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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신옥주의 조각, 외강내유의 역설 | 장예란

현대미술포럼





신옥주의 조각, 외강내유의 역설





《에꼴 드 서울》이 5회를 맞던 해, 여성으로서는 처음 입체 부문 명단에 이름을 올린 작가가 있었다. 그 이름은 신옥주(1954∼)로, 참여 작가의 남녀 성비가 9:1에 육박하던 이 당대 주요 미술행사에 여류 조각가가 출전한 것은 의미 있는 사례였다. 그는 1979년부터 1995년까지 이 연례 전시에 지속적으로 참여하고 한국미술대상전의 최우수상(1980)과 김세중 청년조각상(1994)을 거머쥐는 등 20세기 후반 국내 화단에 적잖은 발자취를 남겼는데, 그와 같은 행적을 돌이켜 보는 일은 부계 중심으로 논의되어 온 전후(戰後) 한국미술사에 부드러운 숨결을 이입하는 일이 될 것이다.
 
신옥주가 조각을 배우고 화단에 등단한 1970년대 초∼1980년대 초 한국 조각 미술계는 경제적인 부흥에 따른 정보 채널의 다변화와 한국 작가들의 해외 비엔날레‧전시 참여 증대로, 미니멀리즘을 위시한 동시대 모더니즘 미술사조의 빠른 유입을 맞이하고 있었다. 당대 조각가들은 이러한 국제 조류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인체 재현을 중심으로 하는 종래의 관학풍 작업에서 벗어나 오브제 작업, 설치 미술 등 재료의 물성이나 형태들의 구조적 관계를 탐색하는 비구상 조각을 보다 적극적으로 실험하기 시작했다. 특히 한반도의 격변기를 겪은 젊은 세대, 즉 6‧25 전쟁이 발발한 1950년대에 출생하여 제3공화국 시절 유년기를 보내고, 유신 체제하에 대학 생활을 하며 현실 문제에 맞선 전후 세대들은 국제적인 동향에 발맞추어 한국 현대조각의 방향성을 새롭게 모색하는데 뜻을 함께 했다.
 
이는 미술대학의 교육 시스템과도 맞물렸는데, 이를테면 서울대학교 조소과에서는 최의순, 최만린 등 반(半)구상 조각이나 용접 기법을 활용한 추상 조각 작가들이 교수로 영입되어 후학을 양성하기 시작했다. 1976년에는 석조장, 목조실, 철조실 등의 전문시설이 교정에 갖춰지고 산소/아크 용접기 등의 기계설비들이 구비되어 학생들이 다양한 소재와 기법의 실험을 할 수 있었다. 흙, 나무, 돌 등의 자연물을 손으로 다루는 것뿐만 아니라 금속 등의 공산품을 기계로 조립, 연결, 설치하는 방식이 국내 조각에 적극 도입된 것이다. 1977년과 1981년에 각각 서울대학교와 동대학원을 조소 전공으로 졸업한 신옥주도 이와 같은 변화를 겪은 학도들 중 한명이었다. 1976년의 어느 날을 회상하는 아래와 같은 작가의 언급은 당시 상황을 반영한다.
 
“철판(鐵板)을 처음 대하게 된 것은 1976년이었다. 그때 나에게 있어 조각은 재현적인 한계로 인해 새로운 표현에의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하고 있었다. 어느 날 답답한 방구석을 무심코 응시하고 있다가 불현듯 스티로폴[스티로폼]판을 구석에 놓고 깨뜨려보았다. 그리고 그것을 철판으로 옮겨 보았다. 나는 너무도 평범하고 단순한 체험 속에서 과거 조각의 피상적인 개념이 아닌 나의 현실로서의 구체적인 조각의 가능성을 발견했다”
 
이러한 깨달음 이후 철판은 신옥주의 조각과 뗄 수 없는 주요 소재로 자리매김했다. 위 작가의 말에서 예견할 수 있듯이, 그의 초기 작업은 스티로폼을 부쉈을 때 발생하는 거친 단면 같은 것들이 철판을 통해 자유자재로 구현되는 모습을 보인다. 예컨대 <태어남>(1977)에서 그는 두꺼운 철판을 원형으로 잘라내어 한가운데를 무작위로 절단한 다음, 그 틈새를 열어젖히고 비스듬하게 세워 비정형적인 형상을 탄생시켰다. 이처럼 규칙적이지 않은 형태는 모서리들 간의 비워진 곳, 즉 작품 사이로 보이는 네거티브 공간과의 만남을 통해서 비로소 드러나게 된다. 1세대 여성 조각가인 김정숙이나 윤영자가 실재 대상을 모티프로 삼되 이를 브론즈나 석재로 추상화하여 구상 조각에서 탈피했다면, 신옥주는 철판이라는 물질 그 자체를 실험하고 현실 공간을 작품의 일부로 끌어들임으로써 현대 추상 조각에 한 걸음 더 다가간 것이었다.
 
