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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박상숙의 조각, 환경 속의 인간 | 박윤아

현대미술포럼



박상숙의 조각, 환경 속의 인간



박상숙(1951~)의 조각은 인간에 대한 성찰과 탐구에서 시작된다. 동시대의 인간 본연의 모습이 무엇인지 끊임없이 고민하고 그것을 자신의 조형 언어로 표현해 온 그는 한 가지 소재나 방식에 국한되지 않고 철, 구리, 나무, 돌, 스테인리스 스틸, 페인트 등 여러 재료를 다양하게 사용하면서 작업의 영역을 넓혀 왔다. 이화여자대학교 미술대학 조소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한 박상숙은 1980년대 초부터 왕성한 활동을 시작했는데, 김세중 청년조각상(1990), 석주미술상(1990), 그리고 토탈미술관장상(1992)을 수상하며 일찍이 예술적 역량을 인정받았다.

박상숙이 성장하고 작가로서 활동을 시작한 20세기 후반은 전세계적으로 격심한 변화가 지속된 시대이다. 산업혁명 이래로 기계화가 가속화되어가는 실정 속에서 인류는 과학의 진보를 빠르게 이뤄나감과 동시에 그 대가로 인간성의 상실을 경험했다. 국내적으로는 6·25 전쟁 이후 초토화된 경제 상황으로부터 다시 일어나기 위해 성장 위주의 산업화 정책이 시행되었으나 이를 둘러싼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서 사회 내 갈등은 심화되었다. 경제적 부흥과 인간성의 소외가 동시에 일어나는, 격동 속 진통의 시대였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는 박상숙의 초기 작품에 일관되게 나타난다. 그는 1986년 첫 개인전에서 철판을 이어 붙여 만든 인체, 즉 구축적이면서도 추상적 경향을 띈 조각을 선보였다. 용접 자국이 여실히 드러나는 형상은 인체를 부분적으로 분석하여 분해하고 재조립한 것이었다. 울퉁불퉁한 철제의 표면이 그대로 노출되고 있는 인체들은 머리와 팔이 잘려져 있고 아래로 갈수록 하체가 좁아지는 모양새인데, 좌대 없이 바닥에 서있거나 얇은 철봉에 앉아 있는 모습들은 무척 위태로워 보인다. 철제가 가진 단단한 속성이 무색하리만치 불안정하고 고통스러운 정서가 느껴진다.

박상숙의 구성주의적 어법은 이후 선보인 <대화> 시리즈에서 더욱 심화되는 양상을 보인다. 이 시리즈는 건축용 합판과 통나무, 그리고 스테인리스 스틸을 합성하는 콜라주 조각 기법의 추상적 인체상이다. 건축용 합판이란 얇게 켠 나무 널빤지를 붙여 만든 것으로 일정한 규격에 따라 대량 생산되어 현대사회의 도처에서 효율적으로 쓰이는 일상적 재료이다. 원재료인 나무의 본래적 특징을 상실한 합판과 자연적 성질을 유지하고 있는 통나무를 이용하여 구축된 인체상은 이전의 철제 인체상들과 마찬가지로 얼굴이나 팔, 또는 다리 등이 잘려나가 있으며, 좌대 없이 얇은 발이나 발목에 의해 지탱되고 있다. 

박상숙은 이를 통해 현대 문명의 이기에 둘러싸여 인간성이 말살되어 가는 현대인을 은유했다. 공업용 합판과 자연에서 온 통나무의 만남은 현대인의 고통과 공허함을 부각시킴과 동시에 그것을 해소시켜줄 수 있는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다. 이는 관람객들로 하여금 자신의 모습을, 그리고 시대의 실상을 되돌아보게 하며 나아가 이 대화에 참여하도록 유도한다. 특히 <대화-情 8803>(1988)은 길다란 합판에 한 쪽 팔과 다리를 기대어 앞의 누군가와 편안히 대화하는 자세를 취한 인체상인데, 합판에 부착된 스테인리스 스틸은 그 앞을 반사시킴으로써 관람객을 대화의 상대자로 편입시킨다. 

이와 같이 박상숙은 자신의 인체조각이 독자적인 존재로 인식되기 보다는 주변 환경과의 관계 속에서 이해되는 설치 방식을 택한다. 예를 들어 한 면이 전시장 벽면에 닿게 설치된 <비나 왔으면 좋겠다>(1993)와 <과거로부터의>(1993), 그리고 바닥에 길게 눕혀진 <화요일 오후>(1993)와 <+세월>(1993)과 같은 작품들은 그 설치 방식으로 인해 주변 공간과의 관계 속에서 읽혀지도록 유도된다. 이는 인간의 실존이 그가 처한 상황과 환경 속에서 확인되는 것이라고 이해하는 박상숙의 세계관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이러한 관점은 인체조각이 직사각형의 구조물 안에 가둬진 것처럼 보이는 작품들에서 더욱 직접적으로 나타난다. 

