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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도윤희 / 본능과 헌신으로 회화에 뛰어들다 | 곽세원

현대미술포럼





도윤희 / 본능과 헌신으로 회화에 뛰어들다


“숨쉬기에요. 사는 방식인 거죠” 1) 평창동 작업실에서 도윤희(1961∼) 작가는 두어 시간동안 나눈 대화 끝에 이 말을 내뱉었다. 그리고 작업할 때 가장 우울하지 않고 그래서 그만둘 수 없다는 이야기도 했다. 결국 도윤희의 회화는 ‘도윤희’라는 인간의 정체를 이루는 원인이며 모든 것은 거기서 시작했다. 그래서 그는 “아무리 이야기해도 더 하고 싶고, 그것을 얘기할 때 가장 유창”하다. 

두 번째 시선 
도윤희가 서울과 베를린을 오가며 작업하기 시작한 지 햇수로 8년이 되었다. 코로나19로 해외에 나가지 못하는 상황이어서 요즘 그는 서울에 머물며 작업을 이어가고 있지만, 무덥고 습한 서울의 여름은 유화작업을 하는 그에게 그다지 좋은 환경은 아니다. 더군다나 밤 10시가 되어도 여전히 해가 떠있는 베를린의 여름은 그가 마음 놓고 작업할 수 있는 최상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 젊었을 때부터 자신에게 영감을 주는 장소가 필요할 때면 언제든 여행을 다녔다는 그는 40대 중반이 되자 서울 외에 또 한 곳의 거점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뉴욕, 파리, 베를린 등 여러 도시에 머물러봤지만 서울로 돌아와 유일하게 떠오른 곳은 베를린이었고, “좋아하기도 힘들고, 싫어하기도 힘든” 베를린을 일곱 번째 찾은 날, 그는 덜컥 작업실을 계약한다. 그의 표현을 빌자면, 베를린은 그가 무언가를 발견하도록 도와주기보다 “무엇을 알고 있는가를 가르쳐”주었다. 형형색색, 다시 그의 화면에 색채가 등장한 <Night Blossom> 연작을 시작한 때가 2013년, 그가 베를린에 스튜디오를 마련한 시기와 맞물린다. 베를린이 그의 내면에 잠자고 있던 ‘색’에 대한 충동을 일깨우는 데 일조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갤러리 현대에서 가진 개인전 ≪Night Blossom≫(2015)에서 신작을 선보였을 당시 많은 언론에선 도윤희가 그 동안 사용해 온 ‘연필’을 버리고 ‘손’으로만 그림을 그렸다는 변화에 유독 주목했다. 그때마다 그는 무엇을 ‘도구’로 사용하느냐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고 강조하였다. “겉으로 봤을 땐 작품이 많이 변한 거 같은데, 내가 하는 얘긴 늘 똑같아요. 다른 이야기를 할 수도 없고요” 실제로 그는 연필과 유화물감을 사용한 1990년대 작업부터 연필과 바니시를 혼용하기 시작한 2000∼2010년의 작업, 손만을 사용해 화려한 색감을 입힌 2010년 이후의 작업, 그리고 그가 요즘 한창 진행 중인 작업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이 그는 존재하지만 잘 보이지 않는 것, 눈에 띄지 않고 숨겨져 있는 것, 낯선 삶의 파편들, 구석, 가려진 뒷면 같은 것, 어떤 힘(power)에 의해 움츠려 있는 것에 천착해왔다. 육안에 보이는 첫 번째 시선 너머에 존재하는, 오래 존속되어야만 보이는 것들 말이다. 그의 회화는 두 번째 시선 2) 을 찾아가는 여정을 담은 기록이다.

