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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삶과 죽음 사이의 여백을 채우는 이순종의 에로틱한 사물들 | 임수진

현대미술포럼



삶과 죽음 사이의 여백을 채우는 이순종의 에로틱한 사물들



이순종(1953~)은 일상적이고 사소한, 가볍고 때론 키치적인 이미지에서 독특한 미감과 에너지를 발견한다. 그에게 이러한 에너지는 삶을 생동하게 하고 예술적 영감을 태동시키며 무의식을 이끌고, 정신을 치유하는 원동력이 된다. 홍익대학교에서 조소를 전공한 그는 졸업하던 해인 1976년 작가가 되겠다는 뚜렷한 목표를 세우지 않은 채 결혼과 함께 유학생인 남편을 따라 미국으로 건너간다. 그는 독재정권 아래 급격한 산업화의 혼돈을 겪던 소용돌이 속의 한국사회와 달리 시간이 멈춘 듯 한 텅 빈 사막 도시에서 오히려 한국에서의 삶보다 더욱 치열하고 마치 전쟁과 같은 시간을 보냈다고 소회를 밝혔다. 그러면서 이러한 전쟁 같았던 삶과 그 안에 놓인 자아의 부재가 대학원에 진학하고 자연스럽게 작가로서의 삶을 시작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노스 텍사스 대학원에서 입체와 평면회화를 전공한 그는 1989년 한국에 돌아와 이듬해 토탈갤러리에서의 개인전으로 작가로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였다. 

그가 귀국했던 1989년의 한국사회는 민주화와 경제성장, 세계화와 같은 단어들로 새로운 시대에 대한 기대가 가득하던 시기였다. 청교도적인 이념과 숭고한 자연으로 이루어진 미국의 소도시 풍경과는 대조적으로 북적대고 혼란스러운, 다채로운 기운이 가득하여 에너지로 충만한 서울은 모든 것이 예술적 영감의 원천이었다. 황학동 재래시장의 키치적인 사물들, 건물을 온통 뒤덮은 원색의 간판들, 광고 속에서 유혹하는 여성들 등 그가 마주한 복잡하고 다양한 시각 이미지의 팽창만큼이나 그의 작품은 폭넓은 주제의식과 다양하고 실험적인 형식을 보여주었다. 마치 ‘해체’와 ‘다원화’의 키워드로 대변된 포스트모던한 1990년대의 시대정신을 그대로 흡수한 것 같았다. 그러나 이는 한편으로 작가로서 일관된 아이덴티티를 유지하지 못했다는 비판과 오해에서 자유롭지 못했고, 작가 스스로도 이것에 대해 오랜 시간 고민과 내적 갈등을 겪었던 지점이기도 했다.

얼핏 일관되지 않고 흩어진 듯 보이는 이순종의 작업을 관통하는 어휘로서 ‘에로티시즘’은 넓고 다채로운 그의 작업세계를 하나로 꿸 수 있는 키워드로 작동한다. 그는 혼돈 속에서 태어난 에로스가 생명을 생성하는 원초적인 힘을 지녔듯이 에로티시즘을 성적 대상이나 성적 욕망을 넘어 혼돈을 질서화하며 완전을 향해 나아가는 근원적인 에너지이자 삶에 대한 욕구, 창조의 원동력으로 본다. 사막이 많고 황량한 지역에서 ‘마치 온 몸의 수분이 다 빠지는 듯 몸과 마음이 건조’한 상태로 매일매일 전쟁과 같은 현실을 온 몸으로 맞닥뜨려야 했던 이순종이 한국에 돌아와 마주했던 일상의 풍경은 그 자체가 꿈틀대는 에너지이자 에로스였다. 특히 그는 귀국 초기에 그는 미8군에서 병사들에게 미술을 가르치는 일을 하였는데, 이 시기 접했던 군사문화에 대한 관심이 작업의 소재가 되었다. 군사문화에 내재된 남성 권력 집단의 특성을 역설적으로 계급장과 반짝이는 군대 물품, 거대한 도열이 주는 아름다움 등의 시각적 이미지에서 찾았고, 우리 사회에 내면화된 군사문화와 남성중심의 위계사회에 내재된 폭력성 등을 희화화된 이미지로 비틀었다. 

