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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하민수의 작품세계: 천으로 만든 공간에 수놓은 삶의 노래 | 박경화

현대미술포럼



하민수의 작품세계: 천으로 만든 공간에 수놓은 삶의 노래



하민수(1961~)는 변화와 격동의 시기였던 1980~1990년대 한국 미술계에 의미 있는 족적을 남긴 작가이다. 그는 홍익대학교에서 회화를 전공하고, 1985년 그룹 ‘메타복스(Meta-Vox)’의 창립 멤버로 미술계에 데뷔하여 기성 화단의 예술관에 도전한 작업으로 주목을 받았다. 이후 1990년대에는 그룹 ‘30 캐럿’을 결성하여 여성 작가로서의 의식을 가지고 왕성하게 활동하며 당대 미술계에 화두를 던졌고, 사회적 이슈에 대한 관심으로 주제를 확장하여 최근까지 꾸준히 작품을 발표하고 있다. 

하민수가 홍익대학교에 재학 중이던 1980년대 초반 한국 미술계는 모더니즘에 근간을 둔 추상미술이 주류를 이루던 시기였다. 이에 대한 크고 작은 비판의 목소리가 이어지던 가운데 그는 1985년 동료 작가들과 형식주의 미학을 극복하기 위한 조형 수단으로서 오브제에 주목할 것을 선언하며 그룹 ‘메타복스’를 결성했고, 오브제의 사물성 대신 표현성, 서술성을 회복함으로써 탈모던을 시도하고자 했다. 그들이 추구한 미학은 삶과 불가분의 것이 아니라 작가의 내면에서부터 비롯되며 손끝에서 만져지는 것이어야 했다. 하민수가 선택한 오브제는 천으로, 그에 의하면 천은 부드럽고 유연하여 얼핏 소극적으로 보이지만 다루는 방식에 따라 다양하고 적극적인 표현이 가능한 매체로서 평면 회화로부터 탈피하여 입체적인 공간감과 물질감을 만들어 낼 수 있는 매력적인 소재였다. 1) 

그는 초기작인 <태초에> 연작에서 패널 위에 광목 천을 붙여 볼륨을 만들고 부분적으로 채색하는 방식으로 작업했다. 《META-VOX》 창립전(1985)에서 발표한 <태초에>(1985)는 나무 패널 위에 흰 천을 붙이고 솜을 넣어 부조와 같은 입체감을 창출한 작품으로, 펼치면 평면적이나 겹치면 공간감이 생기는 천의 물성이 잘 드러난다. 이와 같은 천의 양면적인 속성은 하민수의 초기작에 나타나는 특징으로, 이는 그의 작업을 회화와 오브제 사이의 중간 지대로 해석하게 하는 단서가 되기도 한다. 또한 수채물감으로 채색한 여러 가지 숫자의 형상이 천의 주름에 의해 은밀하게 감춰지거나 혹은 드러나면서 수수께끼 같은 이미지를 연출하는데, 이것 역시 그가 초기에 중요하게 다룬 소재였다. 숫자는 보편적인 언어이자 개인의 주관적인 경험, 상상과 연관되는 등 다양한 상징성을 지닌 기호로서 모더니즘에서 소외된 미술의 내러티브를 회복하려 했던 메타복스의 이념을 실현하기 적절한 매체였다.

하민수는 이후 <아가(雅歌)> 연작을 제작하고 《META-VOX》 2회전(1986), 3회전(1987), 4회전(1988)에서 연속으로 작품을 선보였다. ‘아가(雅歌)’는 구약 성서의 하나인 아가서(Song of Songs)의 제목을 따른 것이다. 아가서는 표면적으로는 솔로몬 왕과 술람미 여인과의 사랑을 다루고 있으나, 이는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에 대한 비유로 풀이되며 그러한 관점에서 책 전체는 사랑에 대한 상징과 비유의 내용으로 가득하다. 즉 아가서 전체가 사랑에 대한 하나의 거대한 기호인 셈으로, 이를 작품의 제목으로 차용한 것은 이전 연작에서 다루었던 ‘언어로서의 기호’ 개념의 연장선에서 추상적인 감정인 사랑을 기호화된 방식으로 표현하고자 한 작가의 의도를 보여준다. 