숙성된 시간과 영원(永遠)
1990년대 초 도윤희는 줄곧 끌린 “오래된 가구에서 나는 냄새, 고목의 색조, 오래된 책의 종이 냄새, 자기 항아리의 깨진 부분에서 나오는 해묵은 색깔, 안쪽의 오돌토돌한 자국” 같이 시간의 체취가 묻어나는 사물들에서 받은 느낌을 특유의 대담하고 즉흥적인 표현기법으로 추상화 작업을 했다. 그러다 1990년대 중반 무렵부터 그는 ‘화석’과 ‘단세포’ 같은 구체적인 대상들을 담기 시작하는데, 당시 선보인 작품 제목에는 <존재>, <존재-부유>, <존재-숲>, <존재-늪> 등 일관되게 ‘존재(Being)’란 단어가 들어갔다. 여기서 존재는 인간뿐 아니라 결국 자연과 공생하는 만물로, 그의 그림에선 그것이 본 삶에서의 생(生)은 다하였지만 돌에 각인되어 영생(永生)을 누리는 ‘화석’과 모든 생물체의 기본 단위인 세포 중에서도 지구상에 나타난 최초의 생물인 ‘단세포’로 표현된다. 타원 또는 동그라미 형태의 개체가 모여 거대한 응집 덩어리로 형상화된 이미지는 이파리나 부평초 같기도, 때로는 실제 세포처럼 보인다. 그러나 묘사된 형상은 어떤 대상을 닮은 것 ‘같을’ 뿐, 명확하게 그 정체를 파악하기 어렵다. 직관적으로 떠오른 이미지를 표현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매우 정교하고 다층적으로 음영 처리된 배경이 그 이유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미지와 배경의 경계를 간결하게 끝내지 않고 일부를 흩트려 놓아 이 둘의 관계를 더욱더 긴밀하게 연결하였다. 특히 그만의 여울진 물방울의 표현, 물속에 침잠된 채 부유하는 것 같은 적요(寂寥)와 긴장감이 느껴지는 알싸한 색감 처리는 보는 이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나아가 관람자는 태고의 생명체에 대한 신비와 여운을 느끼고, 어느새 언제, 어디에서 흘러와, 지금 여기에 와 있는가, 그리고 또 어디로 흘러갈 것인가 하는 질문의 주체를 자신에게 두게 된다. 모든 존재의 유한하고 자연의 일부라는 사실을 인식하면서 사유는 보다 근원적인 생명에 대한 고찰로 확장된다.

시(詩)적 감수성
2000년대 초반이 되면 도윤희는 점차 자신에게 내제된 문학성을 적극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한다. 이는 그의 작품 제목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천국과 지상의 두 개의 침묵은 이어져 있었다>(2004), <이곳에서는 온몸의 분자가 가장 순수하고 황홀하게 들썩거렸다>(2004), <보인다기 보다는 들리는>(2007), <액체가 된 고민>(2008), <어떤 시간은 햇빛 때문에 캄캄해진다>(2009), <살아있는 얼음>(2009∼2010), <읽을 수 없는 문장>(2010∼2011). 이 구절들은 그가 거의 매일 일기를 쓰는 수첩에 적혀 있는 문구다. 수첩 속 구절들이 그에게 영감을 주고 그것이 곧 작업으로 이어진다. 이는 그가 연필을 작업의 주 재료로 사용한 이유와도 연결되는데, 언어로 표현하기 힘든 심상, 느낌 등을 나타낼 때 그는 마치 글을 쓰듯 연필로 이미지를 표현했다. 즉 그에게는 글쓰기가 곧 그리기이고, 그리기가 곧 글쓰기인 것이다. 대표적인 작품이 <액체가 된 고민>(2008)이다. 세로 141cm, 가로 732cm로 전시장 벽 한 면을 가득 채울 만큼 긴 이 작품을 그는 작업실에 오면 가장 먼저 그 앞으로 가서 명상하듯 점을 찍었다고 한다. 그렇게 3년에 걸쳐 이 그림을 완성했다. 언어로 발화되지 못한 그의 사유가 하루하루 모여 액화된 감정으로 화면을 이루었다. 

그는 이러한 문학적인 감수성, 그의 표현에 따르면 “시감(詩感)”은 누구나 갖고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인간의 삶 안에는 시적인 수단을 통해서만 묘사될 수 있는 것이 있었다. 3) 결국 도윤희의 회화는 그가 현실에 존재하는 어떤 사물, 현상, 색깔, 사건 등에서 발견한 ‘시(詩)’를 끄집어내어 화면에 가져다 놓은 것이라 할 수 있다. 그의 작품에 일관되게 표현되는 이미지를 꼽으면 산, 강, 덩어리, 다트, 엉킨 실, 계속 돌면서 올라가는 것과 같은 형상들이 있다. 이는 그가 언제나 직관적으로 떠올리게 되는 이미지이기도 했다. 그의 말대로 “변하지 않는 건 변하지 않는다” 이 또한 재료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초기작부터 근작에 이르기까지 빼놓지 않고 사용된 ‘바니시(varnish)’가 그러한데, 그는 바니시의 투명한(transparent) 느낌이 이유 없이 좋았다고 한다. 그러한 맹목적인 끌림의 시작은 아주 오래 전인 초등학생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학교 앞 가게에서 팔던 색색깔의 음료수를 담아둔 삼각형 모양의 투명비닐이 햇빛 아래에서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는데, 그는 그 모습에 매료됐다고 고백했다. 이것이 그가 바니시를 평생 버리지 못 할 것 같은 이유이기도 하다. 연필 드로잉과 바니시를 덧바르는 과정들을 숱하게 반복하며 끊임없이 세상에 숨어있는 존재들을 가시화해서 보여준 그의 회화에서 바니시의 투명한 속성은 일종의 ‘유리창’ 역할을 한다. 

