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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정강자의 ‘위험한 몸’ | 조수진

현대미술포럼





정강자의 ‘위험한 몸’


1964년, 미국의 여성 작가 캐롤리 슈니만(Carolee Schneemann)은 로버트 모리스(Robert Morris)와의 협업으로 에두아르 마네(Edouard Manet)의 회화 <올랭피아(Olympia)>(1863)을 재연한 퍼포먼스 <장소(Site)>를 발표했다. 1968년, 한국의 여성 작가 정강자는 강국진, 정찬승과 함께 당시엔 해프닝으로 불렸던 퍼포먼스 <투명풍선과 누드>를 선보였다. <장소>는 클레멘트 그린버그(Clement Greenberg)가 회화의 평면성 추구의 모범 사례로 높게 평가했던 마네의 작품에 연극성을 부여해 형식주의 모더니즘에 반발하려 했던 시도였다. 또 세시봉 음악 감상실에서 전통적 누드화를 대중적 쇼로 변환해 소개했던 <투명풍선과 누드>는 1949년 제1회 《국전》에서 김흥수의 누드화 <나부군상>이 풍기문란으로 철거된 일을 풍자하기 위해 기획된 것이었다. 두 작품 모두 과거의 명화나 역사적 장면들을 현실에서 실시간으로 재연하는, ‘활인화(活人畫, tableau vivant)’의 형식을 취한 퍼포먼스로서 여성의 누드를 소재로 삼았다. 그리고 정강자와 슈니만은 첨단의 미술 형식인 퍼포먼스 아트를 통해 기성 미술에 저항하고 미술계의 혁신을 견인하고자 했던 당대의 전위로서, 남성 동료의 제안을 수용해 기꺼이 작품 속 살아있는 여성 누드가 된 작가들이었다. 

<장소>에서 슈니만은 검은 초커 목걸이만 두른 나신의 모습으로 침상에 기대 있었으며, 동료 작가 모리스는 마스크를 한 채 무대 여기저기에 나무판자들을 배치하는 일상의 노동 행위를 수행했다. 퍼포먼스 내내 슈니만은 부동자세로 매매춘 여성 올랭피아의 역할을 연기하며 그야말로 그림 그 자체가 되었다. <투명풍선과 누드>에서 흰 셔츠와 타이즈 차림으로 무대 위에 등장한 정강자는, 동료들에 의해 칼로 옷이 찢기면서 하의 속옷만 착용한 채 나신을 드러냈다. 해프닝은 전위 음악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작가의 몸에 사람들이 투명풍선을 입으로 불어 붙이다가 터트리면서 끝이 났다. 정강자와 슈니만은 이처럼 작품 속에서 가상의 이미지인 누드를 현실의 알몸으로 전환하는 역할을 담당했으며, 그 과정에서 여성인 자신의 몸을 스스로 대상화했다. 이 특수한 경험은 두 작가의 향후 행보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는데, 그 결과는 서로 달랐다. 

슈니만은 올랭피아가 주인공인 <장소>가 “페미니즘적인 관심사”와 연결될 수 있다고 여겨 작품에 참여했으나, 곧 자신의 의도가 성차(性差)에 무관심한 모리스의 기획에 압도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실제로 퍼포먼스 발표 이후 모리스에게는 구축자, 나아가 미니멀리즘의 선도자로서의 이미지가 부여된 데 반해, 슈니만을 성적으로 대상화하는 세간의 시선은 더욱 강해졌다. 그러나 그는 이에 좌절하지 않고, 남성적 응시의 대상인 여성의 몸을 자기애적인 주체성을 지닌 여성 퍼포먼스 작가의 몸으로 역전시키는 작업을 계속해 나갔다. 그리하여 마침내 여성을 성적으로 대상화하는 남성적 지배구조의 안정성을 위협하는, 자신만의 예술세계를 정립해 낼 수 있었다. 