<비상시 구급용 찬장>(1996)은 병기고의 무기들을 응용하여 제작한 미군병사들의 실습작품으로, 흑연으로 검게 칠해져 특유의 볼륨감이 강조된 다양한 형태의 그릇을 하얀 그리드가 강조된 찬장 속에 진열한 것이다. 남성을 상징하는 병기가 흰 구급용 찬장 안에 줄지어 진열되어 있고, 미니멀한 형태의 흰 찬장 전면 유리에는 붉은 십자표시가 붙어있다. 이는 찬장, 그릇장 등이 위치한 여성의 공간인 부엌을 연상하게 하거나 혹은 간호나 돌봄이라는 모성적 의미를 환기한다. 이러한 비현실적 결합에 의해 각각의 용도는 폐기된 반면 이질적인 두 사물의 공존은 일상이 주는 안정감과 전쟁의 공포, 삶과 죽음, 여성과 남성, 가정과 일터의 경계에 선 긴장감을 유도하였고, 이를 통해 에로티시즘의 본질인 생명과 삶에 대한 희구를 드러낸 것이다. 또한 군사문화로 대변되는 남성권력집단을 정면으로 부정하고 대립된 여성성을 강조하는 이분법적인 방식이 아니라 남성성과 여성성을 뒤섞어 우회하는 방식으로 희화한다. 이러한 방식은 군복의 카모플라쥬를 박음질이라는 여성적인 기법으로 부드럽고 따뜻하게 표현하며, 여성성의 상징인 달을 배치함으로써 서정적인 정서를 자아낸 <풍경>(1996)에서도 드러난다. 

이순종이 미군부대에서의 경험과 관련된 작품에서 육중하고 단단한 실제 사물을 배치하는 방식으로 남성문화의 상징적 기호들을 다루었다면 2000년 초반의 작업에서는 그것과 매우 상반된 이미지를 선보였다. 군대 작업 이후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3년의 시간을 보내고 돌아온 그는 동양의 화론과 혜원 신윤복의 <미인도>에 매료되었고, <미인도>에서 모티브를 얻어 한 올 한 올 세필로 그려낸 머리카락을 화면 전체로 확장하거나 땋은 머리타래를 강조하였다. 또한 성스러운 이미지를 강조하고, 기존의 회화 어법에서 탈피하고자 둥근 프레임을 사용하였다. 이순종의 <미인도>는 한국인으로서, 여성으로서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과 성찰의 결과물이기도 했으나 신체의 일부로서 ‘머리카락’이 가지는 관능적이고도 물신적인 속성을 드러내는 작업이기도 했다. 길고 풍성한 여성의 머리카락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섹슈얼한 여성 이미지의 표상이자 순종과 희생이 내포된 성스러움에 대한 은유인 동시에 가시화된 공포와 욕망, 악의 상징이었다. 

문화사에서 여성의 긴 머리카락에 대한 남성들의 성적 판타지 이면에 존재하는 다양한 의미는 신의 저주로 인해 뱀으로 변한 메두사의 머리카락, 긴 머리를 늘어뜨려 자신을 가둔 탑을 탈출한 라푼젤의 머리카락처럼 때론 위협적인, 때론 영리함과 능력을 드러내는 매개로 존재했다. 이순종의 미인도에서 원형의 프레임을 따라 점점 퍼져가는 여인의 타래머리는 메두사나 라푼젤의 머리를 상기시킨다. 다소곳한 표정과는 상반된 꿈틀거리며 퍼져나가는 머리카락에서  해방감과 역사 이래 여성에게 부여된 순종적인 캐릭터를 전복시키는 열정의 에너지를 읽을 수 있다. 

이순종은 미인도 뿐 아니라 심청의 설화를 모티브로 한 작품에서도 머리카락을 강조했다. 심청이 고개를 숙이고 검은 바다로 뛰어드는 장면에서 그는 희생제의보다는 에로티시즘이 분출되는 극단적인 순간을 감지했다. <인당수>(2003)나 <여신-심청>(2007)에서 그는 치마를 뒤집어써 완벽히 홀로 된 자아와 생명의 근원인 바다가 만나는 순간을 길게 땋은 머리가 머리끝에서 점점 퍼져 바닷물로 변형된 모습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순종은 머리카락과 물의 혼합을 통해 우주와의 합일, 즉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시공간과 그것에서 분출하는 에너지를 극대화하였는데, 이는 극적인 서사를 통해 에로티시즘을 인식하고 표현하는 방식이다. 

