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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그리드의 안과 밖, 홍승혜의 ‘유기적 기하학’ | 오유진

현대미술포럼



그리드의 안과 밖, 홍승혜의 ‘유기적 기하학’ 



홍승혜(1959~)는 1997년부터 디지털 화면의 기본 단위인 픽셀(pixel)로 기하학적 형태를 생성하는 추상 작품을 꾸준히 선보여 왔다. 작가가 ‘유기적 기하학’이라 명명한 이 작업은 회화와 조각, 가구, 건축, 애니메이션 등 장르를 넘나들며 다양한 방식으로 변주되어 그의 작가적 정체성을 형성하는 토대가 되었다. 한국 현대미술에서는 비교적 드문 기하 추상 양식을 오랜 기간 고수해온 그의 작품은 단순하고 인공적인 외관으로 모던 추상의 전통을 계승하는듯 보이지만 모더니즘이 배제해 온 다양한 감각을 포용하면서 예술과 일상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든다. 

홍승혜는 1982년 서울대학교 회화과를 졸업하고 프랑스로 유학을 떠나 파리 국립미술학교에서 수학하였다. 그는 일찍이 대상을 재현하는 것보다는 화면을 구성하는 요소와 그것을 공간 속에 배치하는 방식에 더 관심을 기울였고, 유학 시기에는 앵포르멜 양식을 탐구하였다. 1990년대 초반 홍승혜는 캔버스에 다양한 재질의 종이를 부착한 콜라주 작품을 제작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나무와 꽃, 물고기 같은 자연적 소재를 소박하고 단순한 형태로 묘사하는 한편, 화면의 전체적 구조는 기하학적인 구성에 바탕을 두었다. 접거나 오려 붙인 종이에 서툴게 채색한 흔적이 어우러진 이 작은 그림은 어린 시절 만들고 그리는 행위를 통해 느꼈던 순수한 즐거움을 일깨운다. 추상과 구상, 순수예술과 공예의 구분을 무력화시키는 이러한 행보는 작가가 일찍부터 경직된 형식주의의 논리에서 자유로웠음을 보여준다. 1990년대 중반 그는 금형을 이용하여 하드보드지를 자른 뒤 캔버스에 배치하는 방식으로 작업에 기계적인 공정을 도입하였다. 균일하게 잘린 기하학적 형태가 반복되는 화면은 더욱 추상화되었고, 여기에 화사한 색의 무늬가 더해지면서 장식적인 속성이 부각되었다. 이러한 기하학적 형태와 기계적인 공정으로의 변화는 이후 등장하는 픽셀 작업을 예고하는 듯하다. 

홍승혜는 1997년 ‘유기적 기하학’이라는 타이틀 아래 컴퓨터 프로그램을 이용한 픽셀 추상 작품들을 발표했다. 그는 포토샵 해상도를 낮춰 픽셀의 크기를 확대하고 기하학적 형태를 만들어낸 뒤 이를 하드보드지에 실크스크린으로 찍어냈다. 그가 사각형의 픽셀을 쌓거나 나열하여 만들어낸 직선적인 형태는 일견 몬드리안(Piet Mondrian)과 말레비치(Kazimir Malevich)의 작품을 떠올리게 한다. 몬드리안은 수직과 수평선, 절제된 색을 통해 완벽한 조화로움과 보편적 진리를 시각적으로 구현하고자 했고, 말레비치는 대상의 부재와 순수한 정신을 표상하는 기호로서 사각형을 제시하였다. 이처럼 모더니스트들은 현실의 복잡하고 불안정한 상태를 기본적 요소로 환원시키고 명징하게 시각화하기 위해 구체적인 삶의 흔적과 서사성을 제거한 순수 형식을 추구하였다. 그러나 홍승혜의 픽셀 그림은 순수한 기하학적 구조인 동시에 창문과 계단, 집 등 우리에게 친숙한 일상적 대상으로도 인지되는데, 그는 이러한 재현적 이미지를 억압하지 않고 오히려 적극적으로 드러나도록 유도한다. 그리드로 이루어진 그의 작품은 사각형 건물들로 가득찬 도시의 풍경을 닮았고 그 속에 스며있는 일상의 온기를 느끼게 한다.

불변의 진리와 보편적 법칙을 표상하는 모더니스트의 사각형과 달리 홍승혜의 픽셀은 컴퓨터 프로그램에 이미 존재하며 얼마든지 복제 가능한 레디메이드이다. 그가 픽셀을 결합하여 만든 형태를 복제하고 채색하는 작업은 컴퓨터 스크린 위에서 빠르고 손쉽게 이루어진다. 이렇게 구상한 그림을 하드보드지나 알루미늄판에 전사하고 채색하는 과정은 대부분 기계를 이용하여 이루어지는데, 이는 재료를 매만지는 작가의 손길이 두드러졌던 초기 작업과 차이를 보이는 지점이다. 그는 레디메이드 재료와 기계적 공정에 내재된 복제성과 익명성을 통해 모더니스트의 유일성과 독창성의 신화에 도전한다. 

