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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홍정희의 따뜻한 추상: 나와 세계의 경계에 서다 | 임수진

현대미술포럼



홍정희의 따뜻한 추상: 나와 세계의 경계에 서다



‘여성 화가로는 보기 드문 대작’ ‘여성답지 않은 정력적인 작업’ ‘여류화가답지 않은 스케일’. 홍정희(1945~)의 작품과 작업에 대한 2000년대 이전까지의 평가와 소개는 주로 그의 거대한 화폭과 대범한 화면구성, 그리고 왕성한 작업량에 대한 상찬으로 시작된다. 심지어 여성작가를 대상으로 한 석주미술상의 수상자(1995년 제7회)로 홍정희가 선정되었을 때 이유는 ‘여성답지 않는 정력적인 작품 활동, 개방적이고 자유분방한 색면 분할과 대비에 의한 회화세계를 일관되게 추구해온 점이 높이 평가된다’는 점에 있었다. 

여성작가(답지 않음)라는 수식어나 작품의 사이즈와 다작을 논하기에 앞서 홍정희의 예술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추상’이다. 그는 일간지 인터뷰나 에세이, 작가노트 등을 통해 회화의 자율성을 추구하는 모더니즘의 미학을 여러 차례 언급한 바 있으며, 그의 추상은 회화의 가장 순수한 언어중 하나인 색과 화면의 질감을 통해 존재로서의 자아와 그 자아가 맞닥뜨려야 할 세계, 그리고 다시 세계의 물적 존재를 구성하는 가장 최소화된 단위로 환원된다. 대형 화면에 강렬한 원색대비의 색면 분할과 동시에 행위가 강조되는 우연적인 효과, 안료의 물성이 드러나는 마티에르 등이 공존하는 형식적 특징은 그의 작업이 기하학적 추상과 앵포르멜의 이분법적 분류로 설명될 수 없음을 보여준다. 

그는 1967년 대학 재학시절 국전 입선을 시작으로 1970년대까지 수많은 국전과 공모전에서 수상을 했다. 또한 여러 단체전과 여류화가회전(1973~78년)에 참여했으며, 1973년 1회 개인전을 시작으로 거의 매년 개인전을 열며 작품 활동에 매진했다. 서울대 미대에서 수학하면서 당시 주류 미술의 한 흐름에서 벗어나지 않는 작업을 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미술운동을 전개한 특정 단체에 소속되지 않았던 것은 동시대의 대부분의 여성 미술가들의 활동과 크게 다르지 않는다. 

이는 작가로서 활발한 활동을 펼쳐야 할 시기에 결혼과 출산, 양육과 작업을 병행해야 했던 당시의 시대적인 분위기를 생각해보면 자연스러워 보인다. 특히 2년마다 지방으로 이사를 다니며 검사인 남편을 내조해야 했던 그에게 독립된 화실에서 오롯이 작업에 몰입하는 것은 그 자체로 현실과의 부단한 힘겨루기와 같았을 것이다. 화가에게 화실이라는 물리적 공간이 곧 자신의 예술, 세계관의 산실임은 비단 홍정희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겠지만, 초기부터 대작 위주의 작업을 주로 해왔던 그에게 화실은 각별한 의미를 지녔다. 신혼집의 구석구석에서 시간과 공간을 쪼개서 작업했던 그가 몇 년 만에 독립된 화실을 구하고 하루의 일정한 시간을 주부로서의 자아와 분리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는 것은 그의 화실이 자아를 찾는 여정, 화가로서의 세상으로 나아가는 첫 관문이자 자아와 예술세계가 응집된 소우주와 같았음을 알 수 있다. 

홍정희가 서울대 미술대학을 졸업하던 1969년은 1950년대 후반부터 일본을 통해 유입된 앵포르멜 미술이 좀 더 서정적인 성격을 보이면서 안정화 된 시기였다. 태생적으로 전후의 불안정한 정서 위에 기존 질서에 대한 대항적 성격을 지녔던 앵포르멜은 격정적 붓질, 우연성, 거친 화면의 요철 효과 등의 형식으로 표출되었다. 그러나 1960년대를 지나며 이러한 특징들은 온화하고 서정적이며 안정된 형식으로 변해갔고, 타성에 젖은 형식을 탈피하려는 시도에 의해 옵아트, 기하추상, 행위예술, 실험미술, 개념미술 등 다양하고 대안적인 양식들이 여러 집단을 중심으로 공존하게 되었다. 추상 회화는 여전히 미술의 주류를 형성하고 있었으나 새로운 미술로 국면이 전환되는 시기였다. 