1980년대 초부터 신옥주는 철판을 뚫어 트이게 하는 작업에서 나아가, 철판에 열을 가해 엿가락처럼 선을 뽑아내어 이를 공간에 유연하게 펼쳐내는 작업들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선이라는 회화적인 요소를 조각의 영역에 끌어들인 셈인데, 회화의 한 분야로 다뤄져 온 ‘드로잉’이 그의 작품 표제로 사용된 것은 이러한 포섭을 암시한다. 한 예로 1980년작 <드로잉>을 살펴보면, 하나의 철판에서 뽑아져 나온 시작도 끝도 없는 라인들이 바닥에 굽이쳐 눕고 넝쿨처럼 하늘로 타고 오르다가 다시 땅으로 하강한다. 2차원적인 붓질을 3차원으로 확장한 듯한 이 선적인 조각은 주변부 공간을 작품의 일부로 포괄한다는 점에서 여백을 작품의 한 요소로 보는 한국의 서예와도 닮아 있다.
 
그러나 서예에서 일필휘지의 필치가 정신의 정수로서 단번의 동작을 통해 그어지는 것이라면, 신옥주 조각에 나타난 선의 흐름은 작가가 재료를 다루면서 생동하는 과정, 즉 작가 신체의 움직임이 실시간으로 반영된 것에 가깝다. 1993년 시인 황지우와의 인터뷰에서 신옥주는 이러한 신체적인 제스처를 가사노동인 ‘걸레질’에서 착상하여 작업에 적용했다고 밝힌 바 있다. 실로 그는 손걸레질처럼 강단 있으면서도 부드럽고 반복적인 움직임을 통해 철 그 자체에 잠재된 물성이 자연스럽게 드러나도록 하였다. 이는 달구고 때리고 부수는 등 재료에 폭력을 가하여 의도하는 형상을 도출하는 여타의 남성적인 작업들과 대비되는 것이다.
 
철은 강도가 높은 금속이지만 불과 같은 고열을 만나면 흐르는 액체로 변하고 녹는점과 응고점이 동일하게 1535도인 물질이다. 신옥주의 작품에서는 이러한 철의 물성, 즉 특정 온도에서 액화하는 동시에 고체화하는 철의 예측 불가능한 성질이 작가의 아이디어만큼이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평론가 이종숭의 언급을 빌리자면, 그의 작업은 “용융과 응고라는 상반현상 사이에 위치하는 …… 변용의 점진적인 생성 과정” 속에서 발생하는 셈이다. 일례로 <지평에서-관악 I>(1987)에서는 철판이 둔각으로 휘거나, 철판의 절개선 끝이 둥글게 남거나, 모서리나 이음새가 물결 모양으로 불규칙하게 변형된 형상이 발견된다. 또한 철판은 외력을 받을 때 원래의 모양으로 복귀하려 하고 탄성 이상의 힘을 받으면 그 힘이 사라졌을 때 변화된 모습 그대로 남게 되는데, 신옥주는 이러한 탄성변형과 소성변형의 성질을 재주 있게 활용하며, 중량감 있고 견고한 재료를 유연하고 가변적인 형질로 전환하는 데 성공하였다.
 
1986년 신옥주는 서울대 미대 출신으로 결성된 그룹 ‘로고스와 파토스’의 일원이 되어 이후 그룹 전시를 통해 작품을 꾸준히 발표했다. 1980년대는 국내 작가들이 다양한 그룹을 구성하고 직접 전시를 기획했던 시기로, 그 중 하나인 로고스와 파토스는 문화적인 접변을 거듭하며 형성된 토착의 모더니즘 논리를 계승하면서도 각자의 감수성으로 ‘여기 그리고 지금(hic et nunc)’이라는 시대의식을 밝히려는 일념의 그룹이었다. 1988년의 작가의 말은 신옥주 또한 시대를 감각하고 그 한계를 벗어나고자 고민하고 있었음을 드러낸다.
 
“20C의 공업산물인 철판(차갑고 강인하면서 답답하게 막힌 느낌)과 이러한 상태에 대항하여 이를 마멸시킬 수 있는 고압으로서의 불이 선택되었다. 이는 …… 답답한 나의 현실(정치‧사회‧문화‧한국의 조각 등의 한계성과 그 위기의식 그리고 절박감)을 총체적인 추상성으로 표현하려는 것이었다. …… 도시에 사는 우리는 기계적이고 반복적인 물질문명의 합리적 사고와 피상적인 논리의 가치체계에 젖어 있는 것을 느끼고, 또한 사진‧TV‧영화 등 평면문화 속에서 깊이에의 체험보다는 환각을 일으키는 허상의 세계에 순간 순간 직면하게 될 때 허망함과 불안감을 느끼게 된다. 그 속에서 내가 원시를 꿈꾸며 비합리적인, 살아있는 자연과 인간이 마주치는 숨결을 느끼고자 함은 현실로부터의 도피일까?”
 