홍승혜의 픽셀 작품은 그리드를 기본으로 한 건조하고 인공적인 형태에도 불구하고 생명체의 부드러움과 온기를 품고 있다. 그는 픽셀을 벽돌처럼 쌓아 건축적 구조를 만들거나 동일한 형태를 반복하여 패턴을 만드는 것을 즐기는데, 반복되는 기하학적 구조에서 픽셀 몇 개를 더하고 빼거나 크기를 미세하게 조정하여 미묘한 운동감을 창출한다. 일률적인 반복에 예기치 않은 균열을 일으키는 이러한 시도는 ‘유기적 기하학’이라는 명칭이 지닌 모순적 의미를 일깨운다. 불변하는 수학적 질서를 상징하는 ‘기하학’과 달리 ‘유기적’이라는 단어는 생물체의 구조처럼 전체를 구성하는 각 부분이 서로 밀접하게 관련된 상태를 의미하는 것으로, 부드럽고 유동적인 속성을 지닌다. 홍승혜는 이처럼 서로 상반되는 사전적 의미를 지닌 두 단어를 결합시킴으로써 모더니즘의 이분법적 태도를 거부하고 모순을 포용하는 작품을 제작하고자 하는 의지를 드러낸다. 

한편 단위 요소가 반복되고 군더더기가 없는 그의 작품은 표면적으로는 미니멀 아트 작품과 유사하지만, 미니멀 아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기계적 반복이 아니라 단위 형태가 세포처럼 자라나고 증식하는 양상을 보여준다. 그의 작품을 구성하는 기본 형태는 개별적으로 미세한 차이를 보이면서도 전체적으로 통일성을 지닌 패턴처럼 반복되거나 하나의 큰 이미지로 수렴되는데, 이는 각 기관들이 긴밀하게 연결된 생명체의 구조나 개인들이 모인 사회의 축소판을 연상시킨다. 

홍승혜는 초기 회화 작업에서부터 구성 요소 간의 관계와 화면의 구조적 측면에 각별한 관심을 기울였는데, 그의 작품은 평면에서 입체로, 주변 공간으로 영역을 확장시켜 건축적 스케일에 이르고 있다. 그는 초기작인 종이 콜라주 작품에서 이미 캔버스를 하나의 오브제로 인식하는 시각을 드러냈다. 이후 하드보드지에 찍어낸 픽셀화에서는 액자 부분까지 작품의 연장으로 제작하여 전체적으로 사각형이나 원형의 기하학적 오브제를 형성하도록 하였고, 그림을 얇은 알루미늄 판에 전사하여 부조 형식으로 벽에 설치하기도 하였다. 그는 갤러리의 벽면을 컴퓨터 스크린으로 가정하고 이러한 작품들을 픽셀처럼 배치하여 전체적으로 또 하나의 작품을 이루도록 구성하였다. 2004년작 <보족적 설치>는 벽에 걸린 사각형의 회화에서 떨어져 나온 형태와 동일하게 가구를 제작한 것으로, 회화와 가구가 서로 상보적인 관계를 형성하면서 평면과 공간, 예술과 일상을 넘나드는 작업을 선보였다. 이 밖에도 스크린 상에서 구상한 이미지를 입체로 구현하여 벽과 수직을 이루도록 설치한 조각 작품에서는 평면과 공간의 관계에 대한 탐구가 심화되어 나타난다.

20세기 초 서구의 기하 추상 양식이 건축과 접점을 이룬 사례에서 볼 수 있듯 단위 요소를 축적하여 기하학적 형태를 구축하는 행위가 건축으로 수렴하는 현상은 불가피하다고 볼 수 있다. 홍승혜 역시 전시 공간의 일부를 작품화하여 실제 공간으로 침투하는 작업을 선보이면서, 전시장의 벽과 기둥, 바닥 등에 페인트를 칠하고 이를 ‘레디메이드 조각’으로 명명하였다. 이는 작가가 새로운 기하학적 구조물을 창조한 것이 아니라 기존 건축물의 일부를 선택하여 작품으로 제시했다는 의미를 담고 있으며, 추상을 통해 삶의 구체성을 지향하는 그의 예술관을 드러내기도 한다. 홍승혜는 점차 공간 전체를 작품화하는데 관심을 갖고 작업 스케일을 확대해 나갔는데, 2008년 이중섭 미술상 시상식과 전시 개막식이 이루어진 장소를 작품화한 것이 본격적 전환점이 되었다. 그는 시상식장 벽에 부착된 문자와 도안, 의자, 조명, 바닥에 그은 선에 이르기까지 공간을 구성하는 다양한 요소를 구상하고 배치하였다.