머리카락의 모티브는 평면을 넘어 입체와 설치로 연장되기도 했다. 2004년 서울시립미술관의 《공간》전은 사방이 흰 공간에 인조머리카락을 모서리에 쌓아 놓거나 작은 덩어리로 뭉쳐져 바닥에 흩뿌렸다. 가볍고 연약한 머리카락을 통해 공간을 인식시키고 섹슈얼한 이미지를 극대화하는 시도였다. 그는 특히 작품제작에 있어 공간과 여백에 대한 감수성을 강조하였는데, 여백을 통해 구조화되는 공간 자체를 작품의 일부로 보았다. 그는 이 전시에 작품이 설치된 공간을 ‘비무장지대’라고 칭하였고, 마치 산수화 속의 고요한 공간, 해방된 자아가 숨 쉬는 공간처럼 묘사하였다.

“비무장 지대에는 사랑도 미움도 없다. 기쁨도 슬픔도 없다. 경계가 없으므로, 혹은 너무나 경계가 또렷해서 오히려 의식은 예리한 칼날 같아 어둠 속의 그림자를 동강낸다. 나에게 공간은 무장이 해제된 자유로움이다. 무장되기를 기다리는 그리움이다”
이순종, 《공간》, 2004, 전시 서문

머리카락을 단지 신체의 일부가 아닌 복잡다단한 내러티브가 내제된 오브제로 보고 치유와 포용의 여성성을 묘사한 <Herstory>(2011)는 자신과 친정어머니, 시어머니의 머리카락을 잘라 붙여 달 표면의 분화구처럼 표현하였다. 제목에서 드러나듯 어머니에서 자신으로 이어지는 여성사에 스민 상처와 갈등이 달의 형상을 통해 봉합되고 치유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가 귀국하여 작가로서 활동을 시작한 1980년대 후반에서 1990년대로 이어지는 시기는 포스트모더니즘에서도 페미니즘 담론이 활발히 진행되던 시기였다. 이순종의 작업은 주로 페미니즘의 담론 안에서 해석되었으나 정작 그는 자신이 페미니즘 작가로 분류되는 사실이 편치 않았다고 고백한다. 실제로 자신의 삶이 가부장적 제도 안에서 안온하게 이루어져왔고 어떤 실천적인 활동을 통해 세상을 바꾸려는 의지도 없었기에 페미니스트로 불리는 것이 맞지 않는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는 큰 틀에서는 자신이 페미니스트적 관점을 가지고 있다고 하면서, 대중문화에서 상품화되는 여성성, 여성 스스로 자신을 남성의 취향에 맞추는 반주체적 행위 등에 대한 거부감을 피력하였다. 1)

그는 비단 여성문제 뿐만 아니라 여타의 사회적인 문제에 대해 가치 판단이나 이데올로기적인 잣대를 적용하지는 않는다고 밝히면서 일상에서 마주하는 이미지에서 흥미를 느끼고 그것을 통해 유머러스하게, 측면에서 터치하는 방식으로 드러낸다고 했다. 이런 방식의 작업은 2006년 아르코미술관의 《Oh My God!-사랑 사랑 내 사랑》전에서 보인 <떡볶이 공화국>(2006)이나 <산수화>(2006)에 적용되었다. 귀국 후 접했던 풍경 중 온 골목이 먹거리로 가득한 광경, 음식의 실사 이미지로 도배된 식당의 외관은 그에게 매우 충격적이면서도 흥미로운 소재가 되었고, 이러한 적나라한 이미지에 가볍고 말초적인 키치적 미감과 성적 은유가 내재되어 있음을 파악한다. 한국 사회가 직면한 혼란과 불안, 일회성, 성찰의 부재 등을 풍자하는 것이다. 

