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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선 위의 수행자, 김명숙 | 윤아영

현대미술포럼



선 위의 수행자, 김명숙 



청주 산막리의 작업실에서 작업에 몰두해온 김명숙(1960~)은 얇은 종이 위에 켜켜이 덧칠한 선들로 인간 실존에 대한 탐색의 여정을 깊이 새긴 작품들을 선보여 왔다. 1980년대 서양화과를 졸업한 그는 화업의 무게에 부담을 느껴 절필한 뒤 결혼과 함께 미국으로 떠났지만, 잠든 아기를 스케치하며 깊은 좌절과 우울감으로부터 벗어난 경험을 계기로 다시 화업의 길에 들어섰다. 귀국 후 1989년 국내 첫 개인전을 시작으로 꾸준히 활동을 이어온 김명숙은 한국 미술계가 단색화와 민중미술로 양분된 1980년대부터 여성주의 미술의 태동, X세대의 등장으로 새롭고 다채로운 문화코드가 형성된 1990년대, 그리고 광활한 디지털 공간으로 미술의 경계가 확장된 현재에 이르기까지 30여 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유행 사조나 양식에 편승하지 않은 채 고집스러울 만큼 일관된 작품세계를 구축해왔다. 

그의 작업과정에서 작품이란 언제나 미완의 상태로 지속되며 인간 내면의 심연을 탐색하는 수행의 장소로서 존재한다. 때문에 홀로 암중모색을 벌이는 김명숙의 작업에서 미술계의 흐름과 같은 외부의 파고는 철저히 배제되어왔다. 모든 것이 융합되며 빠르게 변모하는, 육체노동의 가치가 퇴색되어가는 현대사회에서 노동으로 점철된 지난한 작업을 통해 육체적 한계와 극복 의지, 인간 실존의 여정을 목도하게 하는 김명숙의 작업은 우리에게 깊은 울림을 선사한다.

김명숙의 작품은 숲, 인물, 동물, 심장 외에도 밀레의 <키질하는 사람(The Winnower)>(1847~48)과 같은 미술사적 도상이나 시지프스, 미노타오르스, 에우리디케와 같은 신화적 대상 등 다양한 소재들을 아우른다.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대상들이 그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일관된 분위기와 인간 실존의 모색이라는 하나의 주제를 주지한다는 점이다. 색채와 구조, 기법의 일관성을 유지하며, 주제가 끊임없이 순환되는 2~5미터에 이르는 대형 화폭에 색채를 제한적으로 사용하여 모노톤이 주조를 이루고 단조롭지만 대담한 구도를 취한다. 장식과 수사가 없는 화폭은 무수히 많은 선들로 구축된 밀도감으로 엄숙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여기에 집중된 빛의 표현으로 신비감이 고조된 거대한 화면은 보는 이를 압도한다.

김명숙이 오랜 세월 사용해온 경질의 재료들(종이, 파스텔, 크레파스, 목탄 등)은 그가 ‘일’ ‘공부’ ‘과제물’ ‘작품’이라는 사전적 의미로서의 ‘Work’를 지속하게끔 하는 매개체이다. 화면 가득 수없이 선을 긋고 지우는 작업 과정의 무수한 반복은 작가의 표현에 따르면 “밀레의 <키질하는 농부>에서 농부가 곡식 낱알이 빛 알갱이가 되고 키질이 무도가 되어갈 때까지 키질하듯” 대상의 정수를 파고드는 수행 과정을 가능케 하기 때문이다. 축적된 선으로 구축된 형상들은 외곽선이 불명확하고 밀도가 높아 바다 깊숙한 곳 물결로 일렁이는 화면을 보는 듯 축축하고 서늘한 느낌을 준다. 종이가 짓이겨지도록 수년에 걸쳐 지속되는 제작 과정은 작가 스스로 자신의 진액으로 그리는 듯했다고 표현할 만큼 고된 노동에 가깝다. 

