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


컬럼


  • 트위터
  • 인스타그램1604
  • 유튜브20240110

연재컬럼

인쇄 스크랩 URL 트위터 페이스북 목록

(13)영원한 페미니스트 윤석남 | 김현주

현대미술포럼







영원한 페미니스트 윤석남


윤석남(1939~)은 한국의 여성주의 미술을 개척하고 여성문화운동을 주도해 온 대표적인 작가이다. 여성주의 관점에서 성 평등과 사회문제들을 작품에 투영하며 여성주의 미술의 발전과 확산에 기여해 왔다. 1997년에 ‘여성문화예술기획’의 이사장으로 추대되어 10년 동안 서울국제여성영화제와 여성미술제의 기획과 운영을 주도하고, 페미니스트 잡지 『이프(if)』지의 발행인과 편집장을 맡는 등 여성문화 운동의 최전선에서 활동해 왔다. 2016년에는 영국 테이트미술관에 <금지구역 I>(1995)이 소장되었고, 2019년에는 예술을 통한 성평등 사회 실현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여성가족부가 주최한 제24회 양성평등주간 기념식에서 국민훈장 모란장을 수훈했다. 여전히 페미니즘 의식에 기반 해 새로운 작품 창작에 도전하고 있는 그는 페미니스트로 영원히 기억되기 원하는 예술가이다.    

1939년 만주 봉천(현재 선양시)에서 윤백남(尹白南, 1888~1954)과 원정숙(元貞淑, 1915~2009)의 여섯 자녀 중 둘째로 태어난 윤석남은 해방 직전 가족과 함께 외가가 있던 서울로 돌아와 정착했다. 그의 아버지 윤백남은 근대기 소설가이자 영화연출, 연극, 방송 등 대중문화예술 분야의 개척자로서 서라벌예술학교(중앙대학교 예술대학에 합병) 초대학장을 역임한 예술가다. 그의 집에는 늘 당대 많은 문화계 인사들이 드나들었고, 어머니 또한 독서광이었다고 한다. 윤석남이 남달리 문학과 영화에 조예가 깊고, 어린 시절 꿈이 소설가나 화가였던 점은 그런 부모의 영향일 것이다. 그가 고등학교 1학년 때 아버지가 지병으로 사망하고 어머니가 공장일과 밭일, 행상 등을 하며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게 되자 그는 미술대학 진학의 꿈을 포기하고, 결혼 전까지 직장을 다니며 네 동생의 학비를 보태고, 1967년 결혼 후에는 가정주부로서 평범한 삶을 살았다. 그러다 1979년 봄, 한국 나이 마흔에 그렇게 살다가는 미쳐버릴 것 같은 지경에 이르자 미술가가 되기로 결심했고, 그의 뒤늦은 도전은 단순한 생존의 차원을 넘어 사회적 존재로서 자신을 찾아가는 긴 항해의 시작이었다. 윤석남의 작품은 실존하는 한 인간으로서, 여성의 몸을 가지고 구체적인 경험을 하면서 살아가는 아내이자 어머니로서, 그리고 창작 활동을 통해 자유로움을 얻어가는 예술가로서 자신이 누구인지를 인식하고 왜 사는지, 그리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 규명해 가는 과정이라 하겠다.

윤석남은 국내의 정규 미술교육 과정을 거치지 않았기에 오히려 남성 중심적인 미술개념이나 관습에 얽매이지 않고 학연과 지연으로 얽힌 미술계의 복잡한 권력구조에 연연할 필요 없이 스스로 원하는 작품을 자유롭게 창작할 수 있었다. 그 대신 두 차례의 뉴욕 장기 체류경험은 그의 예술관의 형성과 매체 발전에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1983~4년 뉴욕 맨하탄에 위치한 아트 스튜던츠 리그(The Art Students League)와 프랫 인스티튜트 그래픽센터(Graphic Center, Pratt Institute)에서 회화와 드로잉, 판화 수업을 두 학기 이수하는 동안 그는 표현력을 향상하고 작품의 완성의 순간에 대한 직관적 판단력을 터득했다. 1990~1991년 두 번째의 뉴욕 체류 동안에는 미술현장에서 목격한 설치에 매료되었는데, 1990년대 윤석남의 나무 조각과 설치 작품은 1991년 브롱스미술관의 쿠바현대미술전에 출품된 알레한드로 아귈레라(Alejandro Aguilera, 1964~)의 나무 설치 작품에서 영감을 받아 발전된 것이다. 그는 케테 콜비츠의 작품에서 자기만족이나 개인적 유희를 넘어선 예술의 공적 역할에 대한 신념을 깨우치고, 루이즈 부르주와에게서 작가적 모델을 발견했다. 부르주와의 영향은 1994년 책상다리와 의자 위에 박힌 작고 뾰족한 무쇠 못의 형태로 처음 나타났다. 작은 못은 <핑크룸> 연작에서 점점 더 크고 위협적인 무쇠 갈고리의 형태로 변형되며 현실세계를 비틀고 심리적 불안과 공포를 자아내는 핵심적인 요소로 자리 잡았다.