예를 들어, 나무와 합판으로 제작된 <사람, 사람들>(1993)에는 직사각형 공간 안에 서있는 인체상들이 등장한다. 이 인체들은 기하학적인 공간 속에 비좁게 갇힌 것처럼 보이면서도 그곳으로부터 한 발자국 걸어 나오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무쇠와 철판으로 제작된 <生-뒤돌아 볼 수 없음>(1993)도 재료만 다를 뿐, 관 모양의 공간 안에 갇힌 인체상들이 서있거나 바닥에 누워있는 작품이다. 인간과 주변 환경, 자연과 인공, 곡선과 직선 간의 조화와 긴장을 이뤄내는 이 같은 작품들은 인간 실존에 대한 작가의 고민, 그리고 동시대 인간상에 대한 탐색의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1995년 프랑스로 이주한 후부터 박상숙의 작업에는 외관상의 큰 변화가 생기는데, 작업 초기부터 지속적으로 등장했던 인간의 형상이 사라진 것이다. 대신 이전 작업에서 부수적으로 나타났던 건축적 구조물이 주소재가 된다. 예컨대 집의 외관 및 내부, 의자, 문, 기둥, 계단 등 집과 관련된 요소가 나타나는 점이다. 종래의 작업이 인간의 실존을 고민하며 주변 환경과의 관계 속에서의 인간을 보여주는 추상적 인체상이 주를 이루었다면, 이 시기 인간이 생활을 영위하는 공간이자 삶의 시간이 축적되는 집을 주제로 삼기 시작한 것은 이전 작업에서 추구한 바가 일면 심화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람이 매일같이 숨쉬며 살아가고 생활의 흔적이 묻어 있는 주거 공간의 일부를 통해 인간의 삶을 은유하는 박상숙의 작업 방식은 인간의 실존과 삶에 대해 보다 포괄적이고 다층적 의미들을 내포하게 된다. 

도불 이후 국내에서의 첫 개인전을 통해 선보인 <생활방식> 시리즈는 한국 전통 가옥과 주거 문화와 관련된 구조물을 재현한 것이다. 이는 온돌, 아궁이, 우물 등으로, 유백색의 돌을 주재료로 한 기하학적이고 추상적인 형태이다. 작가가 어린 시절을 추억하며 만든 재현물인 이 시리즈에 대해 작가는, “따뜻한 아랫목, 우물 속에 비친 쏟아질 듯한 하늘의 별들, 뒤뜰과 부엌들의 구석진 곳을 샅샅이 뒤져가며 잃어버린 기억들을 주워 담는” 1) 것이라 설명한다. 이와 같이 옛집에 대한 그의 추억은 서정적인 것들인데, <생활방식>은 그러한 정서적 감응을 일으키는 매개물이 된다. 돌에 전기를 더해 온기를 체험하게 한 것이나 불이 지펴지고 그곳에서 음식을 준비하였던 어머니를 떠올리게 하는 아궁이 모양의 조각, 또는 온돌바닥을 뜨끈하게 만들어주었던 구들을 재현한 작품은 따스하고 편안한 정서를 불러일으킨다. 추억이 환기하는 정서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역설적으로 어떠한 구체적 형상이 일으키는 것보다 더욱 강렬할 수 있는 것으로서, 박상숙은 이를 한옥의 온기와 결부시켜 심리적 효과를 극대화시키는 셈이다. 

이러한 한옥의 구조물은 우리의 문화와 삶의 방식에 의거하여 설계되고 여러 시대를 걸쳐 유지되었다는 측면에서 공동체의 정신과 정체성을 내포한다고 할 수 있다. 한옥은 공간이 분리되기보다 서로 개방적이고 교류한다는 구조적 특징을 갖는다. 박상숙은 이러한 특성이 두드러지는 전통 건축 양식을 모티프 삼아 현대적이고 자신만의 독특한 조형 어법으로 재해석하였다. 2003년 파리 아클리마타시옹 공원 내에 위치한 서울공원 2) 에서 전시한 작품들이 그 대표적인 예다. <생활방식-문>(2003)은 사람 높이로 제작된 알루미늄의 원형 이중문인데 창경궁 만월문의 형태를 본뜬 것이다. 앞의 문은 왼쪽에서 반쯤, 그 뒤의 문은 오른쪽에서 반쯤 닫혀 있어서 전체적으로는 열려 있으면서도 닫힌 모양새를 하고 있다. 이는 외벽의 개방이 용이한 한옥의 대청을 상기시키는데 공간을 구분하면서도 이어주는 한옥 문의 특성을 간파하여 재구성한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서로 통하게 하는 한옥의 구조적 특성은 철망으로 제작된 <생활방식-문>(2003)에서 더욱 강조되었다. 문의 모양을 하고 있지만 재료적 속성으로 인해 안과 밖이 뚫려 있어 공간 간의 구분이 약화되고 바람과 소리, 그리고 빛을 그대로 통과시킨다. 미세한 구멍이 있어 공기를 차단하지 않고 흐르게 하는 전통 창호지를 현대적으로 재현한 셈이다. 이 전시의 또 한 가지 주목점은 <생활방식-문>이 파리의 관람객으로 하여금 작품을 드나들며 체험하도록 유도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전통적으로 풍요를 상징하는 보름달 모양의 문을 지나며 소원을 빌어보도록 하는 박상숙의 의도가 내포된 것이다. 미신에 따라 보름달을 주로 부정적인 것으로 인식했던 서양의 문화와 다르게 긍정적인 것으로 제시하는 이 설치 작품은 한국 전통의 구조물을 현대적인 재료와 미감으로 번안하는 것을 넘어서 문화 간의 새로운 대화와 의미를 이끌어내고 있다. 

