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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박일순의 자연, 공감과 포용의 아름다움 | 이주민

현대미술포럼





박일순의 자연, 공감과 포용의 아름다움






녹색의 작가로 알려진 박일순(1951~)은 은일(隱逸)한 작가로 불린다. 작업을 하고 대학에서 후학을 양성하는 일을 제외하고는 최소한의 사회생활만을 유지해온 탓이다. 이러한 자발적 고립 덕분에 정년 퇴임 후, 그는 자신의 삶과 작업에 온전히 집중하고 있다. 박일순의 관심사는 자연이자 생명이다. 미술사 속 자연은 보편적인 주제로 종종 이상향이나 일상의 도피처 등으로 그려졌으며, 아름답고 편안하게 여겨져 왔다. 그의 작업도 비슷한 맥락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작업에는 특정 형태나 자연물을 묘사하는 이미지가 중심이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의 작업을 아름답고 편안하게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 일면 고요하게 보이는 그의 작업에는 다양한 이야기가 교차한다. 이 글에서는 박일순의 작업에 존재하는 여러 층위를 읽어보고, 그것이 만나며 어떤 의미를 만들어가는지 더듬어 보고자 한다.

박일순은 1974년 이화여자대학교 조소과를 졸업하고, 1977년 동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받는다. 당시 사회는 정치적으로 혼란한 시기였고, 미술계 또한 단색화(추상)와 민중미술(구상)로 이분화되어 대립이 심화되었다. 그는 앞의 두 진영에 대한 직접적인 작업이나 발언을 하지 않으며 당대 사회적 흐름에서 다소 멀리 있었다. 대신 작가는 인간의 내면과 본연의 영혼에 대한 동경을 주제로 하여 작업한다. 작업명이 모두 <Desire>인 인물 조각은 주로 콘크리트나 브론즈로 만들어졌다. 때때로 석고나 합성수지로 제작되었으며 강인한 의지가 드러나는 인간의 모습이다. 1980년을 전후하여 인물의 시선은 더욱 높아지고 추상적으로 변화한다. 또한 조각의 크기가 커지며 기념비적인 성격을 보이기도 한다. 보편적인 인간이자 폭발적인 열망을 품은 당대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고, 그 본연의 영혼을 기념하는 것이다. 여기서 그가 표현한 보편적인 인간의 모습은 남성도 여성도 아니다. 그러나 그 육체의 기본값은 여성에 가까워 보인다. 그간 보편적인 인간의 이미지를 남성의 육체에 투영해온 전통에서 벗어나 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1980년 중반, 작가는 인체 조각을 벗어나 추상 작업에 몰두한다. 그는 작업의 제목을 모두 ‘무제’라고 붙였으며, 감각 자체를 시각적으로 드러내고 탐구하였다. 동시에 브론즈가 아닌 석고나 합성수지와 같은 자신에게 좀 더 적합한 재료를 실험하였다. 그는 각각의 작업을 바닥에 놓거나 부조처럼 벽에 걸어 조각과 평면의 경계를 흐린다. 이들은 모듈처럼 반복하는 중에 변주하여 동세를 보이고, 작업은 서로에게 반향을 일으킨다. 이렇듯 작업이 서로 화답하는 관계적인 특징은 이후 그의 전시와 작업 전반에서 꾸준하게 이어진다. 

1980년 후반에 들어서자 자연을 주제로 하는 작업이 본격적으로 등장한다. <나무>(1987)와 이듬해 <발아기>(1988)에서 시작되는 그의 시선은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나무와 새싹에서부터 비롯하여 자연과 생명으로 연결된다. 1990년에 들어서 그는 자연에 관한 더욱 다양한 이야기를 건넨다. <봄>, <겨울>, <숲의 정령>, <하늘> 등 제목에서부터 자연과 생명에 관한 심상이 풍부한 작업이 등장한다. 작업의 형식은 구상과 추상의 구분이 무의미하다는 듯 그 경계를 자유롭게 오간다. 이 시기 작업에는 나무, 돌, 석고, 브론즈, 합성수지 그리고 캔버스에 아크릴릭까지 다양한 재료가 사용되었다. 특히 나무는 이후 그의 작업에서 중요한 재료이자 주제가 된다. 아마도 우리를 둘러싼 가장 친밀한 자연이자 재료이기 때문일 것이다. 나무라는 평범하고 구체적인 자연물은 작업으로서 다양한 의미와 감각을 이끌어 낸다. 관람객은 나무 자체의 객관적 성질부터 작가가 부여한 의미와 추상적 감각을 경험할 수 있다. 더불어 나무에 관한 관객의 개인적인 기억까지 더해지며 입체적인 경험이 가능해진다.

