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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한국 현대조각으로의 비상(飛上), 김정숙 | 이유선

현대미술포럼





한국 현대조각으로의 비상(飛上), 김정숙






독자적 작품 세계를 일군 예술가이자 30년이 넘도록 후학양성에 매진해온 교육자로서 한국 현대조각의 포문을 연 조각가 김정숙(1917∼1991). 그는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조소과에 1회로 입학한 학생이자 졸업생으로서 국내 최초로 미국에 유학하여 세계 현대조각의 조류를 몸소 체험하였다. 또한 당시 익힌 철 용접 조각의 기법을 국내 미술대학에 본격 도입함으로써 한국 현대조각 발전에 큰 기여를 하였다. 이러한 서술에 있어 새삼 ‘여성’조각가라는 수식어를 붙이는 것이 무의미하게 느껴질 만큼 김정숙이 한국현대미술사에서 가지는 의의는 적지 않다. 

김정숙은 일제강점기 서울에서 조선약업상회라는 이름난 한약재 무역도매상의 맏딸로 성장했다. 부유하고 풍족한 환경과 유교적 가풍 속에서 자랐던 어린 시절은 그를 애정이 충만하고 자유를 희구하는 열정가이자 한편으로 스스로에게 엄격하고 인내심이 많은 성품으로 이끌었다. 남편인 김은우 박사의 회고에 따르면 김정숙의 모친과 조부 역시 손재주가 좋고 풍류가 있었는데, 그의 예술가적 기질은 이러한 집안 내력에서 어느 정도 기인했던 것으로 보인다. 결혼과 함께 이화여전 가정과 3학년이던 해 학업을 중단해야 했던 김정숙은 1949년 남편의 적극적인 지지에 힘입어 그해 처음 문을 연 홍익대학교 미술학부 조소과에 입학하여 윤효중을 사사하였다. 서른셋이라는 당시로서는 만학에 가까운 나이에 체력적으로 소모가 심한 조각에 입문한 그는 늦깎이로 발을 들였다는 사실을 만회하듯 더욱 진지하게 조각수업에 임했다. 당시 홍익대학교 교수였던 이대원의 회고에 따르면 한참 어린 동급생들과 젊은 교수들은 그를 ‘마담 조각가’라는 별칭으로 불렀다 한다.
 
홍익대학교에 다니며 조각의 기초과정을 익힌 김정숙은 1955년에 한미재단의 유학 프로그램에 선발되어 미시시피 주립대학에 입학하면서 조각가로서 큰 도약기를 맞이하였다. 여기서 그는 오스트리아 출신의 철조 조각가 레오 스테파트(Leo Steppat) 교수를 스승으로 하여 국제적인 감각의 현대조형 언어를 새롭게 습득하였다. 또한 추상을 표현하는 법, 공간과 선, 볼륨의 활용, 다양한 재료가 가지는 질감과 그 특성의 비교 등 중요한 조각의 본질을 체화하였다. 더불어 그는 조각가로서 최고의 커리큘럼과 작업 환경을 갖춘 크랜브룩 아카데미 오브 아트(Cranbrook Academy of Art)에서 조각의 다양한 재료와 조형언어가 만들어내는 특성들을 익혔다. 특히 당시 한국의 조각가로서는 매우 생소했던 산소 용접 기법에 대해 익히면서 한때 철 용접 조각에 심취하기도 하였다. 이후 1956년 가을 귀국하여 홍익대학교 강사로 부임한 그는 국내 미술대학에서는 최초로 철 용접 조각과 산소용접을 할 수 있는 실기실을 열었다. 또한 1958년에는 홍익대 공예과 신설을 위해 클리블랜드 미술전문학교에서 1년간 수학하기도 했다.

