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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노원희의 ‘그림’: 기록과 발언으로서의 의미 | 이설희

현대미술포럼




노원희의 ‘그림’: 기록과 발언으로서의 의미 



노원희(1948∼)는 잘 알려진 대로 ‘현실과 발언’에 참여한 몇 안 되는 여성미술가이다. 1) 1980년대 미술을 견인한 그룹 ‘현실과 발언’은 당대 사회와 긴밀한 관계 속에서 예술 활동을 전개하는 것을 기본적인 목표로 설정하여, 미술의 사회적 맥락을 밝히고 그 역할을 모색했다. ‘현실과 발언’과 공동의 사회‧정치적 현실인식을 가진 노원희는 삶과 괴리된 예술을 삶 속에 위치시키기 위해 동시대 현실과 관계 있는 작품을 선보여 왔다. 많은 민중미술가들 중 특히 노원희를 주목하는 것은 사회 속 삶의 모습을 살피는 시각이 여성으로서의 ‘시선’까지 확장되며, 이런 ‘시선’이 사회 이면을 더욱 풍부하게 바라볼 수 있는 관점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노원희가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을 다녔던 1960년대 후반과 1970년대 초는 국내에서 앵포르멜 미술이 하나의 정형으로 자리잡게 되면서, 다른 한편에서는 기하학적 추상과 실험, 행위미술이 활발히 이루어지던 시기였다. 또한 민족주의적 성향이 강한 사회 분위기 속에서 단색조 회화가 부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노원희의 그림이 이 시기 미술계의 사조와 다르게 형상 위주의 화풍을 보이는 것은 당대 사회 현실을 인식했던 작가의 개인적 경험에서 기인한 것으로 알 수 있다.

작가는 1960년대 후반 학부 시절 대학신문사에서 기자로 활동하면서 시대적 상황과 사회‧정치적 현실에 자연스럽게 관심을 갖게 된다. 1973년 서울대학교 대학원을 졸업하고 대구로 귀향하였을 때도 사회 현상에 대한 작가의 인식은 이어졌다. 특히 지방에서 강의를 하며 만난 야학, 운동권 학생들과 『창작과 비평』과 같은 참여문학에 게재된 글이나 사회 비평 전반에 관한 글을 읽으면서 노원희는 현실인식을 더욱 구체화하였다. 이러한 경험이 그에게 보이지 않는 권력과 폭력이 지배하는 사회 뿐만 아니라 힘 없고 몫 없는 자들의 위치에서 세상을 일깨우는 결정적인 동기를 제공한 것이다. 이를 계기로 그의 화면은 이전까지 나타났던 추상적 요소들이 점차 사라지고 작가가 주변을 살피며 관망한 사람들과 삶의 모습으로 가시화된다.   

일례로 노원희의 1980년작들은 한국 사회 속에 뿌리내린 권위의 표상으로서 가부장인 ‘남성’을 무기력한 모습으로 시각화하는데, 이는 당시 변화하는 사회상을 직시하게 한다. <골목 1>(1980), <관망>(1980), <창>(1980), <거리에서>(1980)가 그 예로, 자잔한 얼룩과 빛바랜 색채로 화면이 전반적으로 퇴색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림자의 어둠이 곧 도시를 삼킬 것 같은 장면으로 표현된 <골목 1>은 달동네로 쫓겨 다니는 사람들의 초라한 삶을 그린 것이다. 노원희의 그림에 자주 등장하는 남성의 뒷모습은 이들이 처한 삶의 무게를 더욱 무겁게 강조한다. 한편 낙후된 도시 골목의 모습을 그린 <창>에 나타나는 남성은 수공업소의 근로자이다. 작가는 일터에 들어가지 않은 무표정한 근로자를 통해 소속감을 상실한 도시 빈민의 모습을 구체화했다. 이 그림들은 경제 발전이 도시의 슬럼화를 가속시켜 사회 전반적으로 불균형한 구조를 양산한 도시의 현실을 작가 특유의 서정성을 살려 재현한 예다. 

같은 시기 작품 <거리에서>는 노원희가 카메라로 일상의 사건을 기록하고 수집한 이미지를 바탕으로 제작한 그림이다. 비어 있는 한낮의 거리에 중년 남성들이 야바위꾼을 둘러싸고 모여선 것을 볼 수 있는데, 낡은 것처럼 보이도록 처리된 화면의 효과가 을씨년스럽고 측은한 정서를 더욱 고조시킨다. 화면 전체에 흐릿한 막이 씌워진 듯한 모습은 오랜 시간의 퇴적을 암시하는 요소이며, 작품이 전달하는 이와 같은 분위기는 당시 사회상을 바라보는 작가의 정서를 반영한다. 한 가정의 가장인 평범한 중년 남성들이 거리에 무리지어 배회하고 있는 점과 구경을 그만두고 떠나는 남성의 힘 없는 뒷모습이 알려주는 것은 이들이 실업자일 가능성을 시사한다. 이러한 국면은 1980년대 단기 압축식으로 진행된 산업화와 경제성장으로 해결되지 못한 빈부의 격차, 부의 편재, 노동시장의 불균형, 저임금 노동자 양산과 같은 시대 상황을 환기시킨다. 