1990년대 중반, 박일순은 작업의 제목을 <그린>, <레드>, <블루>와 같이 특정 색으로 지칭하며 색 자체의 추상성에 집중한다. 더불어 재료 본연의 생명력에 대하여 깊이 공감하는 특성을 보인다. <그린>(1995)은 베니어판에 초록색 물감을 칠한 작업으로 이는 마치 잎이 무성한 실제 나무의 한 부분 같다. 또 다른 <그린>(1995)은 나무에서 수액이 흐르는 순간을 보여준다. 나무의 단면, 작은 옹이 자국에서 수액 한 방울이 흐른다. 위의 작업 모두 그가 주로 사용하는 재료인 나무의 원래 모습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그는 나무가 살아있을 때의 모습을 떠올리기도 하고, 그것의 원천을 드러내어 보이기도 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린’은 자연의 평범한 모습인 동시에 생명 그 자체이기도 하다. 이처럼 그는 자연과 생명을 묘사하는 대신에 어떤 순간을 절묘하게 보여주기 시작한다. 

박일순은 1980년대 중반부터 조각과 회화의 경계를 흐리며 작업해왔다. 1990년대 초반부터는 나무 조각을 붙여 오브제처럼 회화를 제작하였고, 주로 캔버스에 물감을 칠하거나 흘려 나무와 병치하였다. 그러나 1997년 그는 작업 중에 우연히 캔버스의 긁힌 자국을 발견한 후 스크래치 작업을 시작한다. 그는 이에 대하여 “우연한 상처에서 빛이 난다”고 하며 우연성이나 실수 또는 상처를 작업에 포용함을 드러낸다.  스크래치 회화는 여러 번 곱게 채색된 캔버스 표면의 수없이 많은 상처이며 작가의 반복적 행위의 흔적이다. 채색된 캔버스를 긁는다는 것이 조각적이기도 하고, 수없이 반복하여 긁어낸 행위의 결과물로서 수행적이기도 하다. 역시 특정 묘사 없이 행위의 중첩을 통해서 자연과 빛의 감각을 전달한다.

2003년 그는 전시장이 아닌 건물의 로비에서 전시를 연다. 2001년부터 작업한 <봄>은 향나무를 단면이 드러나게 절단하여 꽃봉오리 형상의 의자처럼 만든 것으로, 그는 이를 로비의 바닥에 두었다. 미술 작업은 시각예술이기 때문에 관객은 이를 눈으로 보며 감각을 환기한다. 그간 그의 작업 또한 이렇게 이해되어왔다. 하지만 이 전시에서 관객은 나무에 관한 각자의 기억을 떠올리며, 동시에 직접 손으로 더듬어 그 감각을 실제화하게 된다. 작가는 작업 당시, 벌채를 한 후 얼마 지나지 않은 나무를 자르는 것을 보고 섬뜩함을 느꼈다고 한다. “마치 생명체를 자르는 느낌”이었다고 회상하였는데, 그 나무는 아직 물기를 머금고 있어서 마치 살아있는 듯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는 잘린 나무를 다시 꽃으로 피운다. 작업 재료에 깊이 공감하는 그의 태도는 생명의 순환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진 것이다. 이는 <봄의 정령>(2005~08)을 통해 분명히 드러난다. <봄의 정령>은 앞선 작업 <봄>의 형상을 대리석으로 만든 것이며 야외의 잔디밭에 설치되었다. 그는 “이 꽃봉오리 형상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여기에 있었을 나무의 존재를 일러주며 …… 순환의 세계를 은유한다.”고 썼다.  지금은 아주 달라졌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공간은 먼 과거로부터 이어진다는 점을 환기한다.

2005~09년 대리석 조각 <그린> 연작에서도 재료에 공감하는 태도와, 먼 과거를 기억하고 기념하려는 태도가 혼합되어 드러난다. 그는 버려진 대리석의 매끈한 면이 아닌, 거친 부분에 채색을 하고, 그것이 품은 아름다움이 드러나도록 돕는다. <바다 한 조각>(2007)에서는 아득하고 오래되었을 대리석의 시간 속에서 작가는 바다를 “발굴”한다. 그는 태고의 시간을 시각적이고 촉각적으로 보여주며, 우연하지만 절묘하게 바다를 표현한 것이다. 물론 시간은 눈에 보이지 않고 만질 수 없다. 더욱이 아득히 먼 과거의 기록되지 못한 순간은 자연스럽게 잊었다. 하지만 관객은 일련의 생명의 순환과 태고의 시간에 관련한 작업을 경험하며, 이에 관하여 생각할 기회를 갖는다.

한편, 박일순의 작업에서는 때때로 실제보다 크게 표현된 오브제 조각을 만날 수 있다. 이는 1980년을 전후한 시기의 <Desire> 연작에서 시작된다. <발아기>(1988)는 몽당연필을 크게 만들고 그 위의 연필심을 새싹으로 확대하여 표현했다. 이후 연필, 가슴, 실패, 꽃봉오리, 면봉 등이 큰 형상으로 등장한다. 위의 대부분은 크기가 작거나 평범한 것이지만 작가는 그것들이 중요한 것임을 환기시킨다. 이는 일종의 기념비로서 관람객은 평범하기 때문에 잊히기 쉬운 가치와 그것의 조형미에 대하여 새삼 생각하게 된다. 실패와 면봉 그리고 가슴 작업은 여성주의와 연결되기도 한다. 어머니가 사용하시던 실패와 상처에 약을 발라 주시던 면봉은 모두 그의 유년 속 어머니와 연결되는 기억이다. 전통적으로 ‘실’은 여성의 일이었고, 양육이나 돌봄 역시 여성적 가치로 여겨져 왔다. 수행하듯 공을 들여 정교하게 실을 감은 실패는 개인의 어머니에 대한 기억이면서 동시에 여성주의적인 맥락에 닿는다. 면봉 또한 확대되어, 희고 둥그런 면봉 솜의 형태와 질감의 아름다움이 드러난다. 더불어 작가는 그것에 내포된 여성의 보살핌의 가치를 기념한다. 그의 작업에서 여성의 가슴은 에로틱하게 대상화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생명을 키워내는 가슴은 그 크기가 커지며 푸른 대지와 중첩된다. 작업 초기 보편적 인간상의 기본값을 여성의 신체에 둔 것과 이어지는 지점이다. 