한편 정강자는 <투명풍선과 누드> 사건 이후, 순식간에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여성 중 한 명이 되었다. 그즈음 한국의 미술계는 구태의연해진 앵포르멜 추상미술을 대체할 새로운 전위를 갈망하고 있었다. 정강자와 동료 작가들이 <투명풍선과 누드>를 기획한 목적은 바로 해프닝을 통해 순수예술과 대중문화를 결합하는 것, 나아가 ‘해프닝이 무의미한 쇼가 아님을 대중에게 인식시키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그들은 대중문화의 공간에서 해프닝을 발표했을 뿐 아니라, “화가나 전문가들은 자신의 선입관에서 사고하는 버릇이 있다”라며 당일 공연에 미술계 인사들을 초대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세간의 관심이 오로지 ‘여성 작가가 옷을 벗었다’는 사실에 집중되자, 정강자는 자신의 탈의는 일상의 몸을 예술작품의 매체로 사용하기 위해서였다며 애초의 의도를 직접 설명했다. 그러면서 “원래는 완전 누드의 상태를 희망했으나 주최 측이 말려서 그만두었는데, 기회가 된다면 국립극장에서 야광도료를 온몸에 바르고 나설 수도 있다”, 또 “더 벗을만한 이유가 있을 때 몽땅 벗는 것은 물론이고, 이런 해프닝 중에 극적으로 죽는 경우가 있다면 그렇게 할 수 있다”라고 발언하며 자신을 성적으로 대상화하려는 시도에 작가로서 당당하게 대응했다. 

그러나 이처럼 본인 작업의 취지를 명확히 인식하고 대중에게 알리는 일에 주저함이 없던 정강자의 창작 활동은, 1970년 이후 완전히 중단되었다. 그는 1981년 회화로 다시 전시회를 개최하기 전까지 오랜 기간 한국 화단을 떠나 있었으며, 2000년대가 되어서야 다시 퍼포먼스 작품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그런데도 1968년 이후 반세기가 흐르는 동안, <투명풍선과 누드>는 한국의 대표적인 해프닝 작품으로서 미술사에서 빠짐없이 거론되었으며 그때마다 반라의 작가 사진은 반복적으로 소환되곤 했다. 나아가 작가에게 부여된 공적 언사 또한 변함이 없었는데, 충격의 화가, 기행(奇行)의 화가, 예술깡패, 문화적 테러리스트 등이 그것으로, 이를 통해 우리는 대중 앞에서 옷을 벗은 정강자의 행위가 당대 미술계와 사회에 불러온 충격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정강자에 관한 기존의 언급들은 정작 <투명풍선과 누드>가 이후 한국 미술계와 사회에 어떤 파장을 불러 왔는지, 그리고 이 사건의 여성주의적인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정강자는 <투명풍선과 누드>에서 성적으로 대상화된 여성의 역할을 체험하는 가운데 여성 작가로서의 자신의 정체성을 자각했다. 그러나 슈니만과 달리 그는 자신의 몸을 매체로 삼는 퍼포먼스를 이후에도 계속하지 못했다. 사실 한국 퍼포먼스 아트의 역사를 선도했던 작가의 이런 경력 단절의 이유에 대해 궁금해하는 사람은 지금도 드물다. 정강자는 바틱(Batik) 및 회화 작업으로 회귀한 후 2017년 사망하기 전까지 자신의 내면세계를 다양한 여성상과 자연물, 기하학적 형태로 상징화해 표현하고, 세계 오지를 여행하며 그곳의 풍경과 사람들의 삶을 화폭에 담아냈다. <투명풍선과 누드>에서 남성 시선의 대상이 된 여성을 재연하며 스스로 타자가 되는 경험을 했던 정강자는, 특히 여러 점의 자화상에서 여성 작가로서의 자의식을 강하게 표출했다. 작품 <명동>(1973)에서 상반신을 노출하고 어깨엔 화구를 맨 채 명동 거리를 활보하던 청년 전위작가 정강자는, 결혼과 출산으로 주부, 어머니의 삶을 살면서도 <화실>(1977)에서처럼 결코 붓을 내려놓지 않았다. 수십 년이 지나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작품 <자화상>(1994)에 이르러 작가는 여전히 상반신을 드러낸 모습으로, 화폭을 향해 등을 돌리고 관람자에게 자신이 그리고 있는 그림을 봐달라 호소한다. 그 속엔 작가가 평생 그려 온 소재, 여성의 초상이 있었다. 

