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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답을 찾는 여정: 진옥선의 회화 | 박선주

현대미술포럼





답을 찾는 여정: 진옥선의 회화



진옥선(1950~)은 육면체를 반복적으로 배열하여 화면 전체를 패턴화한 특유의 회화로 잘 알려져 있는 작가이다. 그는 50여 년에 걸쳐 ‘답’이라는 일관된 제목으로 이 작업을 수행해오고 있다. ‘답’ 연작으로 단색화 그룹의 형성 초기부터 주요 전시에 이름을 올렸던 그는 단색화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작가로서 평가되고 있다. 그러나 잦은 호명에도 불구하고, 진옥선의 작업은 거의 연구된 바가 없다. 필자는 ‘육면체’라는 단일한 조형 어휘와 ‘답’이라는 하나의 단어로 수렴된 그의 작품에 실상 다양한 층위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고 판단하고, 이 글을 통해 살펴보고자 한다. 작업의 시작점과 전개 과정, 그리고 당대 화단과의 관계 속에서 그의 미술사적 위치를 가늠해볼 수 있을 것이다. 

1970년대 초 홍익대학교 회화과에 재학 중이었던 진옥선은 당시 미술계의 전위적 실험 열기에 경도된다. 그중에서도 새로운 조형 의식의 전개와 이론적 탐구를 주도한 ‘한국 아방가르드 협회(AG)’의 협회지와 전시를 통해 개념미술을 접하고 이에 자극을 받았다. 특히, 진옥선의 대학원 지도 교수였던 이일(1932~1997)의 ‘환원’을 핵심 개념으로 하는 추상 회화론과 산업화 시대의 미의식에 관한 담론은 이후 진옥선이 회화를 대하는 태도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전위적 그룹 활동에 고무되었던 진옥선은 64~68학번 선배들이 결성하여 활동 중이었던 ‘에스쁘리’ 동인에 찾아가 가입을 요청했고, 1973년부터 유일한 여성 작가로서 그룹에 합류하게 된다. 1) 노재승, 김용익, 전국광 등으로 구성된 ‘에스쁘리’는 특정한 예술적 목표를 지향하기보다는 각자의 작업 토대를 다지기 위해 함께 모여 이론 공부를 하거나 외부로 나가 해프닝을 진행하는 등 자유로운 분위기로 운영되었다. 진옥선은 ‘에스쁘리’ 그룹전을 통해 작품을 선보임으로써 비교적 어린 나이에 화단에 진입할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1973년 《에스쁘리 3회전》에 출품했던 <Answer 73-H>는 ‘답’ 연작의 출발을 알리는 작품이다. 이후에도 진옥선의 작업이 유사한 형식과 동일한 제목으로 제작되었음을 감안하면, 그의 예술세계 전반을 파악하는 데 있어 중요한 단서가 되는 작품임에 틀림없다. 1974년에 제작한 <답 74-J>는 2) 100호 크기의 캔버스에 윗면이 절반쯤 열린 육면체 상자를 가득 그려 넣은 작품이다. 흰 바탕면에 검은색 선으로만 형태를 묘사하고, 색채의 사용이나 손의 흔적 등 다른 회화적 표현 요소들을 배제함으로써 작품의 구조와 개념만을 명확히 드러내고 있다. 이를 위해 진옥선은 캔버스 천에 유채 물감을 여러 번 칠해 표면을 거의 유리면과 같이 매끈하게 공들여 처리한 후, 그 위에 자를 대고 육면체의 윤곽선을 하나하나 반복해서 그려나가는 방식으로 작품을 제작했다. 유채 물감은 잘 마르지 않기 때문에 선을 한번 그리고 마를 때까지 기다렸다가 다시 그리기를 반복해야 했다. 진옥선이 이 작품들을 발표하며 화단에 데뷔한 시기가 단색조 회화의 백색 미학이 공식화되기 직전이라는 점은 매우 유의미한 사실이다.    

