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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박영숙, 여성적 사진의 길을 열다 | 이슬비

현대미술포럼





박영숙, 여성적 사진의 길을 열다 






사진작가 박영숙(1941~)의 작업 중심에는 사진과 여성이라는 두 개의 키워드가 놓여 있다. 사진이라는 매체가 시각의 파편화로 세상을 새롭게 바라보는 방법이라면 그는 여성주의를 통해 세상을 인식하고 주체적으로 말하는 방법을 모색한다. 하지만 이 두 영역은 그의 작업에서 분리되지 않는다. 사실 사진은 피사체를 대상화하는 폭력성 때문에 철저하게 남성 중심적인 산물로 여겨졌다. 남성 작가의 사진에서 여성은 욕망의 대상이거나 타자이다. 하지만 박영숙은 남성 언어로 길들여진 사진계에서 여성적 사진 찍기란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그것은 여성을 발견하는 과정이자 공감의 영역이며, 서로 연대하며 함께하는 삶을 고민하는 여성주의적 실천이다. 

숙명여자대학교에서 사학과를 전공한 박영숙은 재학 시절인 1961년 ‘현대사진연구회’ 멤버로 활동했으며, 1962년 학교 내 사진 동아리 ‘숙미회(淑美會)’를 창립해 초대회장을 맡았다. 1966년에 중앙공보관에서 여성 사진작가 최초로 개인전을 열었고, 1982년에 개최한 4회의 개인전까지 그의 초기 작업은 대부분 여성 혹은 문화예술계 인사들을 찍은 모더니즘 경향의 흑백 다큐멘터리 사진이었다. 

1986년 숙명여대 산업대학원 사진디자인과 졸업 이후 그는 여성주의 단체인 ‘또 하나의 문화(이하 또문)’에 참여해 본격적으로 여성주의 사진작가라는 정체성을 확립했다. 40대에 여성주의를 처음 접한 그는 몸과 마음을 뒤흔드는 전율을 경험했고 낯선 길이지만 여성주의 사진을 찍겠다고 결심했다. 이때부터 그는 여성 문인들과 교류하며 여성주의 글쓰기를 훈련했고 여성주의 문제의식을 반영한 작업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여성의 가치, 함께의 가치 
박영숙의 초기 여성주의 작업은 여성의 구체적인 몸을 통해 모성의 새로운 가치를 발견하고 여성 간의 연대 의식을 강화하는 당시 여성주의 미술의 흐름과 함께 했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모성 이데올로기는 부계혈통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여성의 임신과 출산, 양육을 신성한 영역으로 미화하고 여성을 억압하는 기제로 작용했다. 1988년 또문이 기획한 여성시화전 《우리 봇물을 트자: 여성 해방 시와 그림의 만남》 출품작 <장미>는 시인 강은교의 시 <이름 모르는 꽃>을 사진으로 재해석한 것으로 활짝 핀 장미와 만삭 여성의 구체적인 몸을 통해 임신의 성스러움보다 일상적 의미를 보여준 작업이다. 

신비화되지 않은 여성의 몸은 윤석남과의 공동작업 <자화상>(1992)을 통해서 두드러지는데 박영숙은 유방암으로 한쪽을 잘라낸 가슴을 가감 없이 드러냈다. 그동안 여성의 가슴은 작품에서 남성의 에로티시즘을 자극하는 요소이거나 자식을 돌보는 어머니의 역할을 위해 등장했다. 그러나 박영숙은 있는 그대로의 여성의 몸을 당당하게 드러내 그야말로 충격을 선사했다. 잘려 나간 가슴 사진 앞에 윤석남은 나무 조각을 세우고 전구를 달아 상징적인 불을 밝힘으로써 여성의 주체 의식을 연대를 통해 보여주었다. 