그러나 이처럼 쉼 없는 평생의 화업(畫業)에도 불구하고, 작가의 예술세계에 대한 이해는 <투명풍선과 누드> 사진 한 장의 이미지에 여전히 가려져 있다. 사람들은 “얼마든지 더 벗을 수 있다”는 정강자의 말에는 귀 기울이면서도, 그가 작품을 통해 세상에 던진 말은 들으려 하지 않았다. 어쩌면 정강자의 회화는 그 가치를 제대로 평가받을 기회조차 얻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그의 예술은 <투명풍선과 누드> 해프닝 그날 하루의 모습으로, 한국 현대미술사에 동결되어 버리고 만 것이다. 

정강자 예술세계의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계속된 이 현상의 이면에는, 해프닝을 수행한 작가를 ‘벌거벗은 여자’로 바라본 한국 사회의 시각이 자리하고 있었다. <투명풍선과 누드> 발표 당시 정강자는 대담하게 여성으로서의 섹슈얼리티(sexuality)를 드러내는 화법을 사용해 ‘미술가=몸=여성’의 등식을 강조하면서, 작가인 자신의 몸이 실은 여성성을 지니고 있음을 시종일관 밝혔다. 남성 중심의 당시 미술계에서 신예 여성 작가의 이 같은 행동은 매우 도전적인 의미를 지닌 것이었는데, 정강자의 관심사는 처음부터 언제나 ‘나는 여성이다’라는 사실에 있었기에 이는 결코 순간에 그칠 일이 아니었다. 

그는 이미 《청년작가연립전》에서 선보인 첫 작품 <Kiss me>(1967)에서 여인의 반쯤 벌린 입술 형상을 통해 여성의 주체적인 성적 욕망을 드러낸 바 있었다. 정강자는 이후 1971년까지 여체를 연상케 하는 입체 작품을 연달아 제작하며 여성성을 작업의 주제로 삼았는데, <Stop>(1968)에서는 ‘여성을 남성을 위한 부속물로 취급하지 말라’고 주장했으며, 일본 도끼와 갤러리 전시에서 발표한 <여인의 샘>(1969)과 미공개작 <여자란 무엇인가>(1971)에서는 ‘아름답고 강한, 여성의 끈질긴 삶’을 표현하기도 했다. 정강자에게 예술적 전위주의란 곧 여성으로서의 섹슈얼리티를 주장하는 일과 다르지 않은 것이었다. “여성 작가가 ‘여류’라 불리던 시절, 여성이라고 봐주는 것도, 여성이라서 안 되는 것도 모두 차별이라 생각했으며, 성별의 문제에서 벗어나기 위해 오히려 더 내가 여성임을 드러냈다” 1) 는 생전 작가의 회고는 이를 뒷받침해주고 있다. 

이처럼 정강자가 지녔던 여성과 그 몸에 대한 첨예한 문제의식은 입체와 해프닝, 그리고 작가 자신이 주간지 화보의 모델이 되었던 ‘보디페인팅(Body Painting)’ 작업에 이르기까지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발현되었다. 1968년 11월 정강자는 『선데이 서울』 원색 화보에서 정찬승이 작업한 보디페인팅의 매체가 되어, 당대의 누드 열풍에 패션계가 반응한 사례였던 ‘누드․루크(Nude-Look)’ 의상을 입고 패션모델이 되었다. 이 무렵 대중오락 잡지인 주간지의 지면은 한국 사회의 대중적 관심사가 유통되는 공론의 장으로 기능하고 있었다. 정강자의 해프닝은 이처럼 가히 ‘주간지의 시대’로 불릴 만한 언론환경에서 등장해, 주간지 기자들의 주요 취재 대상이 되면서 대중문화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다. 사실 이 시기 몸과 섹슈얼리티, 쾌락과 인간해방의 문제는 한국 대중문화의 주요 화두였다. 그런데 동시대 서구 대항문화에서의 섹슈얼리티가 노동의 소외와 쾌락의 상업화에 반대하기 위해 추구되었다면, 권위적 정권 치하의 한국 대중문화에서 그것은 오히려 현실도피를 위한 수단으로 작용했다. 그 결과 많은 주간지가 앞다퉈 화려한 원색 화보를 게재하기 시작했는데, 사진의 주인공은 대부분 남성의 성적 호기심을 자극하고 만족시킬 수 있는 여성의 몸 이미지였다. 