대구로 귀향했던 노원희는 서울의 문헌화랑(1977)과 관훈갤러리(1980)에서 개인전을 개최한 후 1982년에 부산의 동의대학교 교수로 부임했다. 부산과 대구를 오가며 교직 생활과 가사를 병행했던 그에게 이 시기는 한 아이의 어머니로서 가정을 돌보는 일뿐만 아니라 대외적으로 학내와 정부의 탄압이 극심해져 현실의 무거움이 커져가던 때였다. 정치적으로 이 시기는 1980년에 발생한 광주민주화운동의 여파로 신군부에 의한 감시와 탄압이 극에 달하고, 지속되는 통제와 억압으로 엄혹한 때였다. 

노원희는 이같은 시대 분위기 속에서 부당하게 결처된 사건을 바로잡는 발언을 이어나갔다. 그는 1986년 재직 중인 대학에서 시국 선언에 참여하여 동료 교수의 해직 철회와 학원민주화를 요구하면서 단식 농성에 들어갔다. 하지만 그에게 돌아온 현실은 가혹했는데, 시국 선언에 가담한 것이 빌미가 되어 예정된 학내 갤러리 개인전이 취소되기도 한 것이다. 이 후 동의대  5‧3 사건(1989) 발생으로 공안 정국이 조성되어 휴교 조치가 내려지고, 학교민주화 활동도 움츠러들게 되었다. 

이 시기 제작된 여러 작품에서 사회‧정치적 상황을 표상하는 이미지들이 출몰하는 것은 작가가 소통을 강화하고자 작품 속에 내러티브를 도입한 결과물과도 같다. 이전 작품들이 삶의 저변과 이면을 주로 암시적인 어법으로 시각화시켜 정서의 환기를 특징으로 하였다면 이 시기 그림들은 직접적인 메시지를 통해 현실인식을 구체화하고자 한 것이다. <골목 2>(1989), <총 이야기>(1989), <피곤>(1989), <아이 2>(1990) 등에서 그 특성이 두드러지는데, 공통적으로 이 작품에서는 마을 구석까지 침투한 공권력의 모습을 통해 어두운 시대적 상황을 보여준다. 

<아이 2>의 화면은 단순하게 묘사된 집들을 배경으로 무장한 경찰과 투쟁하는 학생, 그리고 물고문으로 사망한 박종철(1965~1987) 열사의 영정 이미지를 드러낸다. 축소된 크기의 무채색 사람 형상과 더불어 관람객을 응시하는 아이의 모습은 일상의 위협을 느낀 힘 없는 존재로 대변되며, 불안의 상징과도 다름이 없다. 노원희는 민주화 이룩 후에도 여전히 폭압을 자행하며 시민들의 일상을 규정하는 지배 권력에 대해 직접적으로 비판을 가하고자 삶의 경계 내에서 벌어지고 있는 시대상황을 수면 위로 떠올린 것이다.  

한편 작가는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중반까지 ‘집’을 화두로 작업에 정진한다. 이 시기 제작된 여러 점의 작품에서 땅과 집, 그리고 나무가 구체적인 형상으로 묘사되고 있으며, 이들이 내러티브를 만들어내는 가운데 이전보다 여성이 처한 상황을 바라보는 작가의 관점이 눈에 띈다. 노원희가 집에 대해 집중적으로 천착하기 시작한 1990년대 한국은 후기자본주의 사회로 접어들면서 재개발과 아파트 단지 조성 열풍이 전국적으로 번지고 있었다. 이와 같은 신도시 건설은 삶의 터전으로서의 집이 전통적인 가치에서 벗어나 투자의 대상으로서 경제와 자본, 이윤이 우선시되는 목적물로 치환되는 현상을 낳았다. 즉 후기자본주의 시대에 자본의 논리가 일상을 잠식하는 상황이 연출된 것이다.     

