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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아름다운 세상을 그리며, 성옥희의 태피스트리 | 김가영

현대미술포럼



아름다운 세상을 그리며, 성옥희의 태피스트리



성옥희(1935~)는 한국 태피스트리 예술의 선구자로서, 직조가 예술의 한 분야로 인식되기도 전인 1970년대에 활동을 시작해 2000년대까지 지속했다. 30여 년의 예술 인생을 회고하며 그는 태피스트리를 선택한 이유에 대해 “유사 이래 인류의 생활과 밀착해 왔던 직물에 대한 친숙함이 나의 무의식에 작용한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라고 말했다. 그가 언급한 대로 직물은 인류와 역사를 같이해 왔으나, 더 정확히는 주로 ‘여성’과 같이해 왔다. 미술사의 영역에서 처음으로 이 문제를 진지하게 고찰한 건 로지카 파커(Rozsika Parker)와 그리젤다 폴록(Griselda Pollock)이었다. 그들은 「여자 공예가와 예술의 위계(Crafty Women and the Hierarchy of the Arts)」(1981)라는 글에서, 일찍이 ‘여성의 일’로 구분된 공예가 현대미술로 편입되는 과정에서 가부장제 이데올로기에 의해 하위 장르로 취급받게 되었음을 방대한 사료로 증명해 내었다. 그들이 배경으로 하고 있는 영국과 지리적으로 한참 멀리 떨어진 이곳 한국에서도 비슷한 역사가 반복되었다.

한국에서는 바느질, 재봉, 염색, 직조 등이 일제강점기에 ‘수예’ 혹은 ‘여홍’과 ‘여공’으로 통칭되며 여성의 보통교육으로 자리 잡았다. “여성의 공예”로서 수예는 여성 및 가내 생활과 밀접한 활동으로, 나아가 부덕의 상징 정도로 인식되었다. 해방 이후 직물과 관련한 일련 학과가 미술대학이 아니라 가정대학에 편입된 까닭이 여기에 있다. 공예와 예술의 경계가 흐려진 이후에도 섬유는 늘 순수미술에서 빗겨난 부차적 장르로 인식되었다. 그 때문에 짧은 역사의 한국 미술사학은 더더욱 이에 대한 연구를 등한시 해왔다. 망각은 젠더를 불문하지만, 사회적 풍토에 의해 이 분야를 일구어 온 주인공은 여성이 다수라는 점에서 특히 많은 여성사가 잊혔음을 간과할 수 없다. 성옥희, 그의 이름도 그렇게 잊혔다. 

활발한 활동으로 족적을 뚜렷이 새기고 있던 때에도 그는 여성 작가 혹은 공예가라는 이유로 충분히 주목을 받지 못했다. 이미 교수 및 작가로서 탄탄한 이력을 쌓은 1990년대의 성옥희와 그의 작품조차도 너른 미술사적 평가 대신, “결혼 후에도 … 용모와 마음이 함께 아름다운 … 한국 여인의 고고함과 슬기로움” 내지 “우리네 여인들의 슬기로움”이라는 설명을 반복해 들어야만 했다. 그러나 정작 성옥희는, 앞선 그의 발언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 단지 ‘여성으로서’ 혹은 그가 ‘여성이기 때문에’ 직조를 택한 건 아니었다. 그의 화업과 작품 전체를 살펴보면 그가 분명 한 명의 예술가로서 또한 인간으로서 직조라는 매체를 다뤘으며, 자연과 인간의 보편적 심상이라는 주제에 천착했음을 알 수 있다.

1935년 다복한 가정의 3남 5녀 중 막내로 출생한 성옥희는 경기여중고를 나와 1954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응용미술학과에 입학했다(1946년 설립된 서울대학교 예술대학에 속했던 미술부는 전후에 미술대학으로 학제를 개편하면서 기존의 ‘도안과’를 응용미술학과로 재정비했다). 중고등학교 시절부터 미술반 활동을 통해 도상봉(1902~1977)과 최덕휴(1922~1998)를 사사한 그는, 대학 진학 후 장발(1901~2001)과 이순석(1905~1986)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다. 이후 대학원에 진학해서는 회화를 공부했다. 