즉, 신옥주에게 철판은 20세기 물질문명의 야만성을 함의한 소재였던 것이다. 앞서 논의한 바와 같이 그는 이 소재를 강압적으로 깨트리는 대신 순리에 따라 가변적인 조각으로 소생시킴으로써 벽에 가로막힌 현대 생활에 “뜨겁고 유연하고 경쾌한 숨결을” 불어넣고자 하였다. 그의 작업에서 들판의 잡초나 풀꽃 같은 무작위의 생명력이 감지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또한 그는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중반 사이에 만든 작품 표제 대부분을 ‘지평에서’로, 부제를 ‘들녘’ ‘먼동’ ‘절벽’ 등의 자연 현상으로 칭하면서, 물질문명의 피상성을 벗어날 수 있는 기제로 ‘대자연(mother nature)’을 염두에 두고 있음을 시사했다. 신옥주의 조각이 전시장 실내가 아닌 대지 위에 옥외미술의 형태로 설치되는 데 무리가 없음 또한 같은 연유에서다.
 
실제로 그가 1990년 무렵부터 작업해 온 ‘지혜의 문’ 연작은 그 다수가 야외미술제나 조각공원의 영구 설치 작품으로서 대중에 공개되었다. ‘지혜의 문’이라는 제목은 “양감을 채우는 것이 아닌 ‘비움’을 추구하고, 그 여백의 공간을 오가며 (관람자가 스스로) 터득하기를 바라는” 작가의 마음에서 붙여진 것으로, 작품의 트인 공간은 주변 풍경과 이를 경험하는 관람자를 포용하는 모습을 보인다. 예컨대 가로, 세로, 높이가 각각 2미터가 넘는 대형 작업 <지혜의 문>(1997)에서 신옥주는 하나의 철판에서 들려 나온 선들로 사람이 지나다닐 수 있는 복잡한 문의 얼개를 생성했다. 여기서 조각은 그 물리적인 구조가 안과 밖의 구분이 없고 유기적인 것에 더불어, 그 형상과 의미가 작품 안팎을 노니는 감상자에 의해 시시각각 달라지도록 제시된다. 이는 가스통 바슐라르(Gaston Bachelard)가 말하는 우주의 ‘역동적인(dynamique) 이미지’, 즉 중심과 바깥, 대지와 하늘, 열매와 뿌리 간의 쌍방향적인 흐름을 가능하게 하는 우주의 형상과도 맞닿아 있는 것이다.
 
신옥주는 1988년에 심장 옆에 생긴 혹을 수술하다 얻은 후유증으로 오른팔을 잘 못쓰게 되며 수년 간 작업에 들지 못하는 불운을 겪었다. 결국 작업실을 정리하고 1993년에 담양으로 내려갔는데, 그곳에서 산천초목의 넉넉함을 마주하고 이를 작업에 녹여내며 비로소 조각가로 복귀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로부터 십여 년이 지난 2008년, 신옥주는 그의 스승이자 한국 근대 조각의 대부를 기리는 김종영미술관에서 오늘의 작가상 수상 전시회를 개최하고, 그가 수십 년간 일군 ‘지혜의 문’ 연작을 펼쳐 보였다. 당시 촬영된 한 언론 인터뷰 사진에서 그는 밝게 미소 짓고 있었다.
 
살펴본 바와 같이, 신옥주는 모더니즘 기류로 조각 재료와 기법이 다변화된 1970년대 작업을 시작하여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독자적인 작품세계를 구축하고 있다. 그는 철판이라는 정태적이고 견고한 물질을 구부러진 면과 비정형적인 선, 빈 공간으로 변형시키면서도 철 자체가 가지는 자연적인 물성을 거스르지 않았다. 오히려 용융과 응고, 유동과 고정, 탄성과 소성 등 철에 내재된 대비되는 성질을 도출하여 그 사이를 진동하는 역동적인 이미지를 창출했다. 이러한 원료의 잠재성뿐만 아니라 물질과 신체, 물질과 자연 등 작품 안팎의 서로 다른 지점들을 탄력적으로 상호작용하게 하여 작업을 확장시켰다. 물질문명의 산물인 강철을 끊임없이 끌어오되, 이에 부드러움을 이입하여 물질문명이 야기한 시대적 한계에 역으로 맞서고자 하였다. 이와 같은 외강내유의 힘을 가진 신옥주 작업은 한국 근현대미술사에 일련의 입체감을 부여한 점에서 의의가 있을 것이다.



장예란(1988∼), 이화여대 대학원 미술사학과 석사, 현재 PKM 갤러리 전시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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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옥주, <태어남>, 1977, 철판, 49×26×28cm




신옥주, <드로잉>, 1980, 철판, 90×100×60cm 




신옥주, <지평에서-관악 I>, 1987, 철판, 177×120×121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신옥주, <지혜의 문>, 1997, 철판, 215×264×202cm




신옥주, 명성산업에서의 작업 전경, 2007년 9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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