1972년부터 ‘답’ 연작을 시작한 진옥선은 윗면이 닫힌 육면체나 윗면 없이 내부가 들여다 보이는 육면체 등 작업의 기본 어휘인 ‘육면체’의 형태만 조금씩 변경하면서 일련의 작품들을 계속 제작했다. 당시 학부생이었던 진옥선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근원적인 고민에 잠겨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보스니아 문학가인 이보 안드리치(Ivo Andric)의 소설 『드리나 강의 다리(Na Drini ćuprija)』(1945)를 읽고, 거대한 우주의 역사 안에서 인간은 한낱 모래알과 같은 존재라는 생각에 이른다. 실존적 사유의 끝에서 그는 평범한 인간, 하나가 아닌 다수의 인간 군상을 떠올렸고, 작고 단순한, 그리고 평범한 ‘육면체’를 화면 가득 그리기 시작했다. 3) 재현보다는 추상의 방법을 선택한 것이다. 무수히 많은 육면체를 서로의 관계를 고려하면서 반복해 그려나가는 수행적 과정은 그에게 인생의 ‘답’을 찾아 가는 여정과도 같았다. 

진옥선의 작품은 화단에 시각적으로 신선한 충격을 주었으며, 곧바로 세(勢)를 확장하고 있던 단색화 집단의 이목을 끌었다. 무채색의 화면과 반복적 수행이라는 측면에서 단색화 미학과 유사한 지점이 있었던 것이다. 그는 단색화 운동을 주도한 박서보가 관여하고 있었던 다수의 단체전에 초청되었다. 1974년 한 해에만 《제1회 서울비엔날레》, 《제1회 대구현대미술제》, 《제2회 앙데팡당》 등에 참가했으며, 《에꼴 드 서울》전에는 1회를 제외하고 거의 매년 출품했다. 1975년 《제7회 까뉴 국제회화제》에서는 이승조, 이향미 등과 함께 국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또한 1977년 도쿄 센트럴미술관에서 열린 《한국 현대미술의 단면》전을 시작으로 단색화 작가들이 중심이 된 해외 전시에 꾸준히 참여했다. 4) 1978년에는 《제5회 한국미술대상전》에서 대상을 수상함으로써 단색화의 역사 속에 여성 작가로서는 드물게 그 존재를 각인시켰다. 신진 작가였던 진옥선은 단색화 경향의 부상과 더불어 활약하며, ‘70년대의 작가들’ 중 한명으로서 국내 미술계의 중심부에 안착하게 된다. 

1970년대 진옥선의 전형적인 양식을 보여주는 <답>(1978)을 통해 그의 작업에 담긴 다양한 맥락과 의미를 조금 더 읽어내고자 한다. 우선 단색화의 주역들과 진옥선의 세대 차이에 주목해야 한다. 살펴 보았듯이 그의 회화는 형식상 색채를 거의 사용하지 않고, 육면체라는 하나의 소재를 반복하여 패턴화함으로써 올오버(all-over)의 화면으로 평면성을 강조한다. 이러한 연유로 그는 통상 단색화 작가로 분류되었다. 그러나 단색화를 통해 ‘한국적 모더니즘’을 정립하고자 한 앵포르멜 세대, 4.19 세대와는 분명히 다른 지점에 위치한다. 그는 물성의 실험, 물아일체(物我一體)의 수행성, 전통의 재해석 등 선배 추상 작가들이 한국적 오리지널리티(originality)의 획득을 위해 천착했던 방식에는 흥미를 두지 않았다. 진옥선은 오히려 명확한 윤곽선으로 규정된 3차원의 형태를 캔버스 평면 위에 펼쳐 놓음으로써 구상과 추상, 3차원의 환영과 2차원 평면의 문제와 같이 합의될 수 없는 조형 요소 간의 긴장 관계를 집요하게 탐구하고 있다. 선배들이 주장한 ‘무작위성’과는 다른 감성으로 철저하게 통제된 조건 하에서의 ‘작위’를 통해 조형적 실험을 추구한 것이다. 5) 주목할 점은 진옥선이 수직, 수평의 그리드나 캔버스의 틀과 같은 기하학적 질서에 따라 육면체를 배치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내가 긋는 선은 언제나 ‘전체’와 ‘부분’의 일정한 상관관계 속에서 하나의 입방체를 만들어 내고 그 입방체들은 하나의 집단을 만들며 화면을 규정짓게 한다”
(1981년 개인전, 작가의 말)

