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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기억을 꿰어 만든 신경희의 작품세계 | 송윤지

현대미술포럼



기억을 꿰어 만든 신경희의 작품세계



신경희(1964~2017)는 서울대학교에서 서양화를 전공하고, 미국 필라델피아 템플대학교 타일러스쿨 오브 아트에서 판화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그가 회화와 판화를 자유롭게 구사하는 작가였다는 사실은 그의 작품 세계를 이해하는 근간이 된다. 회화의 조형 요소와 재료, 판화의 기법과 특성이 그의 작품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가 되기 때문이다. 여기에 또 하나를 더하자면 ‘퀼트(quilt)’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퀼트는 천을 조각낸 뒤 솜과 뒷감을 덧대어 누비는 것을 말한다. 우리나라 식으로 생각하면 조각보와 누빔 천을 만드는 방식을 섞은 것이라 하겠다. 신경희는 회화와 판화, 그리고 퀼트라는 수공예적 기법을 활용한 작업으로 자신만의 독특한 조형미를 선보였으며, 1995년 제1회 공산미술제 수상 작가로 선정되고 1997년에는 석남미술상을 수상하는 등 미술계의 주목을 받으며 활발하게 활동했다.

신경희의 작품은 ‘바탕’부터 달랐다. 그는 기존의 캔버스나 종이를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바탕재를 단순히 재료로 여기지 않고 그 자체로서 하나의 조형적인 요소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주로 종이를 직접 제작해 사용했다. 그가 만든 종이는 표면이 매끈한 것도, 깔끔하게 재단한 것도 아니었다. 테두리는 울퉁불퉁했으며, 색도 제각각이었다. 신경희는 그렇게 만든 종이들을 바느질로 연결해 큰 바탕을 만들기도 했다. 이는 회화의 재료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변형해 재창조하는 과정이었으며, 한편으론 퀼트에서 천을 이어 붙이는 패치워크(patchwork) 방식을 차용한 것이었다. 이처럼 종이를 직접 제작하고 하나 씩 바느질로 꿰는 과정은 신경희가 작품에 담고 싶었던 내용과도 일맥상통한다. 그는 주위를 면밀하게 관찰해 사소한 일상의 파편들을 수집하고, 그것을 작품 안으로 소환했다. 마치 일기를 쓰듯, 작품을 통해 기록하고 기억하고자 한 것이다. 

초기작에서는 기억의 대상이 대부분 사물이었다. 신경희는 포토에칭, 모노프린트, 실크스크린 등의 판화 기법을 활용해 사물의 이미지를 화면에 그대로 옮겼다. 그가 제시하는 사물들 모두 그의 기억에서 소환된 것이기에 개인적인 서사를 담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1991년 작업 <수영복 – 기억>에서처럼, 작품에 ‘기억’이라는 제목이 붙었음에도 그것이 어떤 내용인지 구체적으로 드러내지 않는다. 이는 신경희가 작품 안에서 이미지를 다루는 방식이 특정 장면을 회상하는 묘사가 아니라 사물의 병치에 그치기 때문이다. 그것이 주로 일상적인 공산품이라는 점에서도, 손으로 직접 그린 것이 아니라 찍어낸 이미지라는 점에서도, 그의 작품은 사적인 영역으로만 한정하기 어렵다. 관객들은 그의 작품 속 이미지에서 신경희의 이야기를 읽기보다 오히려 자신의 일화를 연상하는 것이 더 쉬울 것이다. 이로써 신경희의 작품 속 사물 이미지는 작가의 기억을 담은 표상인 동시에 관객에게는 기억의 매개가 된다.

1990년대 중반부터 시작된 ‘화해할 수 없는 난제들(Irreconcilable Difficulties)’ 시리즈에서도 ‘기억’이라는 키워드는 이어진다. 1995년의 <화해할 수 없는 난제들 – 기억>은 수제 종이 위에 철사를 꿰어 기하학적인 모양으로 ‘퀼팅(quilting)’한 작품이다. 작품 전체에 반복적으로 펼쳐진 기하학적인 모양은 얼핏 낙하산 또는 열기구 같기도 한데, 사실 이 모양은 작가가 어린 시절 즐겨했던 땅따먹기 놀이에서 착안한 것이다. 하지만 신경희는 작품의 바탕을 흙색이 아닌 흰색으로 표현했다. 공간 묘사가 없는 흰색 바탕 때문에 보기에 따라서 하늘에서 내려오는 낙하산이나 열기구로 볼 수도, 땅에 그려진 땅따먹기 선으로 볼 수도 있는 것이다. 

