깨워진 작가는 2011∼14년 사이 서양의 “마스터”들 대신 한국의 “미스트레스”에 시선을 돌리며 한국 여성을 주제화하는 최초의 변화를 시도한다. <빛나는 도서관-여전사> 연작에서와 같이 그는 허난설헌, 이매창, 신사임당 등 조선조 여류시인을 대상화한 디지털 책과 그들의 시구를 벽면과 바닥에 투사하는 영상작업을 선보이며, 역사의 뒤안길에서 망각된 여성문인들의 유산을 지금/여기 미디어 여성 작가의 시선으로 발굴, 재평가하는 것이다.
 
강애란은 이러한 의식의 연장선상에서 일제강점기 강제 징발된 위안부 여성을 주제화한다. 군대용 위안소를 제도화하고 식민지 및 점령지 출신의 여성들에게 성노예 역할을 강요한 일본의 역사적 패륜, 그리고 그에 희생당한 여성 피해자들, 나아가 후세대 한국 여성들의 분노를 디지털 책과 영상 설치로 고발하는 것이다. 2015년 갤러리 시몬에서 《빛나는 도서관-위안부》로 시발된 위안부 작업은 같은 해 서울시립미술관 《판타시아(FANTasia)》전과 광동 아시아 비엔날레에 출품한 <응답하라(Revoice)>에서 본격화된다. 한국과 아시아 위안부 여성들에 가해진 폭력의 증언과 흔적을 아카이브, 텍스트, 다큐 영상, 인터뷰, 사운드로 구성하여 총체적 멀티미디어 환경을 만들었다.
 
<응답하라>의 하이라이트는 “외침의 동굴”이다. 위안부 여성들을 수용하였던 곳으로 전해지고 있는 동남아 자연 동굴들을 참조로 시청각적 공명이 일어나는 복합적 헤테로토피아, 즉 동굴의 시뮬라크럼을 창조한 것이다. 동굴은 깊고 어두운 지형적 특성으로 자궁의 메타포로 여겨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 음침한 지하 이미지가 지옥을 연상시킨다. 위안부 사건은 여성적 모태 공간을 남성적 범죄의 현장으로 치환시킴으로써 동굴의 이중적 함의를 왜곡시켰다. 동굴로 대변되는 여성적 알레고리와 부계적 억압의 역사, 초현실과 현실, 미래의 희망과 과거의 트라우마의 경계에서 작가는 미디어 영매를 통한 치유의 판타지를 서술한다.
 
3.
강애란은 2016년 아르코 미술관 전시 《그녀들만의 방(A Room for Her Own)》에서 우리 근대 여성사의 한 페이지를 차지하는 선각자 신여성들의 삶과 그들의 예술적 업적을 재조명한다. 버지니아 울프(Virginia Woolf)의 소설 <자기만의 방>에서 영감을 얻은 이 작품에서 작가는 우선 200여점의 디지털 책을 육각형의 지혜의 탑으로 쌓아올리고 그 주위로 나혜석, 김일엽, 최승희, 윤심덕, 위안부에 바치는 5개의 방을 배치하였다. 1920∼30년대 자유주의 페미니즘 영향으로 여성 해방을 부르짖었지만 가부장제의 요새 속에서 응답 없는 외침으로 사라져간 신여성들은 동시대 사회문화 현실, 젠더 정치학의 희생물들이라는 점에서 성폭력의 피해자 위안부들과 다를 바가 없다.
 
이 작품을 위해 작가는 방대한 리서치를 바탕으로 다큐멘터리, 아카이브, 영상, 사진이 어우러지는 멀티미디어 환경을 조성했다. 나혜석 경우 화실을 재현하고 유화작품을 영상화 하는 한편 그가 기고했던 잡지를 LED 조명책으로 제작했다. 김일엽의 8편의 시는 하이퍼텍스트로 변환되어 조명책에 투사 되었고, 그의 육성은 사운드 작업으로 발췌, 편집되었다. 그 밖에 무용가 최승희의 다큐멘터리 영상, 성악가 윤심덕의 <사의찬미>, 보상 문제로 일본 정부와 갈등을 겪는 위안부 문제가 영상 자료들로 집대성되었다.
 
2019년에는 3·1운동 백주년을 맞아 마련된 특별기획전이자 아카이브 형식의 전시인 국립여성사전시관의 《여성, 세상 밖으로 나가다》와 세종문화회관에서의 《여성독립운동가 공감, 기억 그리고 미래》에 유일한 출품작가로 참여한다. 독립운동하면 33인의 남성 애국지사를 떠올리지만, 실제 독립운동에 몸 바친 무수한 여성들이 있었다. 이들 가운데 정부는 확인된 여성독립운동가 432명을 독립유공자로 서훈했으며 강애란은 유관순, 권기옥, 김마리아 등 열사들을 조명책에 담아 여성기록관에 헌정하였다. 33인의 개별 연구에기초하여 사진과 텍스트로 구성한 작가의 디지털 책은 동 아카이브 전시의 하이라이트이자 33인의 남성 열사의 대척점에서 처음으로 존재감을 드러낸 여성열사의 조명책이었다.
 