그런데 여기서 괄목할 점은 이러한 작업 방식이 김명숙의 작품세계의 핵심과도 밀접하게 닿아 있다는 점이다. 그에게 ‘작업’이란 신성한 ‘일’이자 ‘노동’ ‘공부’ ‘과업’으로서 인간 내면의 심연을 향해 나아가는 노정을 의미하며, 동시에 ‘작품’은 완성의 기준에 부합한 결과물이 아닌 내면으로의 수행 장소이자 흔적으로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구원은 종교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일에 몰입하면서 이루어진다”는 작가의 서술이 방증하듯 그는 끊임없이 ‘작업’이라는 주어진 과업을 실천함으로써 자신의 실존을 탈환한다. ‘작업’을 수행하는 순간만이 존재의 의미를 확인할 수 있기에 결국 그림 그리기란 김명숙에게 스스로 존재를 가능케 하는 호흡이자 삶을 지속시키는 생리현상이라는 절대적 의미로 귀결된다. 이러한 철학은 노동으로 점철된 작업 방식 뿐만 아니라 작품 속 주제의식을 통해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다.

1989년 열린《Studies for Sisyphus》전에 등장한 거대한 자화상들에서 작가는 그리스 신화 속 굴러 내리는 거대한 돌을 산꼭대기에 올려놓는 영원한 형벌의 수행자 시지프스의 모습에 자신을 오버랩 시켰다. 육체적 한계를 지닌 인간의 실체를 목격하는 동시에 이를 극복하려는 의지로 존재의 의미를 획득하고, 나아가 ‘노동’에의 몰입이라는 통과의례를 통해서만 신의 은총인 열락(悅樂)의 경지에 이르게 된다는 믿음 위에서 시지프스와 작가는 동일한 운명에 처해있기 때문이다. 키질하는 농부, 괭이질 하는 농부, 자기보다 큰 땔감더미를 등에 진 소녀들의 모습에서 인간에게 주어진 노동의 멍에를 본 밀레의 작가적 태도를 다룬 밀레 공부 연작, 탈골된 어깨에 팔을 늘어트린 원숭이를 그린 <Painter, 화가>와 나무에 매달려 버티는 나무늘보를 그린 <Hanger, 견디는 자>, 시력을 상실한 채 땅굴을 파고드는 두더지를 그린 <Digger, 파고드는 자> 등 자신의 모습을 은유한 동물연작 <Unknown Workers>(2017~18) 또한 시지프스와 마찬가지로 작가의 변주된 자화상들이다. 

이러한 주제들은 각기 다른 것처럼 보이지만 공통적으로 인간의 다면성을 드러내는 매개체라 할 수 있다. 작가는 “카프카적 변신을 겪으며 들뢰즈적 탈주를 꿈꾸는 동물들(김명숙)”로부터 노동을 통해 한계를 극복하고 존재가치를 획득한 인간, 나아가 생명력으로 충만한 숲과 나무를 그림으로써 정신적 일체화를 이루며, 이를 통해 승화하려는 인간의 욕구를 그려내어 우리 내면에서 벌어지는 여러 상황들을 재현한다. 

동시에 작품 안팎에서는 몸과 정신의 일치가 부단히 시도된다. 그는 1999년《Going Under》전에서 선보인 “자신의 심연에로의 하강을 수행하는 인물(김명숙)” 연작과 2010년 《Work for Workers》전에서 선보인 미노타오르스 연작을 통해 카타바시스(katabasis)1)적 경험을 재현했으며, 2013년《영정》전에서는 “신의 모습이 아로새겨진 베로니카의 손수건 같은, 우연히 마주친 얼굴들(김명숙)” 연작을 선보였는데 이는 무수히 선을 그어가며 얼굴을 그리는 행위를 통해 그들의 궤적을 추적하고, 그들과의 교감과 일체화를 이루려는 시도로 이해될 수 있다. 2019년 열린《카타바시스》전에서 선보인 <작가만다라>(2013~18) 2) 연작 중 눈이 후벼 파진 <렘브란트 만다라> 또한 그리기를 통해 렘브란트의 눈을 정면으로 응시하고 그 정수에 닿고자 했던 작가의 처절하고 치열한 사투의 흔적이라 할 수 있다. 

작가가 탐구해온 인물, 동물, 미술사적 도상과 신화적 대상을 다룬 작업들이 끊임없이 인간의 내적 심연으로 침잠해가는 수행의 과정, 즉 하계로 향하는 ‘카타바시스’에 수렴하는 것이었다면 숲과 나무 그림들은 이러한 하강으로부터 상승국면으로의 전환을 의미한다. 