2012년 아뜰리에 에르메스에서 열린 《광장 사각》 전시는 작가가 보다 적극적으로 전시공간에 개입하고 관람자와 소통한 작업이다. 그는 가상의 광장을 조성하기 위해 벤치, 테이블, 벽화, 표지판, 와인바 등 다양한 가구와 조형물을 전시장에 설치하였다. 전시가 열린 건물의 전체적인 형태와 유리 커튼월, 중정은 원래 정사각형을 모티브로 설계되었는데, 이는 홍승혜 작업의 기본이 되는 픽셀 형상과 일치한다. 그는 일반적인 화이트 큐브 전시장과는 달리 유리로 둘러싸인데다 외부 테라스가 있어 개방성이 돋보이는 장소를 광장으로 변모시킴으로써 전시공간과 작품, 관람자가 서로 유기적인 관계를 형성하고 소통하도록 유도하였다. 이 밖에도 교보빌딩에 설치한 대형 벽화나 공공 수영장의 벽면을 장식한 픽셀화 타일 등의 사례에서도 그의 기하 추상 작품이 우리의 생활 공간과 위화감 없이 어우러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처럼 일상적 공간을 장식하고 실용적인 목적으로 활용되는 그의 작품들은 형식주의의 배타적 태도를 넘어 삶과 예술을 통합하고자 하는 작가의 의지를 보여준다. 

초기부터 현재까지 홍승혜의 다양한 작업을 관통하는 특징으로 유희적 속성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그가 초기에 선보였던 종이 콜라주 작품이 유년 시절의 놀이에서 비롯되었으며 이를 통해 캔버스의 틀을 넘어서면서 해방감을 느꼈다는 고백을 반추해볼 때, 그의 작품에는 엄격한 형식주의 모더니즘에 농담을 건네는 경쾌한 제스쳐가 깃들어 있다. 또한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이런저런 그림을 그리다 우연히 픽셀화를 시작하게 되었다는 일화에서 볼 수 있듯, 그의 작업 기저에는 어린아이의 놀이에서 발견되는 무목적성과 순수한 즐거움이 존재한다. 그런 맥락에서 홍승혜의 작품은 시간이 흐를수록 경직된 틀을 깨는 자유로운 발상을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2000년대 초부터 선보인 애니메이션 연작 <센티멘탈>은 픽셀로 만든 형상이 음악에 맞추어 춤추듯 움직이는 영상으로, 그의 기존 작품에서 느껴지는 시각적 율동감을 실제 움직임으로 구현한 것이다. <더 센티멘탈 스마일>(2016)은 남녀를 나타내는 픽토그램이 등장하는 영상 작품인데, 단순한 도형으로 구성된 인체 형상이 제한된 움직임을 보여줌에도 불구하고 둘 사이에 오가는 감정의 교류가 느껴진다. 이처럼 단순한 조형성에 시간성을 더한 애니메이션 작품은 실제 움직임을 통해 생명력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유기적’인 특성을 강하게 드러낸다. 작가는 초기에 본인이 선호하는 기존의 음악을 골라 영상 작품에 활용하다가 점차 작곡을 원활하게 돕는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배경 음악까지 직접 만들어내고 있다. 이와 같이 장르의 경계를 넘나드는 비물질적인 작업에서 그의 작품이 지닌 자유로움과 유희적 특성이 빛을 발한다. 

홍승혜의 작품이 순수한 그리드의 형식을 취하면서도 그 안에 머무르지 않고 끊임없이 바깥으로 나아가려 하는 것은 그의 개방적 태도와 포용적인 예술관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예술의 초월적 지위를 지키기 위해 그것을 위협하는 이질적 요소들을 모두 제거하려는 모더니스트의 태도는 부계혈통을 수호하려는 순혈주의와 일맥상통한다. 그러나 홍승혜는 순수한 기하학을 위협하는 삶의 다채로운 요소들을 두려워하지 않고 그것을 적극적으로 포용한다는 점에서 모더니스트의 대척점에 서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2005년 입간판 형태의 조형물인 <말나무>를 마로니에 공원에 설치하였는데, 여기에는 플럭서스 예술가 로베르 필리우(Robert Filliou)가 남긴 “예술은 삶을 예술보다 더 흥미롭게 하는 것”이라는 글귀가 정갈한 서체로 쓰여 있다. 일상적 공간에서 사람들과 소통하는 이 문자 조형물에는 예술과 삶의 간극을 없애고 예술로 일상을 풍요롭게 만들고자 하는 작가의 신념이 집약되어 있다. “‘위대한 예술’이 천상에서 지상으로 내려와 우리 모두의 일상이 되길 원한다”고 1)  말하는 홍승혜는 삶의 복잡하고 무거운 서사를 단순한 기하학적 형태로 환원시키면서도 다시금 구체적 삶의 공간으로 시선을 돌린다. 그는 그리드의 안과 밖을 자유롭게 넘나들며 딱딱한 기하학에 생명체의 온기를 더하는 예술적 유희를 지속하고 있다. 



오유진(1980~), 이화여대 대학원 미술사학과 박사과정 수료, 한경대학교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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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홍승혜와의 메일 인터뷰, 2021년 9월 26일.




홍승혜, <종이 풍경>, 1992, 종이에 아크릴, 29x25cm




홍승혜, <유기적 기하학>, 2000, 알루미늄판에 폴리아크릴 우레탄, 각 162.4x82.3cm




홍승혜, 《유기적 기하학》, 국제갤러리 전시 전경, 2000




홍승혜, <보족적 설치>, 테이블과 벽화, 2004




홍승혜, 《광장 사각》, 아틀리에 에르메스 전시 전경,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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