이 때문에 상업적 목적을 지닌 주간지 원색 화보의 모델이 된 정강자의 몸은, 다른 많은 대상화된 여성의 몸과 구별되지 않을 위험이 컸다. 그러나 정강자의 몸은 바로 그런 이유로 여성주의적인 비평의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남성들의 시각적 쾌락에 봉사하는 주간지에 실렸던 여성 작가 정강자의 몸 이미지는 남성의 욕망이 다 포착할 수 없는, 다시 말해 가부장제와 자본주의의 규율이 지배할 수 없는 간극 자체였기 때문이다. 정강자는 이처럼 일찍이 성차(性差)를 지닌 여성의 ‘솔직한 몸(explicit body)’ 2) 이야말로 가부장제 사회에 대한 근본적이고 강력한 정치적 전략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언론의 선정적 보도로 ‘여성 작가 정강자의 주체적인 몸’과 ‘주간지에서 남성 욕망의 타자로 대상화된 여성의 몸’이 동일시되면서, 그의 작업은 곤란을 겪게 되었다. 전위적인 예술인 해프닝이 점차 ‘퇴폐적인 것’과 연관되기 시작한 것이다. 

당시 주간지들은 성적으로 문란한 미혼여성이나 바람피운 유부녀, 매매춘 여성 등을 노골적으로 혐오하고 조롱하는 태도를 보였는데, 이런 태도가 여성 작가로서 벗은 몸을 전시한 정강자에게도 적용되었다. 해프닝의 창조에 정강자와 남성 동료들이 함께 참여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행위의 대가였던 가학적 단죄는 여성 작가에게만 집중된 것이다. 인간의 섹슈얼리티를 계몽과 통제의 대상으로 간주했던 당대의 국가 권력 또한 정강자를 탄압의 대상으로 삼기 시작했다. 평상시 그를 주시하고 있던 정부는 1970년 8월 20일 국립공보관에서 개최된 작가의 첫 개인전 《무체전(無体展)》을 사흘째인 22일 취소시켰고, 그 결과 24일까지 예정되었던 전시와 각종 부대행사는 계획대로 진행되지 못했다. 3)  나아가 1970년 8월 28일 《무체전(그림 없는 그림전)》이 무산된 지 일주일이 채 되기도 전에, 경찰은 시내에서 하루 6백여 명의 장발족을 적발했다. 그날 이후 『週刊시민』에 실린 「장발족 검거 선풍을 몰고 온 여인: 막 내린 전위 ‘무체전’의 정강자」는, <투명풍선과 누드>로부터 출발한 정강자의 해프닝이 장발족 단속이라는 사회적 사건을 촉발한 기폭제였음을 확인해 주는 기사였다. 그간 ‘여류화가’로 불리면서도 실제로는 무성(無性)이길 강요받았던 작가 정강자는, 이처럼 성적 소비의 대상으로 격하되고 정부 기관의 탄압을 받고 나서야, 비로소 여성성을 인정받을 수 있었다. 