1982년 미술회관(현재 아르코미술관)에서 개최된 윤석남의 첫 번째 개인전은 정문규, 황용엽 등 당시 민중미술과는 다른 결의 사실주의 미술을 추구하던 작가들과의 인연으로 이어지며 미술계 진입의 발판이 되었다. 1985년 김인순, 김진숙과 결성한 ‘시월모임’의 2회전인 <반에서 하나로>(1986)가 여성주의 미술을 표방한 최초의 전시로 주목을 받았고, 이 전시를 계기로 윤석남은 대안적인 여성문화를 추구하던 ‘또 하나의 문화’ 동인들과 인연이 닿아 본격적으로 여성주의 미술에 대한 관심을 심화, 발전시켜 갔다. 1993년 두 번째 개인전 《어머니의 눈》에서 윤석남은 거대 담론으로서 모성이나 자기희생이란 이상화된 모성 개념을 거부하고 자전적인 경험에 근거해 재해석한 실천적 모성 개념을 제시했다. 한편으로는 모성적 사랑과 보살핌의 힘에 대한 존경을, 다른 한편으로는 모성의 실천에 수반되는 지루한 노동과 고통을 형상화했다. 나무에 그려진 어머니의 형상들은 관객의 시선을 되받아치며 한 낫 구경거리로 재생산되어 온 여성상을 거부했다. 페미니스트 작가로서 정체성과 주제의식, 그것을 표출할 독창적 형식이 성공적으로 결합된 《어머니의 눈》 전을 통해 윤석남은 한국 현대미술을 주도하는 작가의 대열에 합류하게 되었다. 1996년에는 여성미술가로는 최초로 ‘이중섭미술상’을 수상하고, 제 2회 《아시아 퍼시픽 트리엔날레》에 초대받는 등 국제적인 작가로 도약했다. 

윤석남의 작품을 관통하는 주제는 여성이다. 그의 작품은 여성의 생각과 행동, 감정과 상상력을 규제해 온 유교적 가부장제와 획일화된 남성중심적 근대화의 기획과 자본주의에 파열음을 만들고 틈새를 드러내며, 봉합된 공식 역사 속에 지워진 타자로서 여성에게 주체성을 부여한다. 작가의 외할머니, 어머니, 작가 자신, 그리고 자매들과 딸까지 가모장 가족의 4대로 이어져 온 평범한 여성이 주인공으로 등장하고, 시장 상인들에서부터 역사 속에 묻힌 예술인들이나 설화의 주인공, 최근에는 여성문화를 함께 일궈온 문화계의 벗들까지 과거와 현재의 일상의 삶과 고급문화를 일궈온 여성 주체들이 차례차례 전면으로 불려나온다. 그러므로 그의 작품에는 박제된 삶을 깨고 나온 여성 주체들의 몸말로 가득하고, 그들은 초월적인 눈이 아니라 살아있는 눈으로 우리에게 말 걸기를 한다. 나무 인물상에서 느껴지는 섬직한 광기는 바로 날카롭고 무섭게 그린 눈에서 나온다. 자신의 눈으로 보고 겪은 삶을 말하는 어머니들, 의자 또는 소파와 한 몸이 된 우울과 광기에 찬 작가, 여성 의식을 널리 파종하는 꼭두를 닮은 <999-빛의 파종>의 작은 여자들, 늘어난 팔로 시공의 한계를 뛰어넘는 <늘어나다, 연>의 여성 예술가, <어시장 I, II>의 물고기와 함께 바다를 자유롭게 유영하는 여자, 개와 한 몸이 된 <1025: 사람과 사람없이>의 할머니 등, 그 여성들은 우울과 불안과 광기로부터, 그리고 시간과 공간으로부터 점차 자유로워진다. 

