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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송현숙의 브러쉬 스트로크-고향과 타향을 오가는 몸짓의 흔적 | 김혜신

현대미술포럼




송현숙의 브러쉬 스트로크-고향과 타향을 오가는 몸짓의 흔적




여기 외국인 관청서에서 93번 번호를 뽑고
차례를 기다리며 네게 편지를 쓴다.
그리고 여기 분위기를 담은 그림일기를 그린다.
숫자에 숫자가 이어지고
나는 기다리고 또 기다린다.
늘 한쪽만 가리키는 화살표가 보인다.
시간적 간격을 두고 나타나면서 공간적인 소리를
산출하는 그 선의 움직임을 스케치해 본다.
그 선은 허공을 작동시키면서 
주변을 나가는 것과 들어오는 것으로 분할한다.
사랑하는 동생에게’(발췌) 송현숙 

『독일이주여성의 삶, 그 현대사의 기록』, 재독한국여성모음 지음, 당대, 2014


1970년대 초부터 독일에 살면서 활동하는 작가 송현숙은 1952년 전라남도 담양군 무월리에서 태어났다. 담양은 대나무의 명산지로 그가 태어난 무월리도 대나무 숲에 둘러싸인 마을이었다. 부모님은 자식의 교육에 열심이셨고 그는 광주의 미션계 학교인 수피아여고를 졸업했다. 당시 한국과 독일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분단된 국가로 전후 부흥을 위해 경제협력이 활발했다. 그 중 하나가 남자는 탄광노동자로 여자는 간호사로 독일에서 일하는 파견노동계약의 체결이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송현숙은 담양과 광주가 아닌 세상도 보고 일도 하고 싶다는 마음을 막연히 지니고 있던 차에, 외국에서 일을 하며 돈을 벌 수 있는 파독 간호사일이 꿈과 같이 느껴져 어떻게든 가야지 하고 마음먹었다고 한다. 친구의 아버지가 경영하고 있던 보조간호사양성소를 다니면서 자격증을 취득하고, 반대하는 부모님을 계약기간인 3년을 마치면 반드시 돌아오겠다고 설득해 1972년 독일로 떠난다. 

독일에서의 근무지는 북서부의 도시 브레멘근처의 작은 마을에 있는 병원이었다. 유럽이라면 서양의 대도시만을 상상하고 갔는데, 한국의 지방과 크게 다를 바 없는 작은 시골마을에 실망했다고 한다. 도착한 다음날부터 병원의 정상근무가 시작되어 처음엔 거의 통하지 않는 독일어와 한 번도 먹어본 적이 없는 독일음식만의 생활은 외로움과 어려움으로 가득한 나날이었다. 조금씩 익숙해지면서 3년간 일한 후 일단 계약 기간이 끝나 한국으로 귀국하기 전에 송현숙은 다시 유럽에 오기는 어려울 거라고 생각해 여행을 떠난다. 그동안 독일어와 생활에도 익숙해진 그는 파리와 런던 등 유럽의 여러 곳을 보고 미술관도 돌아보면서 세상과 삶은 일로만 이루어진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고, 간호가 아닌 다른 일을 하면서 유럽에서 좀 더 살아보고 싶다는 마음이 강해졌다. 

여행에서 돌아온 송현숙은 3년 후에는 돌아오겠다고 했던 부모님과의 약속을 어기고 계약기간을 1년 연장해 이번에는 브레멘에 있는 정신병원에서 일을 시작했다. 그 곳에서 환자들을 대상으로 한 회화요법을 보고 그림에 흥미를 느껴, 낯선 땅에서의 생활과 일을 일기처럼 그리면서 병원근무를 계속했다. 그가 그림일기라고 부르는 초기의 드로잉들은 주로 연필이나 색연필로 선을 강조한 그림이다. 자주 그린 주제들은 모내기, 대나무 수확, 여물을 먹는 소, 강가에서 빨래하는 마을의 여인들과 같은 기억 속에 떠오르는 고향 무월리의 일상이었다. 브레멘의 병원근무 1년이 끝난 후 그는 이 그림일기를 모은 포트폴리오로 함부르크 조형예술대학에 입학시험을 치루고 합격한다. 그가 들어간 자유미술학과는 정해진 표현매체나 기법에 의한 교육이 아니라, 명화 복제에서 드로잉, 유화, 판화, 조각, 사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수업을 받으면서 자신에게 맞는 표현방법을 정해가는 커리큘럼이었다. 송현숙은 여기서 드로잉과 회화에 집중해 주로 고향의 추억, 독일에서 받은 문화 충격, 외국인 노동자의 삶 등을 주제로 작품을 그렸다.