서울대학교 본부 자료에 따르면 1956년 로버트 엘 클레이가 두 학기에 걸쳐 방직도안 기초구성을 가르쳤다고 한 것으로 보아, 성옥희는 학부 시절 직조를 이미 다소간 경험했을 듯하다. 그러나 회화과로 전향하였던 그가 문득 태피스트리에 전념하겠다고 결심한 것은 대학원 공부를 마친 뒤, 1970년부터 약 1년간 동경여자미술대학에서 연수하며 염색과 직조를 연구한 이후였다. 1974년 23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서 섬유예술가로서는 최초로 문화공보부 장관상을 수상하기까지, 그는 홀로 1세대 태피스트리 작가로서의 길을 개척했다.

대한민국미술전람회는 성옥희가 문화공보부 장관상을 수상한 것을 계기로 공예분과 염색부문의 명칭을 ‘염직’으로 바꿨다. 훗날 그는 이 일을 작가로서의 삶에 있었던 몇 가지 중요한 사건 중 하나로 꼽았다. 그만큼 직조예술은 한국 화단에서 아직까지 생소했다. 기반이 전무하다 보니 타인의 인식과 인정은 차치하고, 쓸 만한 재료를 구하기도 어려웠다. 성옥희는 산업용 재료 중에서 면사를 택했다. 공예용으로 가공된 실이 아니었기 때문에 염색도 직접 하고, 몇 가닥의 실을 서로 꼬아 다양한 색과 굵기를 가진 실을 손수 만들어내었다. 그는 자연스레 매체의 가능성부터 실험한 것이다. 이 시기에 제작된 작품의 색이 흰색, 회색, 황색, 갈색 등 몇 가지에 한정된 것은 이러한 한계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성옥희의 초기 태피스트리는 전혀 단조롭지 않은데, 그 비결은 다양한 질감의 구현과 주제의 변형에 있다.

초기작 중 하나인 <구도>(1970)는 실 색의 다름을 이용해 사각형 안에 원을, 원 안에는 직선과 곡선을 불규칙하게 배치함으로써 시각적 즐거움을 준다. 이때는 아직 평직(plain weave)이 주를 이뤄 화면 자체는 비교적 납작하다. 그러나 곧 1974년작 <새>나 <성장 2> 등에서 볼 수 있듯 실을 루프 모양으로 짜 넣는 루핑(looping) 기법을 적극 활용해 표현하고자 하는 형상과 배경에 얕은 높낮이차를 주어 입체감을 구현했다. 예컨대 <성장 2>에서는 홀씨와 홀씨주머니, 버섯류의 줄기와 갓으로 보이는 형체, 그리고 그것이 심긴 땅 속과 지면 각각이 색과 질감으로 달리 표현되어 태피스트리의 물질성을 이용한 성옥희의 회화적 실험을 엿볼 수 있다.
 
추상적 구성에서부터 <은총>(1973), <나비의 구도>(1974), <새의 형상>(1975), <꿈>(1975), <창조>(1976) 등에 이르기까지 활동 초반 성옥희는 이미 이후 30년 동안의 작업에서 반복할 주제를 전부 다뤘다. 이를 갈무리해 보면, 첫 번째는 동물, 특히 평생의 모티프가 될 ‘새’다. 두 번째는 <꿈>, <추억>(1980), <환희>(1985), <애상>(1994) 등으로 확장해 나가는 개인적 심상이다. 세 번째는 그의 작품 세계의 중추를 차지하는 종교와 신앙에 대한 이해의 표현이다. 가톨릭 신자이기도 한 성옥희는 일찍이 1970년 서울 가톨릭미술가회 전시에 출품 제의를 받아 이듬해 열린 1회전에 참여하며 가톨릭 미술에 입문했다. 이후로도 꾸준히 종교적 주제의 작품을 출품해 온 그는 평생을 신 앞에 복무하듯 작업했고, 작가로서의 생(生)도 귀의하듯 마무리하게 된다.