위와 같은 두 번의 미국 유학생활을 통해 김정숙이 국내에 철조 기법을 전파했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도 의미가 있을 뿐만 아니라 한국 현대조각이 추상의 국면으로 전환되는 계기가 되었다. 1950년대 초중반만 해도 국내의 조각 교육은 찰흙을 이용한 인체 모델링이 일반적이었으며, 그 후반에 들어와서야 김종영과 송영수 등 일부 작가들이 해외 미술잡지에 소개되거나 국제교류 전시를 통해 본 용접조각을 나름의 방식으로 시도하기 시작하였다. 그중에서도 김정숙은 미국에서 직접 철조 제작 교육을 받았을 뿐 아니라 여러 동료들의 제작 모습을 지켜보면서 국제 조각계의 현장 분위기를 체험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수혜를 입은 셈이었다. 그런 그가 교육자로서 다양한 재료를 활용하여 새로운 조각의 방법을 모색할 수 있도록 독려한 점은 한국 조각발전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장면이라 할 수 있다. 제자 박종배 역시 그가 학생들에게 추상조각의 길을 열기 위한 방법으로 용접기법을 소개했으며 전통적 조각방식과 전혀 다른 이러한 교육을 통해 공간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추상으로의 이해를 진전시킬 수 있었다고 회고하였다. 

뿐만 아니라 김정숙은 수차례 유럽과 미국을 방문해 오십 자드킨(Ossip Zadkine), 에밀리오 그레코(Emilio Greco), 페리클레 파치니(Pericle Fazzini), 이사무 노구치(Isamu Noguchi), 헨리 무어(Henry Moore), 세자르 발다치니(César Baldaccini)와 같은 세계적인 조각가들의 작업실을 찾아다니면서 작품에 대한 설명을 직접 듣고 사진으로 남겨왔는데, 이는 작가로서 작품에 대한 열정과 탐구심은 물론이거니와 후학들을 위해 많은 시각자료를 챙기기 위함이었다. 사진자료들은 교수자료로 활용되어 한국의 학생들이 유럽과 미국의 동시대 작업 경향과 제작 과정 등을 생생히 접하게 하는데 일조했다. 당시 실기수업에서 그처럼 폭넓은 교육의 기회를 제공한 사례도 드물었으며 이는 그가 가진 교육자로서의 사명감, 책임감에 기인한 것이라 하겠다. 

그러나 조각가로서의 김정숙은 용접조각보다는 대리석이나 나무, 브론즈 등 전통적인 재료를 선호했다. 김정숙의 꼼꼼하며 완벽을 기하는 성향, 적극적으로 몰입하는 실행력 등은 작품을 제작하는 그의 태도가 즉흥성과는 거리가 멀다는 점을 말해준다. “느낌과 또 손과 물질, 이 세 가지에서 느낌이 사람의 손을 통해 매개체인 물체로 옮겨졌을 때 하나의 조각이 되는 것”이라는 언급에서 보는 바와 같이, 김정숙은 손을 통해 재료에 전달하는 작가의 감성을 중시함을 알 수 있다. 그의 이러한 자세는 다루는 재료에 대한 몰입과 표현 대상을 향한 사랑으로 승화하며 관람자로 하여금 감정의 전이를 느끼게 한다. 그렇기 때문에 초기 작업 중 익살스러운 표정의 모자상이나 행복한 연인의 모습 등 애정이 진하게 표현된 주제의 작업들은 모성과 자연스럽게 연관되거나 자전적 이야기로 해석될 수밖에 없었으며 김정숙 역시 이러한 면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재료를 천천히 다듬어 나가면서 그 안에 담긴 생명성을 발현해내고 자신의 호흡을 느끼는 것이 조각의 본질이라고 느꼈다. 

김정숙의 40여년에 걸친 작품 세계는 인간에 대한 깊은 애정을 나타내는 구상 형태에서부터 점차 추상 형태로 심화되어 갔다. 그의 초기작업인 <엄마와 아기 B>(1957), <키스>(1956), <두 얼굴>(1961) 등은 구상이면서 추상의 요소가 가미된 생명주의 조각의 전조 단계를 보인다. 이들은 아카데믹한 인체조각과 달리 유기적 형태감과 정서의 표현 등에 있어서 보다 주관적이며 부드러운 질감과 곡선을 특징으로 한다. 기존 인체를 재현하는 구상적 형태에 자연의 유기적인 추상이 결합하면서 재료의 물질성을 강조하는 이러한 방식은 1950년대 말부터 한국 조각계에 영향을 끼친 생명주의 조각의 주요 특징이었다. 김종영, 윤영자 등 국내의 많은 조각가들은 이미 헨리 무어, 바바라 헤프워스(Barbara Hepworth) 등으로 이어지는 세계현대 조각의 흐름을 알고 있었고 이를 습작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들은 생명주의 조각의 답습에 그치지 않고 점차 한국만의 독자적인 추상성을 획득하고자 노력하면서 이후 한국적인 모더니즘의 전개에 일조했다.