<무제>(1983)에는 어린 원숭이로도 아이로도 보이는 존재가 노인으로 보이는 눈 감은 여성의 목을 꽉 껴안고 눈을 크게 뜨고 뒤를 쳐다보고 있다. 거기에는 지붕과 기둥으로 된 집의 형태가 겹친 몸통을 한 인간과도 같은 형상이 머리에 타오르는 불길을 얹고, 두 팔을 번쩍 들고 여성과 아이 쪽으로 달려오고 있다. 이 인물형상과 집의 합체는 같은 해에 그린 <불타는 집>(1983)에도 등장한다. 송현숙은 1982년 11년 만에 고향에 돌아갔다. 그 때 너무나도 오랫만의 귀국을 앞두고 기쁘면서도 고향 무월리의 집은 떠나올 때 그 모습 그대로 남아 있을까 불안한 마음이 가시질 않았으며, 그 때 꿈에 나온 것이 이 불타는 집이었다고 한다. 이 작품은 1986년 함부르크 쿤스트할레의 전시 《이브와 미래-프랑스혁명 이후의 여성상》에 출품되었는데, 지그룬파스는 도록의 글에서 쫓아오는 듯한 형상을 남성으로 간주해 다음과 같은 해석을 한다; “간호사로 독일에 온 한국 여인 송현숙은 자신을 제3세계 국민으로 착취하고 외국인으로 차별하며, 여성이자 어머니이자, 예술가로서 이런 착취와 차별을 삼중으로 겪게 하는 나라에 대한 혼합된 감정과 경험을 이 그림에 담아냈을 수 있다. 여인과 아이는 예술 속에서만 다시 하나가 되는 그녀의 분열된 정체성의 변종들이다”

1984년에 송현숙은 전남대학교 교환학생으로 1년간 한국미술사, 동양화, 서예 등을 배웠다. 이 때부터 화선지에 붓으로 그리는 드로잉을 시도하면서 연필 드로잉과 템페라 기법에 경도되어 간다. 1991년 함부르크 작가 단체전에 출품한 <19획>(1991)은 송현숙이 그의 트레이드마크라고 할 수 있는 ‘획(브러쉬 스트로크, brushstroke)’을 제목에 사용한 첫 작품으로, 두 개의 나무기둥에 흰 천이 팽팽하게 당겨져 묶여 있는 모습이다. 송현숙은 이 이미지를 드러내는 제목을 짓기 위해 고심하다가, 이름도 중요하지만 바꿀 수 없는 생년월일과 같은 숫자가 본인을 증명한다면 작품을 완성하기까지 들어간 붓질의 횟수도 마찬가지가 아닐까라는 생각을 했다. 그 후 짧은 시간에 몇 차례의 붓질과 획으로 작품을 마감하고, 붓질의 횟수가 제목이 되는 작품이 송현숙의 스타일로 자리 잡는다. 이 시기부터 송현숙의 회화는 붓질의 흔적으로 이루어진 화면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작가가 처음으로 미술대학을 다녔던 1970년대 독일은 학생운동 시대의 공기가 짙게 남아있었다. 그 역시 그러한 의식을 지니고 세계를 바라보는 시각과 사회의 움직임, 그리고 정치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된다. 또한 1978년부터 재독한국여성모임에 참가해 한국의 정치상황과 노동자와 여성의 권리에 대해 진보적 사고를 가진 많은 친구들을 만났다. 그 때부터 송현숙의 그림에는 일상, 추억에 대한 그리움, 전통적인 것과 함께 한국 사회상황과 역사에 대한 의식이 드러나는 주제가 등장한다. 

<인천 동일방직 노동자들에 대한 똥물사건>(1979)은 군사정권하에서 해고당한 여성노동자들의 항의운동과 강경진압을 그린 대작이며, <한국 민주화연대>는 곤봉을 든 경찰이 데모하는 군중을 연행하는 모습을 묘사한 작품이다. <50 획>(1993)에서 막대에 묶은 흰 천을 잡고 엎드려 있는 여성은 <광주항쟁>(1982)에서 경찰에게 양 다리를 잡혀 끌려가는 여성을 그린 드로잉과 겹친다. <50획>의 여성이 쥐고 있는 천은 양 손 가까이에서 몇 번이나 다시 묶인 매듭이 보이며, 두 팔은 만세를 부르는 자세로, 한껏 뻗은 여성은 천으로 연결된 막대기와 절실하게 연결되어 있으려는 듯하다. 광주 민주화 항쟁의 여성은 자기의 양 다리를 잡아당기는 데모 진압대로부터 필사적으로 떨어지려고 하고 있다. 시대를 사는 개개인의 기억을 집어내는 몸짓과 체제에 저항하는 움직임은 둘 다 몸으로 부딪치는 행동이며, 송현숙의 붓질은 그 행위의 흔적이다.