1976년 미도파화랑에서 첫 개인전을 여는 등 성옥희는 태피스트리 작가로서 활발히 활동하는 가운데 교육자로서도 괄목할 만한 경력을 쌓아나갔다. 태피스트리의 길로 들어서기 이전부터 이미 건국대학교 가정대학 부교수를 지내고 있었고, 동시에 서울의 다수 대학에서 강사로 활동했다. 그런데 1977년 그는 모든 걸 과감히 내려놓고 남편을 따라 미국 유학길에 오른다. 이같은 결정을 할 당시 그의 심정을 알 수는 없지만 결과적으로 유학은 성옥희가 작가로서 한 단계 도약할 수 있는 발판이 돼주었다. 당시 현대미술의 중심이었던 뉴욕과 시카고에서 수학하며 그는 다양한 재료와 기법을 접했다. 특히 뉴욕의 뉴스쿨(The New School)에서는 회화적 표현을 중시하는 프랑스식 태피스트리를 연구하기도 했다. 세계적인 태피스트리 전문 화랑이었던 쟈크 바루(Jaques Baruch)는 배움의 자리로 돌아간 이 작가의 가능성을 가장 먼저 알아 보았다. 아시아 작가로서 두 번째로 성옥희는 쟈크 바루의 전속 작가가 된 것이다. 우연히 그곳에서 성옥희의 작품과 마주쳤던 이경성은 “어느 코너에 유달리도 고요한 표정을 지니고 있는 작품을 보게 되었다”고 훗날 회상했다.

이 시기의 작품에서 발견되는 ‘고요함’은 이전과 비교해 한층 심원해진 화면에서 비롯된다. 1983년 한국으로 돌아와 개최한 선화랑에서의 개인전에서 성옥희는 활동 초기 제작한 작품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의 신작을 출품했다. 그 변화는 비전공자도 알아차릴 수 있을 만큼 뚜렷했으므로, 그의 오랜 지인이었던 국문학자 강인숙은 확장된 스케일과 다양화된 색상에 놀랐다고 회상한 바 있다. 이 전시에 출품된 가장 큰 작품인 <추억>(1980)은 가로 4미터에 달했고, 여러 작품에서 이전에 볼 수 없었던 파란색, 붉은색, 초록색, 보라색 등이 쓰였다. 작품의 물리적인 폭과 표현의 한계가 넓어진 만큼 작품 속 공간도 넓어지고 깊어졌다. 이전처럼 도상이나 구체적 사물을 전경에 앞세우는 대신 추상적인 내면의 심상을 허공에 띄운 듯이 표현하고, 씨실에 여러 색상의 실을 이어서 연결하는 인터록(interlock) 기법을 적극 활용한 덕분이었다. ‘지지직거리는’ 효과를 자아내는 듯한 인터로킹은 시공을 울리는 파장의 형태로 드러나 <꿈>(1981)이나 <사랑>(1982)과 같은 심상의 여운을 시각에서 청각으로 공감각하게 했다. 

한편 그와 같은 효과가 <까치M>(1981)에서처럼 비행하는 새에 적용되자 성옥희의 확장된 화면에는 시간의 흐름이 더해졌다. 이후로도 <새들의 자취>(1984), <새들의 합창>(1988), <새들의 행진>(1997) 등 꾸준히 새를 주제로 한 작업을 이어온 작가는 그 이유에 대해 “유동적인 자유 공간과 … 주관적 내면 공간을 표현하기” 위함이며, 새가 “시공을 넘나들며 시시각각 변하는 상대적 공간 상황을 이룩하며 여음 같은 주제를 제공”하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창공을 자유로이 노닐며 날갯짓으로 시공에 현존을 아로새기는 새야말로 작가에게는 눈에 보이는 세계 너머를 감각하게 하는 존재이자, 그 새로운 차원에 대한 감각을 타인에게도 전달할 수 있게 하는 매개체였던 것이다. 