윤석남의 작품에는 모더니즘 문화를 작동시킨 남성 중심적 사고와 발전의 논리에 의해 주변으로 밀려난 범주와 가치들이 줄줄이 엮여 나온다. 여성, 자연, 과거의 시간, 낡은 것, 장식성, 수공성, 채색이 중심의 자리를 회복한다. 그것들은 남성, 문화, 근대적 시간, 새 것, 순수성, 정신성, 수묵과 이항대립을 이루며 오랫동안 열등한 것으로 여겨져 온 것들이다. 그는 근대화 과정에서 억압되어온 여성과 부수적인 존재들, 쓸모없는 사물들, 또는 미학적으로 폄훼되어 온 것들을 전면에 드러냄으로써 기존의 문화적 가치들을 전복해 왔다. 삶과 분리된 예술을 위한 예술이나 순수미학을 거부하는 것은 당연하고, 예술을 매개로 세상을 다르게 보고 변화시키기를 원한다. 그런 점에서 윤석남은 태생적으로 사실주의자이고 반/탈모더니스트이며, 예술이 정치적 장이라 믿는다. 그녀가 1980년대 후반 민중미술과 손을 잡았던 것은 그들의 취지와 기존 질서에 대한 저항적 태도에 동의했기 때문인데 그들의 태도와 방법론은 점차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따라서 민중미술의 직설적으로 발언하는 사실주의를 거부하고 또 다른 차원의 사실주의 미학을 개척하고자 했다. 그가 추구한 사실주의는 한편으로 민중미술의 외연을 넓히고, 다른 한편으로 페미니즘 미학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 준다. 

윤석남의 예술적 성취는 국내외 미술현장의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다양한 미술장르와 매체의 섭렵을 통해 이뤄졌다. 1979년 유화로 미술계에 뛰어든 그는 1988년 유화를 그만두고 아크릴릭으로 평면작업을 하다 1992년부터 나무 작업을 시작했고 2016년에는 채색화 작업에 도전한다. 나무 작업은 거칠고 투박한 나무 표면 위에 아크릴릭 물감과 동양화 붓으로 인물이나 대상을 그려 넣고, 여러 개의 나무판들의 조합과 덧대기 및 그리진 형상과 레디메이드가 결합된 것이다. 나무에 그려진 형상들은 수묵화의 먹선처럼 간결하면서도 추상적이며 유려하다. 나무작업은 회화적이고 전면성이 강하면서도 재료의 물성과 연극성이 두드러지는 복합적인 특성을 지니며, 다른 한편으로 장승이나 단청의 전통과도 맥이 닿는다. 단독조각으로 시작한 나무작업은 1993년부터 인물과 함께 각종 레디메이드, 사진이미지, 또는 텍스트가 있는 인쇄물이 결합되며 점차 대형설치작업으로 발전되었다. 2010년부터는 종이오리기 작업이 새롭게 도입되고 거울을 추가해 설치작업의 시공간이 개념적으로 시각적으로 더욱 더 확장되었다. 2016년부터는 동양화 전통의 하나인 채색화 기법에 도전해 동, 서양화의 특정 장르 구분을 넘어서는 회화 제작에 몰두하고 있다. 동양화라는 고정관념이나 방법론적 틀에 매이지 않고 한지에 먹과 채색화 물감이란 전통적 재료를 자유자재로 활용한 채색화는 자화상에서 시작해 점차 새로운 주제 영역의 개발로 이어지고 있다. 

윤석남은 소외되어 온 존재들과 공생할 수 있는 삶과 보다 인간답게 사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물음을 스스로에게 던지며 한 인간으로서, 여성으로서, 예술가로서 그 답을 찾고자 한다. 그의 작품은 근대적 인본주의와 자본주의에 의해 왜곡되어 온 인간의 수평적 관계와  인간과 인간이 아닌 것과의 공존의 방법을 모색하고 다종다양한 자연의 세계를 존중하며 모든 생명체를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배우고 실천에 옮길 수 있도록 감성의 통로를 열어놓는다. 이것이 바로 윤석남이 추구하는 페미니즘 미술의 정수라 할 수 있다. 


김현주(1958~), 이화여대 대학원 미술사학과 박사, 추계예대 교수


ㅡㅡㅡㅡㅡ



윤석남, <금지구역Ⅰ>, 1995, 나무에 아크릴릭, 쇠못, 마네킹, 손, 밧줄, 182×215×200cm, 런던 테이트 갤러리 소장




윤석남, <핑크룸 IV>, 1996-2016, 쇠못 다리의 1인용 소파, 플라스틱 구슬, 종이오리기, 거울, 상하이 스타트뮤지엄 소장




윤석남, <1,025:사람과 사람 없이>, 2008-2009, 나무에 아크릴릭, 가변크기, 작가소장




윤석남, <괜찮아 걱정마 잘 할거야>, 2018, 한지에 채색, 135×38cm, 작가소장





하단 정보

FAMILY SITE

03015 서울 종로구 홍지문1길 4 (홍지동44) 김달진미술연구소 T +82.2.730.6214 F +82.2.730.9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