또 다른 <화해할 수 없는 난제들 – 기억>(1996)은 특정한 기억에 관한 단서를 던지는 게 아니라 ‘기억’이라는 관념을 추상적으로 표현한 작품으로 보인다. 신경희는 이 작품에서 수제 종이가 아닌 비닐을 바탕으로 사용했다. 그는 색칠한 비닐을 여러 겹으로 겹쳐 촘촘한 간격의 선으로 누비듯 박음질한 다음 그 위에 작은 솜 방울들을 매달았다. 일반적인 퀼트가 표면(천) 안에 솜을 넣어 꿰매는 것인 반면 이 작품은 퀼트의 기법을 따르면서도 안으로 들어가야 할 솜이 밖으로 튀어나온 형태를 취하고 있는 것이다. 가로로 길게 이어진 박음질 선들 위에 드문드문 얹어진 솜 방울들은 평이하게 흘러가는 일상 속에서 이따금 툭툭 튀어나오는 내면의 기억과 닮았다. 또한 신경희는 솜에 도료를 발라 단단하게 굳혀 사용함으로써 폭신한 솜의 본래 성질을 뒤틀기도 했다. 

1997년 작품 <화해할 수 없는 난제들 – 깊이>는 비닐을 바탕으로 제작한 거대한 퀼트 작품으로, 일정한 크기의 비닐에 실크스크린으로 검은 점들을 찍은 다음 몇 장 씩 겹쳐서 연결한 것이다. 점이 찍힌 위치가 저마다 다르기 때문에 작품의 가장 표면부터 한 층 씩 비닐의 레이어에 의한 깊이가 느껴진다. 비닐에 얇게 칠한 안료 덕분에 반투명하게 비쳐 보이는 점들은 레이어와 레이어 사이의 간격이 존재하는 것 같은 착시 효과를 준다. 이 작품은 추상 회화와 평면 회화는 동의어가 아님을 시사한다. 또한 추상 회화에서 깊이(레이어)는 평면의 표면 위로 쌓이는 것뿐만 아니라 아래쪽으로 침잠할 수도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이처럼 작품의 내용과 형식 모두에서 다층적인 해석이 가능하다는 것이 ‘화해할 수 없는 난제들’ 시리즈의 특징이기도 하다. 대립항 사이에서 갈등과 선택으로 고민하기보다 열린 결말로 내버려 두는 것이다. 이는 회피가 아니라 포용에 가깝다. 퀼트라는 스테레오타입의 여성적 기법을 활용하면서도 실이 아닌 철사를 사용하는 등 대범하게 형식파괴적 태도를 취하는 것, 지극히 사적인 기억들을 작품의 소재로 삼으면서도 그것이 철저하게 공적인 영역에서 다뤄질 수 있도록 거리두기를 유지하는 것 모두 신경희가 ‘화해할 수 없는 난제들’을 해결하는 방식이다. 그것은 평면과 입체, 추상과 구상, 수공(手工)과 기계, 과거와 현재, 남성과 여성 등 우리가 직면하는 수많은 난제들을 대하는 작가의 소신이기도 할 것이다.