또한 ‘너무 귀여워서 한 입에 쏙 넣어버리고 싶은’ 바비인형(의 외관을 한 여성)이 나체로 뿌려진 소금 위에 앉아 손짓하는 <소금구이>(2006)에서 주체적 자아를 잃은 동시대의 여성상에 대한 비판적인 시선을 읽을 수 있다. 결국 이순종에게 페미니즘은 지금 우리 곁을 둘러싸고 있는 사회에 대한 애정 어린 시선의 한 축임을 다음의 언급을 통해 유추할 수 있다.

“있는 그대로 인식하는 것, 이 사회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똑바로 바라보는 것, 이 사회 더 나아가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어떤 일이든 나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 것 (물론 모든 일에는 책임자가 있지만), 왜냐하면 모든 것의 뿌리는 하나이기 때문이다”
이순종, 《Oh My God!-사랑 사랑 내 사랑》, 2006, 전시 도록

2010년 이후 이순종은 한방 침을 작품의 모티브로 활용하여 드로잉, 입체, 비디오 등의 다양한 장르로 확장한다. 침이 주는 촉각성에 주목한 그는 침술의 치유적 의미 뿐 아니라 침 자체가 가진 물성에 흥미를 느꼈다. 작고 뾰족하지만 정확한 자리에서 효능을 발휘하며 생명력을 불어넣는 침에 매료된 것이다. 그는 침의 예리함, 날카로움, 반짝거림, 유연함 등의 물성과 함께 ‘찌른다’는 행위에서 생명을 얻는 역설을 ‘백만대군’에 비유하였다. 우리 몸이 막히고 뭉친 기를 통하게 하며 긴장과 병고를 치유하는 능력을 세상 밖으로 확장하였고 이를 실천할 백만의 군대로 의인화 하였다. <전리품>(2018), <산>(2018), <축제>(2018)와 같은 작품에서 약침 60만개를 실크스크린용 망사에 일일이 꽂아서 고정시키는 과정은 생과 사의 경계, 고통과 치유 등 매우 이질적이며 모순된 두 면이 교차되는 지점이다. 또한 하나하나의 뾰족한 침 수천 개가 모여 이루어진 화면은 멀리서 보면 오히려 부드럽고 푹신하게 보이는 시각적 이중성을 지닌다. 이순종은 ‘찌른다’는 행위와 ‘찔린다’는 감각이 강한 에로티시즘을 불러일으킨다고 하면서, 모순된 개념이 공존하고 통합되는 이러한 과정이 삶과 죽음의 교차점에서 생명력을 드러내며 세상을 구원한다고 보았다. 이는 그가 오랜 시간 천착해온 함석헌 선생의 씨알사상과도 맞닿아 있는 지점이다.  

어린 시절부터 내재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역설적으로 삶을 희구하는 원동력으로 작동했고, 이순종은 이를 다양한 예술적 형식으로 작품에 투사하였다. 작고 사소한, 그러나 위대한 힘을 지닌 에로틱한 이미지와 사물들은 성적 욕망과 관능미를 넘어 우리의 일상 곳곳에 숨어있는 생명, 죽음에 맞선 에너지, 사람 사는 세상을 유기적으로 연결하는 질서를 부여하고 있다. 이러한 에로티시즘은 우리 삶을 지탱해주는 근원적인 힘을 불어넣으며 동시에 시각과 이성이 중심인 세계에 대안을 제시한다. 작고 사소한 일상적인 사물과 이미지들은 여성성을 담보한 에로티시즘이라는 형식을 통해 페미니즘을 넘어 인간과 세계를 구원하는 거대한 에너지를 발산하고 있으며, 이것이 이순종의 다채롭고 변화무쌍한 예술을 관통하는 의미일 것이다. 



임수진(1977~), 이화여대 대학원 미술사학과 석사, 전 엄미술관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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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순종과의 인터뷰, 2021년 12월 13일, 작가의 집.



이순종, <비상용 구급용 찬장>, 1996, 세라믹, 나무, 유리, 190×200×40cm




이순종, <미인도>, 2001, 한지에 먹, 지름 60cm




이순종, <산수화>, 2006, 디지털 프린트, 56×65cm




이순종, <소금구이>, 2006, 소금, 고추장, 혼합매체, 20×60×40cm




이순종, <산>, 2018, 인조 비단에 프린트, 연필, 침, 145×203cm(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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