위의 언급처럼 육면체들은 작가의 주관에 따라 자의적으로 배치되는데, 선과 선, 면과 면이 마주치면서 발생하는 관계가 바로 작품의 핵심 주제이다. 인간 군상처럼 어떠한 육면체도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으며 서로의 관계 속에서 비로소 그 의미가 명확해진다. 앵포르멜에서 기하학적 추상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추상 실험 끝에 단색화의 이론적 기반을 다듬어간 위 세대와 달리 진옥선은 그들의 영향 안에서, 그러나 그들을 빗겨나가며 차별점을 만들어냈던 것이다. 

1970년대 후반부터 진옥선은 기법 모색에 몰두하는데, 특히 판화에 집중한다. 방법의 변화 양상은 1980년대 들어 1~2년 간격으로 개최한 개인전을 통해 잘 드러난다. <답 82-C>(1982)는 두 번째 개인전(1983) 출품작으로, 실크 스크린 기법으로 제작되었다. 진옥선은 캔버스와 동일한 크기의 실크 스크린에 본을 뜬 다음 그 뒷면에서 앞으로 물감을 밀어내는 방식을 썼다. 이렇게 하면 천을 뚫고 나온 아주 얇은 두께의 물감이 부조처럼 표면 위에 맺혀 물리적 현존인 동시에 시각적 일루전(illusion)이 되는 육면체의 패턴을 만들게 된다. 완성된 작품은 제작 방식을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독특한 외양을 보여준다. 이 시기 진옥선은 매끈한 표면 처리를 통해 ‘손의 흔적’을 제거했던 이전의 작업에서 더 나아가 실크 스크린, 에칭 등 판화의 ‘기계적인 방식’으로 작품의 개념을 명확히 하고자 했다. 그는 1979년 《제11회 동경국제판화비엔날레》에서 <답 79>(1979)로 일본 외무대신상을, 1980년 《제1회 공간국제판화비엔날레》에서 우수상을 수상하는 등 작품의 완성도 측면에서도 인정을 받았다. 1986년 개최한 개인전에서는 판화 작품으로만 전시를 구성할 정도로 해당 매체에 대한 애정을 보였다. 

한편 판화 작업은 진옥선에게 다양한 색채의 도입과 공이 덜 드는 제작 방식으로의 길을 열어주었다. 매체의 특성상 색을 자유롭게 적용하는 것이 용이했기에 자연스레 흑백 주조의 화면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 것이다. 또한 캔버스에 밑칠을 하지 않고 그대로 작업하거나 유채 물감이 아닌 아크릴 물감, 기계 스프레이를 사용하는 등 회화의 경우에서도 방법적 변화가 일어났다. 이전에 비해 수행의 무게를 덜어낸 방식은 서구 미술에 대한 대안으로서 회화에서 ‘신체’를 강조하고, 무한 반복적인 행위를 동양의 사의적 태도로 유비시켰던 단색화의 지향점과는 정반대의 것이었다. 주류에 편승하지 않고 자신만의 논리를 구축해간 작가의 면모를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1980년대 전반에 걸쳐 새로운 기법으로의 확장을 시도한 진옥선은 1980년대 후반 무렵부터는 본인의 틀을 흔드는 작업을 선보였다. 20년 동안의 화업 이후 원점으로 돌아가 자신이 규정했던 기존의 조건들을 재검토하고, 회화의 본질에 관한 답을 찾아 나선 것이다. 이 시기 작품의 외양에서 비교적 뚜렷한 변화가 감지되는데, 화면 구조의 변화와 표현적 요소의 도입이 가장 두드러진다. <답 90-X>(1990)는 엄격한 직선에서 벗어나 손 떨림이 그대로 드러나는 미세하게 흔들린 선으로 육면체를 그려 넣은 작품이다. 같은 시기 제작된 다른 작업들도 변화의 양상을 보인다. 캔버스 바탕 면이 단일한 색면에서 벗어나 두 가지 이상의 색 조합으로 구성되기도 하였으며, 이 경우 바탕의 색상에 따라 육면체의 선과 색채, 크기가 다르게 표현되었다. 색면과 육면체가 상호 작용하는 역학 구조를 통해 화면 안에서 시각적 공간을 탐구한 것이다. 

