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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김순기의 예술에 대하여 | 주연화

현대미술포럼






김순기의 예술에 대하여


김순기(1946~)는 1971년 도불하여 지난 50여년 동안 프랑스에서 가르치고, 작업하며 자신의 작품 세계를 구축해 온 작가이다. 1971년 프랑스 정부장학생으로 초청되어 니스의 국제 교류 예술센터 초청 작가로 지내며 1972년 니스국립장식미술학교 회화과를 최고명예등급으로 졸업하고 1974년부터는 마르세유 고등미술학교 교수로 재직하였다. 1977-1979년 사이에는 엑상프로방스 대학에서 기호학 연구로 DEA 학위를 취득했고, 1980-1984년에는 같은 대학에서 석도 회화 작품을 기호학적으로 연구, 1989-1994년 사이에는 니스대학 철학과에서 미학 연구를 한 바 있다. 그는 예술을 시각적 오브제라기 보다는 개념으로 보는 태도에 더 큰 관심을 가졌으며, 특히 비트겐슈타인과 장자의 철학, 이들 개념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사물과 세계 자체의 독립성, 나와 세계의 만남과 그 만남 속에서 발생하는 존재의 의미에 공감하며, 이에 기반한 작업들을 실행한 바 있다. 이와 같은 작업 활동은 마르세이유에서 기획한 《비디오&멀티미디어/김순기와 친구들》(1986)전, 파사주 현대미술센터 개인전(1989), 니스 근현대미술관 개인전(1991), 시드니 현대미술관전(1994), 아를르 국제 사진전(1995) 등을 통해 국제 미술계에 먼저 소개되었다. 그의 핀홀 사진 작업은 이미 오래전 퐁피두 미술관에 소장된 바 있고, 1993년에는 한국 대표로 유네스코 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오브제의 제작보다는 상황을 연출하고 관객이 이 상황을 만나고 경험하는 순간 속에서 작품의 존재 의미를 발견하는 김순기의 작업 세계는 프랑스 이주 초기인 1970년대 초반부터 구체화된다. <조형 상황 – 니스>(1971), <조형상황 II>(1971-1973)는 연을 관객과 함께 날리고, 이를 작가와 관객이 함께 비디오로 촬영한 후 그 영상을 또한 함께 즐기는 작업으로, 관객 참여를 통해 함께 ‘상황’을 만들고 공감하는 작품이었다. 상황의 연출은 <조형상황 III - 보르도의 10월>(1974)에서 극대화 되는데, 작가는 보르도 시의 후원 속에서 한달 동안 보르도 바다의 깊이, 물살, 바람, 습도 등을 체크한 후 닻을 만들어 여기에 대형 풍선들을 연결하여 바다 위에 풍선들이 떠 있는 대형 설치를 제작한 다음 오프닝 당일 닻에 매달린 풍선의 줄을 끊어 수없이 많은 풍선들이 하늘로 날아가게 되는 상황을 연출하였다. 미리 조사된 바람, 습도 등에 기반하여 풍선이 서로 얽힘 없이 날아가도록 계획한 이 작품은 치밀한 계획에 기반하였지만 그 결과는 바람, 습도 등 자연 환경이라는 우연적 요소에 맡기는 작업이었다. 

상황의 연출, 우연적 요소들에 대한 관심, 관객 참여의 중요성은 김순기의 작품 세계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들로, 이에 대한 관심은 1978년 존 케이지(John Cage)와의 만남 속에서 더욱 확장된다. 김순기는 존 케이지와의 첫 만남에서 존 케이지의 작품 <0’0’’0’’’>(1978)을 연주하게 되었고, 이렇게 시작된 존 케이지와의 인연은 지속적으로 이어져 그는 김순기를 백남준에게 소개하게 되고, 이는 김순기가 1982년 <멀티미디어와 백남준>이라는 연구 과제로 프랑스 문화성 연구기금을 받아 뉴욕을 방문하고 다양한 비디오 작가들과 교류를 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주었다. 비디오에 대한 연구의 기회는 자연스럽게 비디오를 사용한 다양한 작품의 제작으로 이어진다. <만 개의 더러운 먹물 자국>(1982), <봉주르 백남준>(1984), <바케레스 호수>(1985), <준비된 피아노>(1985), <Voie-Voix Lactee>(1988), <하늘 땅, 손가락>(1994), <무명>(1995), <이창>(2015), <Mer>(2019)로 이어지는 비디오 작업들은 외부 세계를 그대로 담기도, 행위자의 반복적 행위를 기록하기도 하며, 우리 사회의 평범한 일상의 단편들을 편집해 보여주기도 한다. 이 작품들에서 보여지는 세계와 행위자, 우리의 모습들은 매우 일상적이며, 특별한 의미없이 반복되는 행위 및 장면들이 대부분이다. “난 기록은 하되 지난 모습들을 되살려 보여주는 의미로서의 재현기록이 아닌 살아있고 실재 시간(real time)을 재현하는 새로운 언어가 필요했었다. 그때 바로 빛과 시간으로 그려볼 수 있는 비디오가 나에게 왔던 것이다”라고도 언급한 바 있듯 김순기에게 비디오는 순간과 공간을 기록하는 매체라기 보다는 대상을 만나는, 나를 대신하는 신체이자, 시간을 쪼개거나, 늘리거나, 뒤섞으며 우리 모두가 알고 있고, 또한 속해 있는 의미 체계들 너머의 새로운 가능성을 드러내기 위한 수단이었다. 