2010년 이후 근작에서는 초록의 색이 더욱 깊어진다. 그는 베니어판 위를 초록으로 가득 채우거나, 결을 그대로 드러내기도 하고, 캔버스 사이사이 각목을 병치하여 나무, 또는 숲의 이미지를 보여준다. 그간 탐구해온 초록의 맥락, 나무라는 재료에 대한 공감에서부터 형태의 언어까지, 그는 정제된 작업 아래에 다양한 이야기를 교차시킨다. 

박일순의 작업은 전통적인 맥락과 연결되어 오기도 하였다. 그는 자연과 생명을 묘사하지 않고 그 자체를 드러내고자 하였다. 과학적 관찰의 결과로서의 서구적 추상이 아닌, 정신 그 자체를 드러내고자 하는 동양적 추상성은 그의 작업 전반에서 나타난다. 또한 반복된 행위가 강조되는 긁어내는 회화나 실패를 감는 행위, 넓게는 거의 모든 작업을 스스로 하는 작가의 수행적 작업 태도를 통해서 정신수양이 강조됨을 알 수 있다. 고양된 정신이 작업에서 그대로 드러난다는 것은 곧 문인화의 정신이고, 더불어 노장사상의 은둔사상과 같은 그의 은일한 삶 또한 비슷한 맥락으로 보인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박일순의 작업에서 전통적 맥락과 여성주의적인 맥락이 공존한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전통은 전근대사회의 가부장 제도와 궤를 같이한다. 하지만 그의 작업에서는 여성이 주체로서 존재하고, 거대 담론에 소외되어 온 이야기가 주제로 등장한다. 특히, 우리는 지금 여기에 존재하지만, 머나먼 과거와 연결되어 있다는 순환의 자연관은 루시 리파드(Lucy Lippard)가 이야기하는 오버레이(Overlay)와 다르지 않다. 

박일순의 작업은 그가 속한 주변을 애정을 가지고 바라본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본인이자 인간을 살피기 시작했고, 곧 주변의 자연에 관심을 두었다. 더불어 부서지거나 깨어진 것, 긁힌 것들도 지나치지 않았다. 이러한 점은 자연과 생명에 관한 그의 깊은 공감을 보여준다. 대부분의 작업을 혼자서 하고, 재료의 본성을 존중하며 작업하는 점과 더불어 수행적인 특성은 작업에 고스란히 드러난다. 조각이나 오브제에 채색을 하고 회화를 긁어내는 그의 작업 방식은 장르의 경계를 무의미하게 만들기도 하고, 구상과 추상의 경계 또한 마찬가지이다. 나아가 그의 작업은 전통과 여성성이 만나는 지점이기도 하다. 그는 작업을 통하여 서로 다른 가치들을 포용하고 있다. 결국 박일순의 자연은 전통의 맥락에 있으면서 동시에 소외되어온 관람객의 반을 자연스럽게 포용한다. 덕분에 우리 ‘모두’는 그의 작업에서 아름다움과 편안함을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이주민(1983~), 이화여대 대학원 미술사학과 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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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박일순, <나무>, 1988, 나무, 브론즈, 33×22×181cm 외


2.  박일순, <발아기>, 나무, 브론즈, 1992, 25×29×63cm 외
박일순, <봄>, 1992, 나무에 합성수지, 165×29×11cm
박일순, <봄>, 1990, 캔버스에 아크릴릭, 나무에 합성수지, 233×212×6.5cm 


3. 박일순, <봄>, 2001~02, 나무, 35×30×32.5cm 외
박일순, <그린>, 2015, 캔버스에 아크릴릭, 162.2×112.1cm 


4. 박일순, <바다 한 조각>, 2007, 대리석에 채색, 26.5×17.3×17.2cm 


5. 박일순, <그린>, 2006, 혼합매체, 93×84×66cm
박일순, <레드>, 2007, 캔버스에 아크릴릭, 112.1×324.4cm 
박일순, <그린>, 2007, 나무, 실, 아크릴릭, 141×47×37cm 
박일순, <레드>, 2007, 캔버스에 아크릴릭, 162.2×224.2cm 
박일순, <레드>, 2005, 나무, 실, 아크릴릭, 111×25×14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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