“어느 날 새벽 나무들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은 한결같은 모습으로 묵묵히 자신의 내면에 몰입함으로써 어느덧 누리게 된 충만함과 원광처럼 빛나는 무위의 침묵으로 내게 말을 걸어오고 있었다. 그들은 그 순간 내게 어떠한 수식도 거부한 채 자신의 고유한 상승과 하강의 존재방식을 내게 체험하도록 이끌었다고 나는 기억한다”
(작가의 말)

새벽 숲에서의 이러한 체험을 계기로 숲과 나무라는 소재에 천착해온 그는 숲 자체를 재현하기보다 정신적 체험과 이에 대한 수많은 단상들을 가시화한다. 여기서 작가에게 숲이란 영적 존재이자 신전을, 나무는 신성한 숲을 떠받치는 신전의 기둥이자 그의 표현에 따르면 “자신이 어떤 모습으로 타오르는지 알려 하지 않은 채 다만 하늘을 향한, 다만 심연을 향한 갈망으로 충만해하는 녹색 촛불”이다. 2019년의 《목림상(木林相)》 전시에 등장한 <벼락 맞은 나무> 연작은 수억 볼트의 전류가 관통하며 밀도가 극적으로 높아지는 물리적 변화를 겪은 나무들을 그린 것인데, 나무는 죽음에 가까운 고통스러운 과정을 통해 오랜 기간 사용할 수 있는 단단한 재료로 재탄생되며, 무속신앙에서는 이를 악귀를 물리치는 부적의 의미로도 여긴다. 즉, 나무는 하늘과 대지를 잇는 연결고리로써 신화적 상징물의 지위를 획득하게 되는 것이다. 

또한 나무는 부동의 한계를 극복하고 땅으로는 뿌리를, 하늘로는 가지를 뻗으며 씨앗을 날려 “생명(生命), 생(生)의 명(命)을 행하는 존재(김명숙)”이기에 그 나무들로 이루어진 숲은 작가에게 생명력으로 충만한 신전이나 다름없는 것으로 이해된다. 이러한 작가의 인식은 혈관처럼 뒤엉킨 가지들로 들어찬 자연에 대한 경외감을 불러일으키는 범신론적이고 장대한 숲 풍경으로 표현되며, 이 같은 숲 그리기 행위는 곧 스스로 나무이자 숲이 되고자 하는 승화의 의지를 반영한다.
 
한편 이는 그가 다루는 모든 대상들에도 동일하게 적용되는데, 2010년부터 천착해온 소재인 심장은 그의 언급대로 “내부의 황제로서 감정과 욕망을 다스리는, 신성으로 통하는 문”을 표상하는 것이다. 숲을 비롯한 그의 모든 주제들이 환유하는 소재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검붉게 타오르는 심장을 그리는 작업은 그 자체로 작가 스스로 숲을 떠받친 채 타오르는 녹색의 촛불이 되려는, 이로써 정신과 육체의 고통을 일치시키려는 행위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김명숙의 작품은 작가의 의식, 의지, 노동력, 욕구, 신화적 상상력, 충만한 생명력이 어우러진 혼돈의 에너지가 응축되고 활성화된 공간으로서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작가와 대상과의 강렬한 신화적 체험 속에서, 오직 그 대상 안에서 모든 에너지를 소모하고 그것 안에서 살면서 자신을 잃어가며 인간의 신체적, 정신적 원체험을 회복하려는 노력으로서 구축된 그의 작품이 전하는 울림들은 작가의 말처럼 '이미지나 예술의 역사가 아닌 도상학의 출발점으로서 고대 동굴벽화를 그리던 최초의 몸짓으로 되돌아가려는' 해석학으로 이해되어야 하지 않을까. 


윤아영(1986~), 이화여대 대학원 미술사학과 석사, 전 대림미술관 A.C 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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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카타바시스(katabasis): 내려감, 하강, 회복기
2) 만다라: 행자가 명상을 통하여 우주의 핵심과 합일하고자 하는 깨달음의 안내도




김명숙, <미노타오르스11>, 2008, 크레프트지에 먹물, 180x120cm




김명숙, <소년>, 2013, 장판지에 먹물, 95x75cm




김명숙, <카타바시스2>, 2014, 종이에 아크릴, 파스텔, 240x300cm




김명숙, <벼락 맞은 나무>, 1994, 종이에 아크릴, 파스텔, 234x320cm




김명숙, <심장>, 2008, 종이에 아크릴, 파스텔, 170x130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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