김정숙의 1950년대 후반부터 1960년대까지 이어진 초기 작품 역시 이러한 경향이 잘 드러난다. 그는 조형적으로 비례와 균형, 곡선의 아름다움에서 완결함을 추구했으며 나무나 돌 등의 재료가 가지는 물성을 충분히 매력적으로 돋보일 수 있도록 구성했다. <토르소 B>(1962)는 나이테가 지니는 유려한 무늬와 나무 자체의 따뜻하고 부드러운 색상이 강조되는 한편 양감과 대비되는 네거티브 공간을 통해 균형감을 모색한 작품으로서 부드러운 곡선의 형태와 물질성을 통해 여성의 강인하면서도 부드러운 특징을 담아내고 있다. 특히 토르소는 인간의 일부라는 구체적인 형상이며 동시에 생명력을 의미하는 하나의 상징으로 환원된 것이다. 이를 통해 추상 형태에 가까워지는 작품들에서도 여전히 생명에 대한 경외심 같은 감정들이 내포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1970년대에 접어들면서 김정숙의 작품은 절제되고 균형을 갖춘 형태를 통해 한국적 미감과 정서를 제시하였다. 1971년에 작업한 <토템 B>는 마치 장승이나 기념비 등을 연상시키면서 토속신앙에 담긴 주술적 힘을 감지하게 한다. 또한 이 시기 그의 작품에서도 자주 나타나는 산, 강, 반달, 그리고 해와 같은 모티프들은 김환기의 그림에서도 자주 볼 수 있는 우리나라의 전통적 상징으로서 김정숙이 이러한 자연적인 모티프들을 통해 자신만의 스타일로 한국적인 조각을 개척해내고 있음이 확인할 수 있다. 돌을 깎고 다듬어 제작한 <반달>(1976)에서는 실제 제목에서 유추할 수 있는 형상의 구상적인 특징이 단순화되어 그 밀도를 더하고 있는데, 표면의 질감처리를 통해 그의 독창적인 면모를 드러낸다.

김정숙 작품의 후반기는 197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까지 비교적 긴 시기 제작되었던 <비상> 시리즈로 압축될 수 있다. 1970년대 초부터 심화되었던 추상적 경향이 날개의 상징성을 통해 초월적인 것에 대한 염원과 자유에의 열망으로 압축되어 표현되었다. ‘새’를 상징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전의 생명주의적 추상의 본질을 유지하고 있으면서 동시에 형체를 가지지 않은 추상 개념의 상상적 표현은 실제로 자유를 염원했던 김정숙의 정신을 극명히 포함하고 있다. 무엇보다 이 연작에서는 김정숙 작품 특유의 세련된 형태감각과 재료의 아름다움을 극대화한 질감처리, 표면의 완성도, 그리고 대칭적 형태에서 획득되는 균형의 미가 잘 드러나 김정숙 예술의 면모를 십분 드러낸다. <비상>(1983)은 높이 날아오르기 위한 기의 응축을 좌우 대칭의 긴장감으로 나타내고 있으면서도 대리석이 지니는 중량감을 깃털과 같이 부드럽고 가볍게 표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가 재료의 특성을 이해하고 다루는데 매우 완숙한 경지에 다다랐음을 드러낸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조각가 김정숙은 인간에 대한 사랑과 애정, 격한 감정의 낙차, 이상을 향한 자유에의 갈망 등 자신의 내면세계를 투영한 작품세계를 평생 펼쳐왔다. 또한 그는 교육자라는 소명의식으로 한국 현대조각의 첨두에 서서 새로운 조각 언어를 전파하고 많은 예술가들의 창조적 열망에 불을 지폈다. 한국 최초의 여성조각가로서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개척해나갔던 김정숙은 결국 스스로를 여성 조각가가 아닌 한 사람의 ‘조각가’로서 한국 현대조각사에 당당히 자리하게 하였다. 





이유선(1982∼), 이화여대 대학원 미술사학과 석사, 성북구립 최만린미술관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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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숙, <키스 Kiss>, 1956, 인조석, 57×37×13cm



김정숙, <토르소>, 1962, 나무, 97.8x32x24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김정숙, <반달>, 1976, 대리석, 30x96x46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김정숙, <비상 飛翔>, 1983, 대리석, 18×100×20cm, 고려대학교박물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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