이에 반해 홍정희는 졸업 이후 특정한 집단에 소속되지 않았으며 추상 회화만을 일관되게 유지했다. 한국의 앵포르멜 미술이 꽤 오랜 시간 동안 기존의 미술질서에 대한 반작용 혹은 사회적 격동기 속에서 작가정신을 표출한 것임에 반해 그의 추상은 시작부터 부단히 자신의 존재론적 인식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이는 지극히 개인적이고 내밀한 미적 충동, 자아에 대한 성찰과 회화의 본질에 대한 철학적 물음에서 출발한 것이다. 

그는 회화의 본질에 관한 사유와 함께 인간의 정신성이나 내면세계, 자아의 근원에 대한 철학적인 탐구를 놓지 않았으며 이러한 관심은 다수의 에세이나 작가노트를 통해 표출된 바 있다. 또한 그는 종종 개인의 삶에 대한 소회를 드러내기도 했는데, 전통적인 양반 가문 출신의 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은 문화적인 안목과 강인한 정신력, 긍지와 자부심 같은 것들이 치열한 현실과 시련 속에서도 작가로서의 삶을 놓지 않고 홍정희가 오랜 시간 추상이라는 작업 안에서 일관된 형식을 유지할 수 있었던 원천으로 보인다. 

동시대의 미술운동을 주도하던 단체에 속하지 않았으나 오히려 이러한 예술적 동기와 개인적인 활동이 흔들림 없이 지속적으로 자신의 정체를 구축하는 동력이 된 셈이다. 오직 캔버스만이 작가로서의 홍정희와 대면하며 관계를 맺는, 혹은 그가 바라보는 세계인 것이다. 예술을 대하는 이러한 태도는 다음의 언급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그는 그저 ‘난 이게 좋으니까’라는 간단한 한마디로, 50여년이 넘는 긴 시간동안 고수했던 일관된 형식에 관한 질문에 답을 했다. 또한 여러 단체들에 속하지 않고 독자적인 활동을 유지해 온 것에 대해서도 ‘화가가 그림만 그리면 되지, 그런게 뭐가 필요하냐’고 언급했다.1) 이 명쾌하고 단순한 그의 대답은 회화가 작품 안으로 수렴되는 추상미술의 개념을 있는 그대로 환기하는 것만 같다.

1981년까지 이어진 홍정희의 초기 작업인 <我-Myself>, <我-한국인> 연작은 ‘나’라는 인간적인 존재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과 동시에 캔버스로 수렴하는 회화 자체에 대한 깊은 사유이기도 했다. 겉껍질과 옹이, 결을 그대로 살린 나무판에 수성 안료를 사용하여 붉은색과 청록색의 보색을 대비시키거나, 생선뼈의 가루나 커피찌꺼기 등을 안료에 배합하여 우연성이 가미된 묘법으로 마티에르를 강조하는 작업은 단순히 화면의 물성을 드러내고자 하는 의도만은 아니었다. 당시 뉴욕에서 활동했던 미술 평론가이자 큐레이터인 제라드 맥카시는 그가 사용하는 ‘나무와 채료, 즉 자연과 문화의 작용이 한국의 추상화의 발전에 영향을 준 두 개의 요소, 즉 현대와 전통에 대한 이 작가의 반응을 제시해 준다’고 평하였다.2)  

<我-한국인> 연작은 두 가지 측면에서 한국적인 것에 대한 성찰이었다. 첫째, 서양화가로서 한국의 전통에 대한 인식이다. 당시 한국사회는 도시화와 산업화가 급격하게 진행되면서 사회 전반적인 분위기에 편승하여 예술계에서도 국제적인 흐름에 동참해야 한다는 한 축과, 그 안에서 우리의 전통과 민족성을 어떻게 정의해야하는가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던 시기였다. 특히 서구에서 일본을 통해 유입된 추상이 독창성이 없이 형식만을 모방한다는 비판에 대해, 모방은 불가피하지만 추상의 형식이 우리 미술의 표현 영역을 확대하고 예술적 자극이 된다는 견해가 맞섰다. 