2000년에 접어들면서 신경희의 시선은 도시로 향한다. ‘잠자는 도시’ 시리즈가 그것인데, 이 작품을 시작하던 시기 신경희는 서울에서 일산으로 작업실을 옮겼다. 그는 매일 작업실을 오가며 목격한 도시의 풍경들을 기억에 담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새로운 작업을 구상했다. ‘잠자는 도시’ 시리즈는 주로 건물, 다리 등 건축적인 소재를 다뤘는데, 여기서 신경희는 마치 픽셀을 찍듯 이미지를 모듈화 하는 방식을 보였다. <잠자는 도시 – 다리>(2000)는 동글동글한 실 방울들로 배경을 빽빽하게 채우고 그 위에 동일한 크기의 네모난 나무토막으로 다리의 아케이드 형상을 만들어 붙인 것이다. 비정형의 부드러운 실 방울 위에 각지고 단단한 나무토막이 완벽하게 짜인 픽셀처럼 붙어 있는 모습은 자연 위에 세운 반듯한 도시의 모습을 반추하는 듯하다. 다른 작품 <잠자는 도시 – 숨겨진 하늘>(2001)에서 작가는 나무 합판을 검정으로 칠하고, 위 아래 이중 아케이드를 그려 넣어 마치 아치형 창문 너머로 하늘이 보이는 것처럼 연출했다. 여기서는 반대로 아치 안쪽에 격자 무늬의 사각형 모듈을 그려 넣고, 각 교차점마다 못을 박아 넣었다. 이처럼 ‘잠자는 도시’ 시리즈에서 신경희는 나무, 쇠 등의 건축적 재료를 활용해 ‘도시’의 이미지를 비유적으로 표현했다. 사각형으로 모듈화한 형태 역시 도시의 확장을 연상할 수 있는 요소다. 또한 사각으로 자른 천을 연결한 퀼트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2003년의 ‘퀼트’ 시리즈는 이전까지의 작품 세계를 총망라하는 작업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퀼트 25>(2003)를 살펴보면, 신경희가 이전보다 수제 종이를 조금 더 작게 만들어 퀼트를 하듯 박음질로 연결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각각의 종이에 전사 기법으로 이미지를 넣거나 퀼트를 했다. 전사한 이미지 중에는 인물도 있고, 기존 작품에 등장했던 사물들, 과일, 식물, 전통 문양, 기하학적 모양, 다리나 기둥 등의 건축적 형태도 있었다. 나머지 종이는 실로 누벼 가로 또는 세로 선의 무늬를 만들었다. 자신이 작업했던 이미지와 패턴들을 하나의 모듈 삼아 작품을 확장해 나간 것인데, 이는 초기의 ‘기억’ 시리즈처럼 서로 다른 맥락의 파편들을 병치함으로써 그 안에서 의미가 파생될 수 있도록 만든 것이다. 이런 작업 방식은 작은 점이 모여 선이 되고 선이 모여 면이 된다는 회화의 조형 요소에 빗대서 이해할 수도 있고, 바느질 한 땀 한 땀을 이어 박음질 선을 만들고 작은 천 조각들을 이어 큰 원단을 만드는 퀼트의 기본 원리에 빗대서 이해할 수도 있다. 이처럼 신경희의 작업에서는 형식과 내용이 하나의 원리로 작동한다. 하루하루의 일상이 쌓여 일생이 되듯, 나무가 모여 숲이 되듯, 미시적인 것에서 거시적인 것으로 향해 가는 것이다.     
   
신경희는 2009년 암 진단을 받고 더 이상 붓을 들 수 없을 때까지 작품 활동에 몰두했다. 2006년 파주 헤이리로 거처를 옮긴 뒤부터 인생의 말년에 완성한 이 시기의 작품들이 바로 ‘정원 도시’ 시리즈다. ‘정원 도시’는 그의 작업실 앞 마당에 꾸며놓은 정원을 모티프로 삼아 구상한 것으로, 자연의 아름다움을 점, 선, 면으로 치환해 섬세하게 표현한 추상 회화 작품으로 평가 받는다. <정원 도시 – VIII>(2007)은 점이 모여 선이 되고, 선이 모여 면이 되는 조형의 확장성을 극대화한 작업이다. 일일이 붓으로 찍은 화면 속 수많은 점들은 대량 인쇄로 절대 불가능한, 형언할 수 없는 기운을 담고 있다. 묵묵히 작업을 수행했을 생전 작가의 모습을 상상하면 극도로 정제된 형태를 반복 작업으로 채워 완성한 화면은 경이롭기까지 하다. 하지만 그의 작품은 고통스러운 행위의 결과물이 아니다. 하나의 점을 찍고 선을 긋는 순간순간이 그에게 마지막까지 행복감을 안겼을 것이라고 감히 추측할 수 있다. 작품에서 느껴지는 밝은 정취와 생동감은 옷을 짓듯, 집을 짓듯 하나하나 정성스레 쌓아 올린 그의 생명력이다.



송윤지(1984~), 이화여대 대학원 미술사학과 석사, 미술비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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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희, <수영복 – 기억>, 1991, 모노타이프 실크스크린, 77×77cm




신경희, <화해할 수 없는 난제들 – 기억>, 1996, 혼합매체, 34×82.5cm




신경희, <잠자는 도시 – 다리>, 2000, 혼합매체 100×160cm




신경희, <퀼트 25>, 2003, 수제 종이에 혼합매체, 133×103cm




신경희, <정원 도시 – VIII>, 2007, 캔버스에 아크릴, 162.2×130.3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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