공동체의 가장 기초 단위인 가족의 생활 터전인 집을 긍정적인 것으로 인식하고 제시하는 박상숙의 방식은 <행복의 부피> 연작에서도 이어진다. 이 연작은 집의 외관, 소파, 계단, 기둥과 같이 집의 구성물을 소재로 하며 스테인리스 스틸에 열을 가하여 부푼 모양으로 만든 것이다. 단단하고 차가운 재료에 열기를 더한 것은 집 안에 거주하는 인간의 온기를 암시한다. 밑면이 살짝 떠 있고 전체적으로 팽창된 모양은 작품이 풍선처럼 두둥실 날아갈 듯한 느낌을 주어 즐거운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나아가 부분적으로 또는 작품 전체적으로 칠한 빨강, 파랑, 노랑 등의 선명한 색깔은 활기를 더하는 요소로 작용한다. 즉 행복을 추구하는 인간 본연의 모습을 인간이 매일같이 살아가는 공간을 통해 은유하고 있으며, 집이라는 그 공간은 행복을 실현시킬 수 있는 곳으로서 제시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인간을 그가 처한 환경과의 관계 속에서 제시하는 박상숙의 조형 어법은 주변을 반사하는 성질을 가진 스테인리스 스틸의 사용으로 또다시 반복되고 있다. <행복의 부피>는 주변 공간에 따라 그 표면이 시시각각 달라질 뿐만 아니라 주위 환경을 흡수함과 동시에 둥그런 면과 색깔로 변형하여 반사시키는데 이는 주변 환경과의 관계 속에서 상호작용하며 살아가는 인간의 삶을 은유하는 셈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1980년대 초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박상숙의 작업은 기법과 재료의 변화를 거듭해 왔다. 이는 서구의 추상조각 양식이 국내에 유입된 이래로 재료와 형식, 그리고 미술 개념이 다변화되어 온 한국 현대조각의 흐름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박상숙의 작업이 여타 작가들의 작업과 차별되는 점은 그 중심축이 인간, 특히 공간 및 환경 속의 인간에 대한 관심으로 일관되어 온 것에 있다. 그는 조각(carving)이 아닌 접붙이는 방식의 새로운 기법을 보여주었고 전기, 철사, 스테인리스 스틸, 페인트 등 현대적인 재료를 사용하였지만 이는 언제나 인간 본연의 모습에 대한 물음과 고민을 담기 위해 선택된 것들이었다. 산업화에 의해 소외되었지만 자연과의 만남을 통해 인간성의 회복을 제안하는 초기의 인체상부터 행복이라는 인간의 기본 욕구를 집이라는 소재를 통해 풀어내는 가장 최근 작업에까지 박상숙의 작업에는 인간에 대한 따스한 애착이 담겨있다. 삶의 면모를 진솔하게 반영하면서도 인간적인 정감을 잃지 않는 박상숙의 작업은 인간이 주변과의 끊임없는 상호작용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임을 환기시키며, 그 속에서 생명의 온기를 발견하게 되는 우리의 모습을 일깨워준다. 



박윤아(1985~), 이화여대 대학원 미술사학과 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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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박상숙, 「작가노트: 지적논리 보다는 감성적 논리를...」, 『창작, 그 희열: 석주미술상 10주년 기념 수상작가집』, 석주문화재단, 1999, p. 44.

2) 서울과 파리의 자매결연 10주년을 기념하여 2002년에 파리 블로뉴 숲 아클리마타시옹 공원 내에 조성되었으며 한국 전통 정원 양식을 따르고 있다. 






박상숙, <사람들 05331>, 2005, 나무, 193×46×31.5cm, 214.5×113×45cm, 240×71.5×100.5cm, 서울시립미술관
사진제공:SeMA




박상숙, <생활방식-문>, 2004, 철, 페인트, 235×291×101cm, 서울시립미술관
사진제공:SeMA




박상숙, <행복의 부피 1807>, 2018, 스테인리스 스틸에 캔디 페인트, 130×65×65cm, 서울시립미술관
사진제공:Se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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