다시, 색
2011년 갤러리현대에서 가진 개인전 ≪Unknown Signal≫에서 도윤희는 사진과 컴퓨터, 조명작업이 결합된 대형 설치작업을 동명(同名)으로 선보이며 새로운 시도를 보여준다. 앙코르왓트 여행에서의 강렬했던 기억을 담기 위해 그는 찍어 온 사진들의 픽셀을 깨고 강물의 이미지와 색을 지워내는 과정을 여러 번 반복해 9장의 강물 이미지를 만들고 특수 제작한 한지에 출력했다. 이 작업은 주로 정적이었던 기존 작업과 비교하면 상당한 변화를 보여준 사례라 할 수 있는데, 하지만 그에게 이 같은 변화는 계획적이라기보다 저절로 찾아온 것이었다. 

그는 2015년의 개인전 ≪Night Blossom≫에서 또 한 번의 변화를 시도한다. 한동안 연필과 바니시 위주로 절제된 색만을 사용해 온 그가 이 전시에서는 색‘만’을 전면에 내세웠다. 드로잉을 하고 바니시를 덧바르고, 또 다시 드로잉을 하고 바니시를 덧바르는 숱한 반복 과정들이 하나로 단축됐다. 그 단계로 오기까지 그는 자신 안에 있던 문학성을 어떻게 해야 할지 오랫동안 고민했다고 한다. 왜냐하면 그에게 색은 매우 순간적이고 감각적으로 써야 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논리적인 과정을 거쳐야 하는 글과의 충돌은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결국 그는 “눈물을 머금고” 문학성을 버리기로 한다. 그리고 좀 더 그림 안으로 들어가 자신 안에 잠자고 있던 색에 대한 충동을 마음껏 표출하기 시작했다. 이는 검은 색을 벗어날 수 없는 연필로 작업하면서 자신도 모르게 절제해 온 감정들이 색에 의해 폭발한 셈이다. 

그는 색을 “정체가 없는 것”으로 정의한다. 모든 색은 색이 놓인 환경과 상황, 관계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이다. “어떤 게 노란색이고, 어떤 게 빨간색일까요? 회색 옆의 노란색과 붉은색 옆의 노란색은 같은 색이 아니에요. 결국 색은 상관관계에 따라 감정에 따라 정체성을 드러내죠. 비 오는 날의 강물 색깔, 먼지에 햇빛 비친 색깔, 햇빛 쨍쨍한 날에 나갔을 때의 피부색이 좀 더 정확하게 색을 말한 것일 수 있어요” 여전히 그는 색에 몰두하고 있다. 변화한 점이라면 질감이 좀 더 중요해졌다. 그에 표현에 따르면 “물감으로 조각을 하고” 있다. 여태껏 보아 온 그의 회화 중 가장 두께감이 느껴질 만큼 물감 층이 두터웠다. 레이어를 수없이 쌓아가는 방식은 여전하다. 느낌을 표현하는 데 필요하다면 나무 막대기, 주사기, 숟가락 등의 도구도 다양하게 사용한다. 헌신해야 비로소 보인다는 평면의 세계에서 오늘도 그는 탐독 중이다.

곽세원(1987∼), 이화여대 대학원 미술사학과 석사, 월간미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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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본 글에서 “ ”로 인용된 부분은 2020년 7월 1일에 이뤄진 도윤희 작가와의 인터뷰에서 발췌한 것임을 밝힌다.
2)  ≪Night Blossom≫ 전시 도록에 실린 인터뷰 글
3)  위와 같음



도윤희, <식물성잔해>, 2003∼2004, 캔버스에 유채와 연필, 바니시, 141×488cm(141×244cm 2pieces) 



도윤희 <백색 어둠>, 2008, 캔버스에 유채와 연필, 212×141cm  



도윤희 <읽을 수 없는 문장>, 2010∼2011, 캔버스에 유채와 연필, 바니시, 284×404cm(삼면화) 



도윤희 <Untitled>, 2014, 캔버스에 유채, 200×150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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