강애란은 같은 해 “보구여관” 건립 132주년 기념전에 아카이브와 함께 자신의 작품을 전시했다. 보구여관은 1887년 메리 스크랜튼(Mary Scranton) 선교사가 설립한 한국 최초의 근대식 여성병원이자 여성 의학·교육기관이었다. 작가는 정동 한옥에 있던 보구여관을 고증을 거쳐 마곡에 위치한 이대 서울병원에 복원한 기념관에 《보구여관을 복원하다: 숭고-헤테로피아 공간》이라는 미디어 설치작업을 선보였다. 자료에 기록된 7개의 방 가운데 대기실, 진료실 겸 약제실, 박에스터방, 역대 병원장방, 간호사 양성소 방을 구현하고, 대기실에 초대 병원장 메타 하워드(Meta Howard)를 비롯한 역대 병원장들과 초대 간호 원장인 마가렛 에드먼즈(Margaret Edmunds)의 디지털 책을 진열했다. 간호사 양성소 방안에는 이들 간호사들의 업적을 홀로그램으로 재현하였다.
 
4.
2011년 이후 젠더로 의식화된 강애란은 조선조 여류 문인부터 개화기 엘리트 여성과 일제강점기의 유학파 신여성, 그리고 일본군 성노예위안부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게 한국 페미니즘역사의 선봉에선 인물들을 주제화하고 있다.
 

한국 페미니즘의 불을 지핀 19세기말∼20세기 초 여성 개화운동은 서구의 사회주의 정치운동, 참정권을 비롯한 여권신장운동과 다르게 애국적 민족주의 사상 속에서 계몽운동으로 전개되었다. 국가의 실권을 회복하고 부강하기 위하여 여성도 남성과 같이 교육 받고 외국문물을 받아들여 문명개화에 기여하고 독립운동에 동참해야 한다는 공동체 의식으로 한데 뭉친 것이다.
 
3.1운동에서 절정에 달한 민족주의 여성개화운동에 이어 1920∼30년대에는 나혜석, 김일엽, 김명순 같은 급진적 문예인들의 개인주의, 자유주의 사상이 동시대 페미니즘을 대변한다. 페미니즘에 섹슈얼리티를 도입하고 성도덕율의 변화를 초래한 엘렌 케이(Ellen Key)의 영향 하에서 이들은 자유연애, 성해방을 주창하며 시대적 “앙팡테리블”로 등장했다. 이들은 모두 동경유학생 출신으로 중산층을 지지기반으로 하는 서구식 자유주의 신봉했을 뿐 식민치하의 가부장제도와 자본주의에서 억압받는 민중여성의 현실은 제대로 보지 못했다. 개인주의적 실천을 택함으로써 사회적 맥락에 통합되지 못하고 여론의 비난 속에서 비극의 종말을 맞게 되는 이들의 비화가 자유주의 여성해방론의 모순을 반영하지만, 이보다 중요한 점은 바로 그것이 이들의 작품마저 망각의 늪으로 좌천시키는 요인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근대기 한국사회에서 여성이 교육을 받고, 사회 활동을 하고,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는 것 자체가 통념을 위반하는 비/반여성적 행위로 비춰진다. 이런 과정에서 창작자의 길에 들어선 여성의 삶은 편견과 오해로 왜곡되고 그들의 작업은 주변화 되는 것이다. 문제는 주류 남성의 작품을 학습하고 선호하는 여성 독자/관객의 공감 경험이 여성작가를 소외시키는 차별화 과정과 일치한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여성작품을 연구하여 주변화를 막고 여성경험의 특수성을 긍정적으로 파악하는 행위 자체가 페미니즘 행위가 될 수 있다.이것이 근대 여성사를 탐구하고 여성 예술가의 서사를 소환시키는 동시에 그들의 작업을 현대적 미디어로 재창조하는 강애란의 근작을 페미니즘으로 독해할 수 있는 근거이다.
 
강애란은 디지털 미디어와 페미니즘을 접목시켜 디지털 책을 “디지털 페미니즘 책”으로 재탄생시키는 지점에서 여성의 억압과 기술적 지배 사이에 공모적 연관성이 있다는 기존 “테크노 페미니즘” 부정적 함의를 부정하고, 테크놀로지 아트, 또는 미디어 아트가 여성적 범주로 재편, 탄생될 수 있다는 가능성에 기대를 걸게 한다. 테크놀로지가 남성의 전유물이라는 고정관념을 깨고 여성작가에 의해 실험, 수용될 때에 미디어 아트의 지평이 확장될 수 있다.결국 책의 확장, 기술의 확장이 젠더 불균형을 종식시키는 인간의 확장으로 이어질 때 강애란 디지털 책의 메시지가가 완성되는 것이 아닐까? 페미니즘의 옷을 갈아입은 강애란의 <디지털 책 프로젝트>, 즉 “디지털 페미니즘 책”은 젠더가 도구가 아니라 의식 전환을 촉발시키는 단초이자 계기라는 점을 재차 확인시킨다.


김홍희(1948∼), 백남준문화재단 이사장, 전 서울시립미술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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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애란, 2015, 서울시립미술관 《판타시아(FANTasia)》 전시 설치장면



강애란, 2016, 아르코미술관 《그녀들만의 방(A Room for Her Own)》 전시 설치장면




강애란, <가상의 의학서적-오픈 라이팅 북>, 2019, LED 라이트, 50x70x10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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