이러한 맥락에서 홍정희 역시 추상에 대한 동시대의 담론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며 시대적인 미의식을 공유했음을 유추할 수 있다. 특히 나무의 결을 그대로 살림과 동시에 전통 단청에서 찾을 수 있는 적청의 대비를 과감하게 사용한 것은 색채를 통해 한국적인 미의 근원을 표현하고자 하는 시도로 보인다. 다양한 색채의 적극적인 사용은 특히 홍정희의 추상에서 가장 특징적인 요소이기도 한데 홍정희는 그의 에세이를 통해 ‘회화의 자율성이 색채의 존재성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표명된다’고 언급하며 색채가 가진 물질적 존재성을 강조한 바 있다. 

이러한 표현 방식은 1980년대 이후 <脫我> 연작을 통해 더욱 확장된다. <脫我> 연작에서 물질성이 더욱 강조되는 형식은 자신의 존재를 작품 안에 투영했던 것을 넘어 작품이 곧 자신의 존재 자체와 동일시되는 과정이다. 1987년 예화랑에서의 개인전 인터뷰에서 “과거의 <我> 시리즈가 내면적 구성의 밀도를 추구한 것이라면 <脫我> 시리즈는 나를 벗어나보려는 시도”라고 고백한 것은 사회로부터 규정된 ‘나’를 벗어나 오직 작품 그 자체로 존재함을 선언한 것이다. 이와 같은 시도는 더욱 거칠고 두터워진 마티에르와 과감한 색채의 선명한 대비로 나타났다. 특히 그의 작품의 상징적인 주조색인 붉은색이 다양하게 변주되고, 이물질이 섞여 들어가 팽창된 안료가 덧칠된 표면은 그 자체로 거대한 색면의 분할이며 구조화 된 공간이다. 홍정희는 이러한 방식을 통해 당시 소위 ‘한국적 앵포르멜’로 분류되는 형식, 이를테면 먹색을 사용한 동양적 필치를 드러내거나 캔버스 대신 한지 위에 어둡고 탁한 느낌의 색채를 중첩했던 형식과는 완전히 구분되는 길을 선택했다. 

1990년 이후의 작업은 더욱 거대해진 캔버스 위에 덧칠된 안료의 덩어리와 그것의 흘러내림, 붓질로 인해 구획된 자유로운 색면들이 그 물질성을 더욱 두드러지게 한다. 캔버스 자체를 즉물적으로 바라보게 함으로써 화면으로부터 주부, 엄마, 아내로서의 자신을 완전히 제거하고자 했으며, 나아가 작가적 존재로서 자신도 캔버스 뒤로 물러나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캔버스로부터 분리된 자아는 추상표현주의와 앵포르멜의 특성이 혼재하여 나타났던 한국의 앵포르멜 미술의 맥락 안에 있으면서도 동시에 차별화되는 지점이다. 캔버스와 작가가 일체되어 작가의 감정과 행위가 오롯이 화면으로 전이되는 현상이 아닌 일정 거리를 두고 마치 또 하나의 세계를 관조하듯 캔버스를 대하는 태도인 것이다.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까지 그의 화면은 더욱 대형화되는 한편 색면에 의한 공간 구성은 좀 더 단순화된다. 화면 안에서 다루어지는 색채도 모노톤으로 정리되거나, 두세 가지의 강렬한 색상만으로 캔버스와 안료가 접합되면서 만들어지는 우연성 혹은 긴장감을 살려낸 미니멀한 화면으로 수렴되는 것이다. <Passion> 연작은 불규칙한 요철이나 거친 마티에르가 좀 더 균질한 형식을 취하면서 일정한 패턴이 등장하며, 이후 <Nano> 연작으로 이행되는 과정을 보여주었다. <Nano> 연작은 2005년경부터 <Passion>에서 택했던 구성, 즉 패턴이 배열된 화면이 주를 이룬다. 나노는 아주 작다는 뜻의 그리스어로서 1나노미터는 10억분의 1을 나타내는 초미세 단위로 사용되는데, 이러한 물리적 단위개념을 작품에 들여온 계기에 대해 그는 여고 동창인 세계적인 물리학자 송진주 박사를 언급한다. 작가는 2000년대 중반 송박사의 특강을 인상 깊게 들었고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상태에 이르면 입자들이 뭉쳐 전혀 다른 새로운 무엇이 생겨나는 나노의 세계’에 대해 흥미를 느꼈다고 한다. 