<답 95-F>(1995)에서는 육면체의 각 면에 색을 채워 넣음으로써 ‘육면체 면=캔버스 바탕 면’이라는 기존의 공식을 깨뜨리고 있다. 각기 다른 비율로 채색된 면은 화면 전체적으로 보면 그라데이션 효과처럼 공간적 깊이를 창출하며 화면 전체가 시각적으로 진동하도록 만든다. 작가는 관객이 회화의 평면성과 3차원의 착시 사이를 오가며 작품을 감상하게끔 이끌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시도는 회화의 근본적 특성에 관한 물음에서 비롯된 것으로, 엄격히 통제되었던 그의 이전 작품 세계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했다. 1990년대에 들어 시각적 일루전이 진옥선의 작품 주제로 전면에 등장했고, <답>(2010)에서와 같이 이후의 작업에서도 지속되고 있다. 작가의 흔적을 드러내는 작은 육면체는 평범한 인간 군상에 대한 은유이면서, 동시에 3차원의 현실과 2차원의 평면으로 연결되는 회화의 전제 조건이자 모순점에 대한 유비이기도 했음을 알 수 있다. 

이렇듯 진옥선에게 작업은 삶의 답을 찾아가는 여정이자 회화의 본질을 탐구해가는 노정이었다. 그 과정에서 ‘육면체’는 질문이자 답으로서 다채롭게 변주되며 작업 안에서 다양한 의미를 구현해냈다. 진옥선의 작품에 내포된 복합적 특성은 시대의 필요에 맞게 해석되었는데, 그는 주류 화단의 부름을 받기도 하고 혹은 그 주변에 머물기도 했다. 그러나 50여년 동안 단 하나의 연작에 몰두하며 그가 추상 회화에서 이룬 독자적인 성취는 시대를 넘어선다. 화단의 중심과 바깥 모두에서, 화려한 언사나 언어의 정치 없이 묵묵히 예술의 여정을 이어온 진옥선은 지금까지의 질문들을 정리하는 작업을 진행 중이다. 그가 보여줄 또 다른 답은 무엇일지 기대해본다. 



박선주(1985~), 이화여대 대학원 미술사학과 석사, 현재 국립현대미술관 소장품자료관리과 학예보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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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진옥선과의 인터뷰, 2021년 6월 29일, 성남시 궁내동.

2) 에스쁘리 3회전(1973)에 출품되었던 <Answer 73-H>(1973)는 현재 작품이 전해지지 않으며, 전시 리플릿에는 작품의 세부 이미지만 실려 있다. 이러한 연유로 1974년에 제작한 거의 동일한 형태의 다른 작품으로 설명을 이어가고자 한다. 

3) “나의 화면은 어느 부분, 어느 시점에서건 가장 평범한 입방체뿐이며, 그들은 항상 전체 화면의 평등한 구조물로서 존재하고 그들은 오히려 서로에게 그러한 ‘평범’을 떠맡기고 있다” 작가의 말, 《진옥선 개인전》 도록, 1981, 진화랑.

4) 후쿠오카 시립미술관(福岡市立美術館)에서 열린 《아시아 현대미술전》(1980), 교토시립미술관에서 열린 《한국현대미술의 위상전》(1982), 도쿄도미술관 등 일본 5개 도시 미술관을 순회한 《한국현대미술전: 70년대 후반 하나의 양상》전(1983) 등 다수의 전시에 참여했다.

5) 이일, 「1978: 한국현대회화의 새로운 지평·13인의 새얼굴–13명의 젊은 화가를 선정하면서」, 『이일 앤솔로지(상)』, 미진사, 2013, p. 481.





진옥선, <답 74-J>, 1974, 캔버스에 유채, 130×162cm




진옥선, <답>, 1978, 캔버스에 유채, 130×162cm




진옥선, <답 82-C>, 1982, 실크에 유채, 112×150cm




진옥선, <답 90-X>, 1990, 캔버스에 아크릴, 45.5×53cm




진옥선, <답>, 2010, 캔버스에 유채, 130×162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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