‘집’은 “역사적인 풍경 속에 둘러싸여 우리의 삶이 영위되는 곳”이라고 말한 노원희에게 그 곳은 주거의 공간이면서 우리들이 살아가는 삶과 일상이 이루어지는 공간이자 역사가 기록되는 장소이다. 그는 이러한 집을 이야기의 구심점으로 삼아 도시화가 야기한 가족 구성원의 해체, 이주, 소외 등으로 이야기를 확장시켜 인간관계의 변화 및 그에 따른 정체성의 문제, 삶의 양극화 현상을 드러냈다. 따라서 작가의 화면에 나타나는 집은 그 형상에 따라 다른 의미를 지니는데, 전통적인 형태의 기와집은 가족과 고향에 대한 향수와 연민의 정서를, 아파트는 고전적인 가족의 의미를 해체하며 가정 내 일상적인 갈등이 빚어지는 현실적인 장소로 표현된다.      

<울지 마세요>(2005)에 등장하는 여성은 아이를 업은 채 울면서 고개를 떨구고 어디론가 향하고 있으며, 그가 처한 자세한 상황을 알지 못하지만 그녀가 당대 어머니인 점은 알 수 있다. 그리고 스스로가 어머니인 여성 작가 노원희에게 이 화면 속 현실이 모성을 공감할 법한 모종의 감정을 양산한다는 사실을 추측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림의 제목은 마치 작가 혹은 관람객이 화면 속 여성에게 건네는, 연민과 안타까움이 섞인 일종의 위로처럼 들린다. 비슷한 색감으로 그려진 나무와 건조한 아파트 풍경은 스산하고 쓸쓸한 분위기를 한층 더 고조시킨다. 

아울러 <부부싸움>(2005)에서는 젠더간의 힘의 관계를 통해 여성이 처한 위치를 보여주는데, 이 작품은 제목 그대로 부부싸움을 한 커플의 모습을 담고 있다. 등지고 있는 남성의 자세는 아직 감정의 앙금이 가시지 않았음을 암시하고, 쪼그리고 앉아 울고 있는 여성은 비통을 가누지 못한 상황을 말해준다. 좌우에 상당히 대조적으로 묘사된 두 사람의 크기, 자세의 대비는 가정 내에서 이들의 힘이 불균형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현실을 드러낸다. 우는 여성 뒤에 위치한 금지를 알리는 표지판은 부부 사이에 있어서 더 이상 여성에게 이와 같은 권력 체계가 작동하지 않아야 함을 시사하는 일종의 경고 사인처럼 보인다.  

부산에서 퇴직 후 2013년 서울로 거처를 옮긴 노원희는 서울 시내 현장에서 크고 작은 사회적 사건들을 더욱 빈번히 경험하게 된다. 서울에서의 개인전 《얇은 땅 위에》(2019, 학고재갤러리)는 70대에 접어든 작가가 바라 본 여전히 불안하고 위태로운 우리 사회의 현실과 그 세상사의 모습을 캔버스에 옮겨 놓은 작품들을 소개했다. 특히 ‘여성’을 현실의 맥락 속에서 다양하게 의미화하고자 하는 노원희의 관점이 돋보였는데, 출품작 <포럼>(2017), <무기를 들고>(2018), <얇은 땅 위에>(2019), <오래된 살림살이 2>(2019) 등의 그림이 이를 말해준다. 

우뚝 서 있는 남성들의 모습이 나타나는 작품 <포럼>은 노원희가 어느 정치 포럼에 참석했을 때 남성 정치인만 모여있는 현장을 목격하고 그린 것이다. 형태의 확대 및 축소 기법으로 표현된 남성들은 다양한 크기와 포즈, 몸의 방향, 시점에 따라 구성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무대 위에 선 ‘남성의 집합’으로만 읽히는데, 직설적으로 이는 남성 중심으로 편재된 사회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여성이 전혀 등장하지 않는 이와 같은 화면은 역설적이게도, 여성의 자리가 없는 현실을 더욱 강조하는 기제로 작동하여 도리어 여성의 위치를 환기하도록 만들고 있는 것이다.  

노원희는 1970년대 여성주의 정치에서 핵심적 운동이었던 ‘가사노동에 대한 임금 캠페인’에 대해 언급한 적이 있다. 요점은 이 캠페인을 통해 자본주의 사회에서 부불(不拂) 운동으로서의 가사노동이 여성억압의 근본 원인인 것으로 드러났으며, 가사노동을 탈젠더화하는 길을 열었다는 것이다. 2) <무기를 들고>는 마치 이 운동의 현장을 상상하게 하는데, 무기로 대치된 프라이팬을 든 시위자들이 난잡하게 널부러진 살림살이와 폭력의 광경 앞에서 항의를 하고 있다. 쌓여있던 부엌 도구들이 무너진 것처럼 어수선하게 배치되어 있는 모습은 가사노동이 아직도 ‘여성의 일’로 간주되는 현실의 위태로움을 표현한 듯 하다. 배후에 서 있는 양복쟁이들은 눈 앞에 펼쳐진 폭력 행위를 방관하고 있어, 여성 시위자들은 이들에게 행동을 촉구하며 사회적 약자에게 가해지는 문제 해결을 요하고 있다. 노원희는 여성들의 공통된 경험을 ‘발언’하겠다는 의지를 부엌 도구인 ‘플라이팬’을 빌어 저항의 몸짓으로 시각화한 것이다.  