<21획>(1992)에서 화면을 수직과 사선으로 가로지르는 대나무들, 초가지붕과 기둥, 그 기둥에 묶인 하얀 천, 아랫 쪽에 보이는 고무신 같은 형태는 구체적인 대상이기 이전에 붓질 그 자체다. 타와다 요코(多和田葉子)는 베를린에서 간행된 화집에 실린 송현숙의 작품론 「양립의 수수께끼」에서 송현숙의 획으로 이루어진 그림을 “감상적 향수랑 이국적 정취와 전혀 연이 없는, 현대적인 붓의 마술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언급했다(Hyun-Sook Song, Spuren Lebendiger Dinge, 2005). 

송현숙이 사용하는 붓은 한국에서 산 귀얄이라고 부르는 넙적한 풀비와 유럽에서 산 작은 붓이다. 작가가 템페라는 1979년경부터 쓰기 시작했는데, 달걀과 물 송진, 씨앗기름을 혼합해 만든 기본 매염제에 템페라용 가루 물감을 섞어 색을 낸다. 작가는 한 붓에서 여러 가지 색이 섞여 나오는 안료의 느낌이 좋아서 계속 쓰게 되었다고 한다. <고무신 무더기 위에 13획>(2005)에는 다음와 같은 부제가 붙어있다; “2005년 1월 27일, 아우슈비츠 해방 60주년 기념일에 그림. 일제 강점기 정신대 성노예로 끌려가 수난당한 여성들을 기억하며 진상규명을 요구한다”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보면 수직으로 죽죽 그어 내린 13획의 붓 자국만이 눈에 들어오는 평면추상과 같지만, 잘 보면 넓은 붓 자국 너머에 고무신 모양의 붓질 무더기가 보인다. 여기서 부제는 제목과 그림 사이에 박은 단호한 쐐기와도 같아 붓질이 직설적인 부제를 너끈히 품어낸다.

캔버스와 최대한 가까운 거리에서 붓질을 마감한 언저리를 살펴보면, 작품에 오색 실타래처럼 온갖 색이 비어져 나와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이는 템페라 물감을 묻힌 붓이 지나간 흔적이며, 그 붓을 움직여 간 화가의 몸짓의 흔적이기도 하다. 완성된 캔버스는 정제되어 보일지라도 그 붓질은 그리 가지런하지만도 그리 곱지만도 않은 깊고도 복잡한 결을 품고 있다. 송현숙의 회화는 고향의 기억과 같은 개인의 소소한 일상이라 아련하고 포근하지만 하지도, 고국의 정치적 상황과 같은 역사에 남은 사회상이라고 경직되거나 비장하기만 하지도 않다. 한결같은 목소리로 내 삶의 얘기에서 사회에 대한 견해까지 할 말을 다 해내는 그림이다.


* 필자는 2004년 10월 27, 28일 도쿄경제대학에서 열린 심포지엄과 관련전시 《디아스포라 아트의 현재–코리언 디아스포라를 중심으로》에서 송현숙과 처음 만났다. 작품을 실제로 본 것도 그 때가 처음이었다. 심포지엄의 실행위원으로 송현숙의 통역을 하면서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그 후 작가와 작품에 끌려 일본의 연구자, 큐레이터들과 일본의 과학연구비를 지원받아 아시아의 여성작가들에 관한 연구프로젝트를 하면서 송현숙의 함부르크 작업장과 자택을 여러 차례 방문하고, 인터뷰를 포함한 조사연구를 했다. 이 글에서 다루지는 못했지만 송현숙은 뛰어난 다큐멘터리 영상작가이기도 하다. 대표작으로 요셉 힐트만과 공동 제작한 <내 마음의 조롱박>(1995), <회귀>(1997), <집은 어디에>(2003) 등이 있다.




김혜신(1958∼), 가쿠슈인대(學習院大) 철학박사(미술사), 오키나와 현립예술대 예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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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현숙, <무제>, 1983, 캔버스에 템페라, 160×240cm




송현숙, <19획>, 1991, 캔버스에 템페라, 160×240cm




송현숙, <50획>, 1993, 캔버스에 템페라, 160×240cm




송현숙, <광주 항쟁>, 1992, 종이에 유채




송현숙, <21획>, 1992, 캔버스에 템페라, 200×150cm




송현숙, <고무신 무더기 위에 13획>, 2005, 캔버스에 템페라, 160×240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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