여성주의를 표방한 전시 《여성, 그 다름과 힘》(1994)에서 박영숙은 윤석남과 여성 목사 김영, 가수 한영애와 공동작업 <자궁의 노래>(1994)를 발표해 현대 사회의 병폐를 치유할 수 있는 생명의 근원으로서 모성적 원리를 주목했다. 이 작업은 윤석남이 바느질로 여성 성기를 형상화한 천을 지나 자궁과 같은 방에서 생명을 모티프로 한 박영숙의 슬라이드 필름 작업이 한영애의 구음을 배경으로 상영되는 거대한 설치예술로 제작됐다. 

미친년들, 한 명이 아닌 여럿 
1999년부터 시작한 박영숙의 <미친년 프로젝트>는 여성주의 탐구를 보다 구체화한 작업이자 여성주의 사진의 다양한 면모를 보여준 방대한 작업이다. 여성 미술의 다양한 스펙트럼을 보여준 대규모 전시 《99 여성미술제 : 팥쥐들의 행진》에서 처음 선보인 <미친년들>은 마치 아기를 안듯 베개를 끌어안고 있거나, 치약 두 개를 움켜쥐고 양치질에 열중하고, 위험한 물건들이 있는 곳에 아이를 제멋대로 방치하는 등 가부장제 사회 속에서 억압을 견디다 못해 정신을 놓아버린 여성들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박영숙은 미칠 수밖에 없는 여성들을 사진의 피사체로 삼지 않았다. 그의 여성주의 동료인 사진 속 모델들은 연출 사진이라는 콘셉트를 통해 단순히 설정된 상황을 연기하는 것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해석하며 작품의 협업자가 되었다. 박영숙은 피사체인 여성들과의 연대를 통해 미친년이 만들어지는 과정에 주목했다. 그의 말대로 여성의 자아와 욕망을 억압해온 가부장제 사회에서 “미쳐야만 자유로울 수 있는” 1) 여성의 현실을 미친년이라는 화두로 통찰한 것이다. 

초기의 미친년 연작이 특별한 배경 없이 스튜디오에서 포즈를 취한 여성들을 찍었다면 <갇힌 몸 정처 없는 마음>(2002)에서는 부엌, 침실, 화장실, 베란다 등 일상의 공간을 배경으로 여성들은 고등어를 손질하다가, 화초에 물을 주다 말고 넋을 놓는다. 여기에서 집안은 여성에게 친밀하고 사적인 공간인 동시에 여성의 노동과 헌신을 요구하고 그들을 소외시키는 억압적인 사회 구조로 작용한다. 이 작업에서 여성들은 몸은 갇힌 채 알 수 없는 어딘가를 응시하며 정신적인 탈출을 시도한다. 나아가 <꽃이 그녀를 흔들다>(2005)에서는 담장을 넘어 꽃밭에 드러눕는 등 과감한 행동을 보이며 자신을 구속하는 현실로부터 탈출을 감행한다. 

‘미친년’은 사회적으로 욕과 다름없는 여성을 비하하는 말이자 가부장제 사회의 규범에서 벗어난 여성에 대한 두려움을 함축한다. 여성들은 그의 작업에서 미친년으로 안주하지 않는다. 박영숙은 미친년에 남성 중심의 질서와 권위에 도전한 진보적이고 주체적인 존재라는 새로운 정체성을 부여했다. 그는 화폐 속 남성 초상을 대신해 주체적 삶을 살아낸 신화 혹은 역사 속 여성들을 <화폐개혁 프로젝트>(2003)를 통해 오마주하고, ‘여성(Woman)’과 ‘유목민(Nomad)’의 합성어인 ‘우마드(Womad)’를 빌려 21세기 여성상을 시각화한 <헤이리 여신 ‘우마드’>(2004)에서 여성의 잠재력을 확인했다. 또한 <레즈비언 결혼식>(2003), 게이의 신체를 찍은 <무슈 버터플라이>(2003)을 통해 성소수자의 삶에 공감하고자 했다.  