1990년대에 이르러 수직선을 강조하는 기둥직(bound weave) 기법과 파동치는 곡선을 만드는 능직(twill weave) 기법에 의해 기하학적으로 변모한 성옥희의 화면에서 새들은 점차 형태를 잃어간다. 그리고 <애상-새들의 노래 4>(1997)에서처럼 마침내 작은 사각형에 이른다. 마치 우주에서 내려다보듯 저 멀리 작아진 새들로 인해 성옥희의 화면 공간은 끝도 없이 넓어지고, 관람자는 태피스트리의 물질성을 잊은 채 회화적 일루전에 깊숙이 빠지다 못해 진공 상태에 접어든다. 바로 그 깊은 곳에서 성옥희가 바라본 아름답도록 심오한 세계를 우리도 만나게 된다. 1984년 한국 카톨릭 선교 200주년 기념전을 위해 <기도>를 제작한 성옥희는 다음과 같은 소회를 남겼다. 

“작업 중 부활하는 주님의 환희와 고통과 신비를 생각하며, 내 자신이 무한 공간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작업을 끝내고 나서 나는 대자연의 맑은 공기와 빛을 향하여 주님 앞에 무릎을 끓었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수도자와 같은 작가적 태도는 비단 <기도>와 같은 종교적 작품을 제작할 때뿐만 아니라 “무한 공간”과 “대자연”을 품은 다른 작품을 다룰 때도 적용된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17여 년간 임했던 이화여자대학교 섬유예술전공 교수직을 은퇴한 성옥희는 2000년, “이제 교회의 요청을 받아들여 마지막 봉사로 여기고 전례 용품을 제작하는 것으로 창작 활동을 마무리 하려” 한다고 다짐했다. 교수와 작가라는 타이틀을 뒤로한 채 직기 앞에 앉은 성옥희는 그의 표현대로 “허허로운 마음”으로 시원으로 돌아갈 채비를 마친 것이다. 동시에 그의 태피스트리도 ‘미술’이란 허울을 벗고 처음의 쓰임으로 되돌아가게 되었다. 저승으로의 첫길을 나설 영혼을 기리던 이집트와 잉카의 태피스트리처럼 그리스 로마 신전의 성스러움을 지키던 태피스트리처럼 삶과 죽음을 무위하는 영원의 장(帳)이 된 것이다.

경북 왜관수도원, 명동대성당 등에 놓인 성옥희의 전례 용품은 소박하고 가볍다. 교회미술에 쓰이는 상징적인 색상 몇 개만으로 단순하게 짜인 직물에는 날실과 씨실의 얽힘이 투명하게 드러난다. 그는 한 올 한 올에 먼 세계에 대한 소망과 ‘그 뜻이 이루어질’ 아름다운 이 세상에 대한 통찰을 함께 담았다. 

“실의 꼬임과 교직에서 자연스런 존재 방식을, 색채에서는 상반된 것들의 공존을 생각했습니다. 상대방이 없으면 각자의 존재가 구성될 수 없다는 것도 재삼 일깨웠습니다. 한 올 한 올 구축해 가는 작업, 지우거나 되돌릴 수가 없는 작업, 그러면서도 그것이 전체와 화합해야 하는 어려움과 한계를 절감하고 겸허를 되새기게 됩니다”

성옥희에게 친숙함으로 다가온 태피스트리는 그에게 세상의 짜임을 표현하는 도구가 되어주었고, 마침내 세상의 균형과 조화, 곧 아름다움을 보게 했다. 인생의 곡절을 지나며 부침의 시간 동안 그는 부단히도 묵묵하게 실을 엮었다. 그것이 사명이라는 듯이, 손끝이 어쩔 수 없이 무뎌질 때까지. 그가 그렇게 그려놓은 아름다운 세상을 마주하며 아름다운 세상을 꿈꾼다. 



김가영(1992~), 이화여대 대학원 미술사학과 석사, 현재 가나아트갤러리 아카이브 어시스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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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옥희, <성장 2>, 1974, 실, 116x70cm 




성옥희, <사랑>, 1982, 실, 120x105cm 




성옥희, <까치M>, 1981, 실, 90x88cm




성옥희, <애상-새들의 노래 4>, 1997, 실, 92x102cm




성옥희, <전례 시기에 따른 독서대 걸이>, 2006, 실, 각 190x30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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