정강자가 <투명풍선과 누드>를 발표할 무렵 주변의 지인들에게 들었던 “위험하니 그만두라”는 충고는, 이렇듯 몇 년 후 현실이 되었다. 그에게 퇴폐문화의 주동자로 몰려 사회에서 추방되는 일처럼 위험한 결과는 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오히려 정강자야말로, 당대 사회에서 매우 위험한 존재였다. 남성적 재현 구조 내에서 여성의 섹슈얼리티는 ‘말할 수 없는 것’, 혹은 ‘재현 불가능한 것’으로 여겨져 왔다. 또 여성들조차 자신의 것이 아닌 욕망을 재현하도록 요구하는 남성들의 법 아래에서, 본인의 욕망을 ‘타자와 같은 것’으로 여겨왔다. 그러나 정강자는 작가 주체로서 자신의 몸을 스스로 대상화함으로써, 여성을 성적으로 대상화하는 과정으로부터 비켜날 뿐 아니라 남성적 지배구조의 안정성까지 위협하는 존재가 되었다. 이 경우 그가 체제를 전복할 위험성은 남성 전위작가들보다 훨씬 커지는데, 남성들은 체제 내의 법을 위반하는데 그치는 반면 정강자는 가부장 체제 자체에 저항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현모양처의 정결한 몸도, 성(性)산업 종사자의 불결한 몸도 아니면서 그들 사이의 경계를 교란하는 정강자의 ‘위험한’ 몸은, 당대 한국 사회에서 반드시 사라져야만 했던 것이다.

작가 정강자의 옷을 벗는 행위에 성적 의미를 부여하고, 그것에 다시 본능적이고 충동적이라는 틀을 덧씌우게 될 때, 해프닝 <투명풍선과 누드>는 예술이 아닌 순간의 열정을 참지 못한 광란의 행위가 된다. 그래서일까, 정강자는 작품이 발표된 그해 이미 언론에 의해 광녀(狂女)의 칭호를 부여받았다. 1968년 12월, 『주간경향』이 “만인의 주시 가운데 옷을 벗고 풍선을 터뜨려 그야말로 볼만한 쇼”를 제공한 공로로 ‘주간경향 10대 부문 대상’ 중 ‘발광상(發狂賞)’을 그에게 수여한 것이다. 그러나 예나 지금이나 통념을 뛰어넘으며 체제에 맞서는 여성들은 모두 광녀이다. 그리고 정강자의 시대에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 광녀들은 비록 쫓겨날지언정 절대 사라지지 않았다. 위험함은 저항하는 광녀들의 힘이며 무기이기에, 정강자의 ‘위험한’ 몸과 그를 통한 성(性)정치는 현재의 그들에게도 여전히 의미를 지닌다. 여성주의 미술로서의 <투명풍선과 누드>의 의의는, 이처럼 수많은 다른 위험한 몸들의 탄생의 과정 속에서 발견되고 있다. 


조수진(1969∼), 이화여대 대학원 미술사학과 박사, 이화여대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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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정강자와의 인터뷰, 2017년 4월 7일, 작가의 화실.
2) Rebecca Schneider, The Explicit Body in Performance, London and New York: Routledge, 1997, p. 2.
3) 22일 아침에 미스 鄭은 그날로 작품을 철거하라는 통고를 받았다. 전하는 말인즉 고위층으로부터 명령을 전달할 뿐이라는 것. 너무나 억울한 생각에 한국의 문화정책을 고발한다는 뜻의 포스터를 써 붙였다. 오늘부터 《무체전》을 안 한다는 공보관 측 선고 포스터와 나란히...” 「장발족 검거 선풍을 몰고 온 여인: 막 내린 전위 ‘무체전’의 정강자」, 『週刊시민』, 1970. 9. 1., p. 3.





정강자, 강국진, 정찬승, <투명풍선과 누드>, 1968. 5. 30., 세시봉 음악 감상실



정강자, <명동>, 1973, 캔버스에 유채, 162.2×130.3cm



정강자, <화실>, 1977, 캔버스에 유채, 162.2×130.3cm



정강자, <자화상>, 1994, 종이에 아크릴릭, 청바지, 사진, 162.2×130.3cm, 국립현대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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