1세대 여성주의 사진가의 변신
박영숙의 <미친년 프로젝트>는 총 10편2) 의 연작을 통해 미친년의 기존 의미를 해체하고 새로운 맥락에서 해석하고자 했다. 프로젝트를 마치고 최근 개인전에서 선보인 <그림자의 눈물>(2019)은 마녀에 관한 서사다. 그는 전시 《우리 봇물을 트자》에서 실험적 시퀀스 형식의 작업 <마녀>(1988)를 발표한 바 있다. 이 작업이 희생된 마녀의 영혼을 불러내어 위로한 것이라면 <미친년 프로젝트>의 마지막 작업인 <내 안의 마녀>(2005)는 마녀성을 지혜롭고 창의적이며 주체적인 내면의 힘으로 표현했다. 그는 <그림자의 눈물>을 통해 제주 곶자왈이라는 버림받은 땅, 기괴하게 엉킨 숲에서 다시 한번 마녀의 흔적을 더듬는다. 흥미롭게도 이 작업에서 여성의 몸은 사라지고 구슬, 바늘쌈지, 헝겊 등의 사물들이 영롱한 색채를 내뿜는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그녀의 존재를 생생하게 포착한 것이다. 

박영숙은 동시대 여성주의 흐름과 공명하며 여성적 사진을 끊임없이 탐색했다. 사실 <미친년  프로젝트>는 처음부터 연작이나 거대한 프로젝트를 염두에 둔 작업은 아니었다. 남성 중심적 언어가 지배적인 상황에서 여성의 말하기는 언제나 미끄러질 수밖에 없다. 박영숙의 여성적 사진은 그 자체로 여성주의가 복수의 개념이라는 사실을, 그 안에 다양한 여성주의가 공존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에게 여성주의는 여성의 차별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여성의 차이를 이해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박영숙은 작가로서 작업에만 열중한 것은 아니었다. 1990년대 이후 ‘여성미술연구회’, ‘여성문화예술기획’의 회원, 여성주의 잡지 『이프(if)』 발행, 2000년 도쿄에서 열린 ‘일본군 성노예 전범 여성 국제 법정’에서 현장 사진을 찍는 등 동시대 여성주의 문화 운동과 연동해 활발한 행보를 보였으며, ‘현실문화연구’ 운영위원으로 동시대 문화연구에도 매진했다. 1998년 ‘여성사진작가협회’를 창립해 여성 사진가들의 권익 신장을 위해 노력했으며 2006년부터 10년간 사진 전문 트렁크갤러리를 운영해 사진작가를 육성하는 물적 토대를 마련했다. 

이 모든 활동은 바로 여성적 사진을 위한 밑거름이자 이를 향한 탐구의 여정이었다. 그에게 여성적 사진은 남성적 질서가 만연한 한국 사진계에서, 회화가 중심인 한국 미술계에서 소외를 극복하기 위해 고투하는 과정이다. 박영숙은 1세대 여성주의 사진작가로서 사진을 통해 여성의 목소리를 담고자 한 최초의 시도에 머무르지 않는다. 여성적 사진을 향한 그의 열정은 지금도 계속된다. 





이슬비(1982~), 이화여대 대학원 미술사학과 석사,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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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박영숙, 『박영숙』, 헥사곤, 2016, p. 19.
2) <미친년 프로젝트는>는 <미친년들>(1999)을 시작으로 <상실된 성>(2001), <갇힌 몸 정처 없는 마음>(2002), <게이(뮤슈 버터플라이) 그리고 레스비언(레즈비언 결혼식)>(2003), <화폐개혁 프로젝트>(2003), <헤이리 여신 ‘우마드’>(2004), <오사카 페미니스트들>(2004), <도쿄 페미니스트들>(2004), <꽃이 그녀를 흔들다>(2005), <내 안의 마녀>(2005)로 이어졌다. 









박영숙・윤석남, <자화상>, 1992, 젤라틴 실버 프린트, 혼합매체, 160×98cm(사진), 110×40×30cm 




박영숙, <미친년들 #1>, 1999, C-Print, 150×120cm 




박영숙, <갇힌 몸 정처 없는 마음 #1>, 2002, C-Print, 120×120cm




박영숙, <헤이리 여신 ‘우마드’ : 분노의 여신>, 2004, C-Print, 160×120cm 




박영숙, <꽃이 그녀를 흔들다 #13>, 2004, 120×120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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