김순기는 한국 최초의 여성 비디오 작가로 백남준이 비디오를 새로운 실험을 상징하는 매체이자 오브제로 사용하였다면, 김순기는 비디오가 지닌 비어있음을 무엇이든 담을 수 있는 가능성의 공간으로 활용하였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깊다. 비디오를 비어있는 속성을 지닌 매체로 보는 이와 같은 김순기의 매체관은 <Vide&O>(1989)에서 잘 나타나는데, 프랑스어로 발음하자면 이 작품의 제목은 “비어있는&물”이라는 뜻이다. 이 작품에서 비디오가 지닌 비물질적이고 비어있음의 특성은 얼음으로 만들어진 비디오 모니터가 전시 기간 동안 녹아 사라져 버리는 작품으로 가시화된다. 비어있음의 개념은 상황, 우연성, 관객의 참여만큼이나 김순기의 작업에 있어 매우 중요하다. 무엇으로 가득 차 있음은 이미 그것으로 규정되어 있는 것으로 작가는 작업을 하는 동안 심지어 자신 조차도 지워내고자 노력한다. 장 뤽 낭시에게 보낸 편지에서 작가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작품이란 ‘내가 없음(無我)’의 행위함이라 생각합니다. ‘순수한 경험’으로서 ‘경험하여지는 그 자체로서의 여기-지금의 순간’이기 때문이지요. 그러므로 한 작가의 작품이란 가장 비인간적이면서 다만 나와 환경 상황과의 만남의 장소라 생각합니다. 이 장소는 불분명하나 항상 현재(現在) 합니다 … 과거도 미래도 없으나 ‘무한한 가능 장소’이므로 항상 새로이 다시 시작합니다 ...” 이렇듯 김순기에게 예술함, 혹은 작업함이라는 것은 그 순간의 경험의 기록이자 재현이며, 그렇기에 특정 태도의 삶 그 자체이기도 하다. 예술의 의미가 기존의 틀을 깨고 새로운 의미와 가치를 제시하는 것이라면 각박하게 돌아가는 세상사에서 한발 떨어져 그것을 관조하고 유희하는 것, 그 자체가 김순기에게는 예술이며, 예술가의 역할이다.

비디오를 가장 기본이 되는 매체로 삼지만 김순기는 비디오를 넘어 다양한 매체의 사용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특히 그는 회화, 설치, 드로잉, 서예, 비디오, 퍼포먼스 등, 전통적 매체, 현대적 매체, 동양적 매체, 서양적 매체 등을 경계를 두고 사용하지 않았다. <만 개의 더러운 먹물 자국>(1982)은 국궁(한국 전통 활쏘기)을 하는 작가의 시간과 행위를 기록하고 편집한 작품이자, 영상, 드로잉, 평면 작업, 그리고 그녀의 또다른 작업인 “일획” 시리즈와도 복합적으로 연결되는 김순기 작업의 다양한 층위를 가로지르는 대표작이다. 1972년부터 1982년 사이 약 10여년 이상 동안의 활쏘기 장면을 기록한 이 작품에서 시간, 공간, 풍경, 심지어 작가까지도 끊임없이 변화 한다. 하지만 변하지 않는 한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활을 쏘는 행위이다. 활에서 날아가 과녁에 꽂히는 화살은 여기에서 저기로 건너간다. 영상에서는 화살이 바람을 가로지르는 소리와 함께 과녁에 박히는 소리가 시간의 흐름을 초월하여 지속적으로 반복된다. 과녁을 매번 바꿀 수 없으니, 작가는 뚫려진 구멍을 다시 메꿔서 과녁으로 사용하게 되는데, 이렇게 탄생된 것이 바로 과녁 페인팅이다. 김순기는 활쏘기를 자신을 다스리는 수단으로 삼아 수십년을 익혀왔고, 그와 같은 반복된 삶의 일상에서 <만 개의 더러운 먹물 자국>(1982)이라는 작품이 탄생한다. 화살에 의해 뚫리고, 작가에 의해 메꿔지는 반복적 행위의 결과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과녁 페인팅은 수년간 반복되는 동일한 행위의 ‘기록지’이자 무념무상, 즉 나를 버리기 위한 정신적 육체적 행위의 반복적 점찍기 결과라는 의미를 지닌다.