이처럼 노원희의 작품은 여성이 처한 모순된 사회 구조의 원인을 드러내기 위해 수면 위로 떠오른 여러 사건들, 예를 들어 남성이 여전히 지배적인 권력 지향적 사회 광경 혹은 타자로서 위치한 여성이 바라 본 현장을 담는다. 이는 중심으로 수렴되는 획일적 사고를 지양하며 주체로서의 여성의 발언을 이어나가는 실천과도 같다. 한편 노원희는 자신을 ‘페미니스트’라고 일컫기도 했는데, 그에게 페미니즘은 여성에게 말을 걸고 그들의 삶에 관해 질문하는 것과도 다름이 없다. “경험과 기억의 주체로서 여성이 자신의 삶에 대해 물을 기회가 주어진다면 여성은 모두 페미니스트”가 될 것이라는 그의 언급처럼 3) 그것은 여성이 배제되고 있는 현실에 답을 찾는 것이 아니라 누가 왜 배제되고 있는지를 묻는 그 태도, 즉 여성의 삶에 대해 물었던 바로 그 태도로 다른 다양한 삶에 대해 질문하는 것이다. 

소위 한국적 현대미술로 평가받는 민중미술, 특히 ‘현실과 발언’은 한국 미술계에서 비판적 현실주의 문법을 토대로 삶 속에서 미술이 작동하는 방식을 형상미술을 통해 알린 신호탄이었다. 특히 이들의 활동은 현실주의 이론을 바탕으로 미술계가 새로운 활로를 모색한 시기인 1989년에 등장한 미술비평연구회에 하나의 자양분을 공급한 점에서, 이들 작업이 이론계에 미친 영향 또한 간과할 수 없다. 또한 미술에서 ‘현실주의(realism)’가 차지하는 영역을 재고하였다는 점에서 이 후 리얼리즘 계열의 작업을 이어나가는 세대에 자양분을 남겼다고 할 수 있다. 이 그룹에서 활동했던 노원희는 민중미술가이기도 하지만 한 명의 여성미술가로서 그가 생각하는 현실의 ‘얇은 땅’에 발 딛고 바라 본 세상을 자신만의 조형 언어로 옮기기 위해 노력해왔다. 대중과의 소통을 과제로 삼았던 민중미술에 동참하면서도 다양한 관점으로 여성이 제기한 사회적 문제에 답변하고 책임질 수 있는 사회적 구조가 무엇인지 질문하며 열린 태도를 보여주었던 것이다.



이설희(1987~), 이화여대 대학원 미술사학과 석사, 전 부산비엔날레 전시팀장/서울시립미술관 학예연구사, 현재 독립 큐레이터/한국예술종합학교 겸임교수/현대미술포럼 출판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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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현실과 발언’은 1979년 9월에 4·19 혁명(1960) 20주년 기념전시를 조직하는 과정에서 평론가 원동석의 발의로 결성되었다. 역사적 사건에 부합하는 미술의 기능과 존재 방식, 미술가들의 역할에 대해 거론한 원동석의 발언은 동일한 의식을 가진 사람들을 집결시키는 원동력이 되었다. 창립 회원은 4명의 평론가(성완경, 윤범모, 원동석, 최민)와 12명의 미술가(김건희, 김용태, 김정헌, 노원희, 민정기, 백수남, 손장섭, 신경호, 심정수, 오윤, 임옥상, 주재환)로, 노원희는 당시 김용태(1946~2014)의 소개로 이 그룹에 참여할 수 있었다. 1990년 해체에 이르기까지 현실과 발언에서 활동했던 여성 미술가는 김건희, 김정희, 노원희이다.

2)《담담한 기록: 인간사, 세상살이, 그리고 사건》 전시도록, 2019, 포럼에이, p. 102.

3) 위의 도록, p. 70.
   


노원희, <거리에서>, 1980, 캔버스에 유채, 60.6x72.7cm 




노원희, <아이 2>, 1990, 캔버스에 아크릴, 65.2x53cm




노원희, <울지 마세요>, 2005, 캔버스에 아크릴, 116.7x90.9cm 


 

노원희, <포럼>, 2017, 캔버스에 아크릴, 유채, 130.3x162.1cm 




노원희, <무기를 들고>, 2018, 캔버스에 유채, 162.1x130.3cm(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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