이러한 물리학 개념과 예술의 접점을 기대하기 어려울 수도 있으나 홍정희는 회화의 가장 본질적인 속성을 조화, 대비, 대칭, 배열 등의 수학, 과학적 요소에서 착안하여 화면에 구성했다. 화면을 구성하는 모든 조형적 요소들은 존재로서의 자아에서 출발하여 세계를 이루는 가장 작은 단위로 환원된 것이다. 물감이 얇게 칠해진 캔버스 바탕에 삼각형, 오각형 혹은 방사형의 기호들 중 하나가 종횡을 맞춰 배열된다. 이 기호들은 이전까지 그의 작업방식과 같이 안료에 다양한 물질을 섞어 두텁고 거친 마티에르로 도드라지게 놓여 화면의 촉각적인 느낌을 강조한다. 일정하게 배열된 기호는 반복 속에서 차이를 만들며 증식하는데, 마치 산, 집 혹은 꽃 등의 풍경을 연상하게 한다. 개념으로 존재하는 가장 작은 단위인 나노가 거대한 풍경으로, 자연의 산물로 확장되는 것이다. 

<Nano> 연작은 특히 홍정희의 색채감각이 두드러지게 드러나는 작업이다. 단 두 가지의 색상으로 바탕과 기호를 구분하기 때문에 두 색이 가지는 조화나 긴장감이 강렬한 시각적 인상을 남긴다. 이들은 때로 강한 보색이 대비된 화면이거나 채도로만 구분되는 모노톤의 화면이기도 하고, 그가 가장 아름다운 색상의 조화라고 언급한 주홍과 분홍이 교차된 화면이기도 하다. 작가는 단순한 패턴의 배열과 작품마다 변주되는 무수한 색채를 통해 나노로 이루어진 세계를 생성하고 있으며, 이러한 다양한 색의 구사는 어린 시절 어머니로부터 보았던 색채 보자기, 한복, 원색의 민속 유물들의 미감과 색채를 환기한다. 

홍정희는 작가로서의 삶을 통해 자아를 찾아감과 동시에 회화의 본질을 사유하고 정립하는 긴 여정을 걸어왔다. 그리고 이러한 여정에 그는 추상으로 삶을 반추하고 세계를 대면하는 방식을 보여주었다. 그의 회화를 앵포르멜이나 색면추상 등의 정형화된 사조로 규정하는 것은 무의미 할지도 모른다. 홍정희의 작업은 한국 현대미술사의 출발이었던 앵포르멜 미술이 수많은 단체를 중심으로 생성되고 소멸되는 흐름 속에서, 묵묵히 독자적인 활동을 통해 50년이 넘는 긴 세월동안 독특하고 일관된 자신만의 형식을 구축하며 그 맥을 이어오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서사와 환영이 제거된 그의 캔버스에서 역설적으로 자아를 투영하고, 세상을 관조하며 치열한 삶의 궤적이 드러나는 세계를 본다.



임수진(1977~), 이화여대 대학원 미술사학과 석사, 엄미술관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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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홍정희와의 인터뷰, 2021년 10월 17일, 작가의 작업실.

2) 제라드 매카시, 『홍정희 Portfolio 2017-1967』, 2017, p. 132.




홍정희, <我-한국인>, 1978, 나무에 유채, 44×54cm




홍정희, <脫我>, 1990, 캔버스에 유채, 72.7×60.6cm




홍정희, <Passion>, 2003, 캔버스에 유채, 194×259cm




홍정희, <Nano>, 2015, 캔버스에 유채, 60×90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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