<조형상황>이나 <만 개의 더러운 먹물 자국>에서 엿볼 수 있듯 김순기에게 작업은 삶의 일부에서 시작되며, 유희와 관조의 특성을 지닌다. 이와 같은 유희와 관조는 언어 놀이, 즉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의 경계를 가로지르거나 교란하고, 쪼개고 붙이는 작업으로도 이어진다. 특정 색을 지칭해야 하는 언어적 기표를 그것이 지칭해야 하는 색과는 다른 색으로 씀으로써 인식의 교란을 일으키는 <색놀이>(1977), <이것은 빨간색 술 이다>(1979)와 같은 작품들은 그가 엑상프로방스 대학교에서 기호학 연구로 학위를 취득한 시기에 제작된 작품으로, 이미지와 문자 기호의 기표와 기의를 해체하고 교란하는 이 작업은 기호를 해체하는 후기구조주의적 관심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하지만, 언어를 활용한 김순기의 작업은 단순한 해체에 그치지 않고 김순기 특유의 감성을 담은 글쓰기의 세계로 발전된다. 바보서예 시리즈로 불리우는 <편지-컴컴한 동쪽 바다에>(1997), <게으른 서유기>(2002)는 상용되지 않는 의성어의 반복적 사용, 단어를 소리나는 대로 쓰기, 동음이의어에 기반한 글의 전개 등을 통해 기존 글쓰기의 틀을 해체한다. 해체에서 나아가 더욱 중요한 것은 김순기 작가가 바라보는 세상사에 대한 시선이 그의 삶의 철학과 어우러져 뿜어내는 해학과 풍자, 그리고 따뜻함이다.

김순기에게 작품이란 고정된 규율을 가지고 있지 않는 파라독스의 풍경이자, 보는 각도에 따라 변하며, 항상 가능하면서도 불가능한, 마치 우리 삶과 같은 것이고, 그렇기에 그 안에서 또한 항상 새로움의 가능성이 존재하는 것이다. 특별할 것 없는 삶의 한 순간도 그 안에 무수한 가능성이 존재한다는 것을 우리 모두는 너무도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그 기존의 인식과 사고 체계를 벗어나 새로운 가치를 추구하는 것은 참으로 어렵다. 사회가 떠받드는 특정 가치와 기준을 떨쳐내고 존재하는 모든 것들과 일대일로 만나고자 하는 끊임없는 노력. 우리 안에 내재되어 있는 세계를 바라보는 기존의 “틀”에서 벗어나,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드러내고자 하는 끊임없는 시도. 이를 김순기는 지난 50여년 동안 스스로 실천해왔고, 이 실천의 과정으로 그는 세상의 주변에서 서성이고, 세상을 마주하고 관찰하고, 그 세상과 함께 노닐어왔다. 그렇기에 2019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김순기의 회고전을 위해 《게으른 구름》이라는 제목을 붙인 것은 김순기라는 작가와 그의 작품 세계를 표현함에 참으로 적절했다고 보여진다. 마지막으로 이 전시에서 신작으로 선보인 <시간과 공간 2019>(2019)에는 과거와 현재를 잇는 무당, 시를 읽는 게으른 로봇 영희, 그리고 그 옆에서 끊임없이 자전거를 굴리는 사람이 등장한다. 게으르고 약간은 어리숙한 로봇 영희는 작가의 자화상이고, 끊임없이 자전거를 굴리는 퍼포머의 모습은 사회가 만들어 놓은 경쟁의 구도 속에서 소진되어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이 아닐까. 그리고 무당의 노래는 우리를 과거에서 현재로, 그리고 미래로 이끈다. 이 모든 것이 하나의 풍경이 되고, 작가는 이 모든 것을 관찰하는 우리를 또 다른 김순기가 되게 한다. 


주연화(1976~), 서울대학교 미술경영 박사, 홍익대학교 문화예술경영대학원 부교수/아라리오갤러리 총괄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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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기, <조형상황 III - 보르도의 10월> 1973, 단채널 비디오, 16mm 필름, 13분 45초


김순기, <만 개의 더러운 먹물자국>, 1982, 단채널 비디오, 3분 31초,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김순기, <시간과 공간 2019>, 2019, 국립현대미술관 퍼포먼스 및 설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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