이 연작에서는 이전 작업에서 지지대로 쓰였던 패널이 제거되고 작품 자체가 유기적인 생명체의 형상을 가짐으로써 오브제로서의 속성이 강화되었다. <태초에> 연작이 사각형의 패널이라는 바탕재에 토대를 두고 있다는 점에서 캔버스를 연상시킨다면, <아가(雅歌)> 연작은 본격적으로 캔버스를 벗어난 것처럼 보인다. 이 시기는 작가가 조형적 실험을 계속하면서 모더니즘의 어법에서 벗어나 내면의 정서를 끌어낼 수 있는 방법을 찾는데 집중했던 시기이다. 하민수는 밋밋한 광목 천이 아닌 요철이 있는 골판지, 레이스 천 등 입체적인 질감이 강한 재료를 접착제로 붙여 유기체의 형상을 구체화했으며, 수채물감으로 채색하는 기법 대신 색한지를 사용했다. 따라서 흰 천의 부드러운 재질감이 바탕을 이루었던 초기작에 비해 거친 마티에르 같은 질감과 원색적인 색채는 표현주의적인 효과를 나타낸다. 

모더니즘의 대안을 찾는데 몰두했던 하민수의 작업은 1990년대 들어 주제와 양식 모두에서 큰 변화를 맞이한다. 그는 1989년 메타복스 해체 후 예술의 목적을 자신의 삶에서 찾고자 하는 결심을 더욱 굳혔다. 비슷한 시기에 이어진 세 자녀의 출산과 육아로 작업을 지속하는데 어려움을 겪었던 작가는 가부장적인 사회 구조 속에서 여러 제약으로 고비를 맞이하는 여성 작가들의 현실을 고민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당시 여성 미술인들이 공통적으로 인식했던 문제이기도 했다. 그 결과로 하민수는 1993년 동료 여성 작가 9인과 함께 ‘30 캐럿’을 결성하고, 남성 중심 이데올로기가 지배하는 당대 한국 사회, 그리고 그것의 축소판인 미술계 내에서 여성으로서의 자아를 지닌 주체적 미술가로 바로 서고자 하는 열망을 작업에 담아내기 시작했다.

하민수는 새 작업을 구상하면서 조형 기법에도 변화를 주었다. 우선 천의 사용 목적이 달라졌는데, 메타복스 시절에는 천을 통해 이상적인 미학을 탐구했다면, 이 시기부터는 자전적인 표현을 하는데 더 집중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제2회 30 캐럿전: 남성실재 – 흔들리는 고전주의》(1993)에서 선보인 <나는 왕이로소이다. 나는 XY로소이다.>(1993)는 기존 작업과 확연히 달라진 점을 보여준다. 이 작품에서부터 재봉틀을 사용하여 여러 가지 천 조각을 이어붙이고 그 위에 형상을 드로잉하듯 박음질하는 작가 특유의 조형 기법이 본격적으로 나타났다. 작가는 새로운 기법을 사용하게 된 계기에 대해 이것이 단순 노동의 반복으로 이루어진 가사 활동을 연상시키는 동시에, 드로잉에 대한 개인적인 흥미와도 잘 맞는다는 점에서 당시 본인을 가장 잘 드러낼 수 있는 방식이었다고 회고했다. 2) 재봉틀을 사용해 빠른 속도로 바느질하는 과정에서 느껴지는 손맛과 그로 인해 수없이 겹쳐지는 드로잉적인 선들은 실존적인 행위의 결과물이었다. 
  
이듬해에 제작한 두 작품 <김씨가 이씨를 낳고, 이씨가 하씨를 낳고, 하씨가 신씨를 낳고…>(1994)와 <날개 – 갇혀진 비상 Ⅱ>(1994)는 내용과 형식 모두에서 주목할 만한 작품이다. 전자는 《제3회 30 캐럿전: 뿌리찾기》(1994)에 발표된 작품인데, 작가는 이를 통해 한국성의 뿌리를 부계 중심이 아닌 모계 중심의 계보에서 찾고자 했다. 제목에 등장하는 김씨, 이씨, 하씨, 신씨는 각각 작가의 외조모, 모친, 작가 본인과 딸의 성씨이다. 대부분의 사회에서 따르는 부친의 성이 아닌 여성의 성을 수용하여, 인간의 혈통과 인격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어머니에 대한 기억을 상기시키고 모계 중심의 족보를 새로 쓰고자 한 시도이다. 이 작품은 각기 세로 3미터 길이에 달하는 3장의 천으로 구성된 대형 설치 작업으로, 중앙의 푸른 천을 중심으로 좌우에 붉은 천이 대칭을 이룸으로써 제단화와 같은 형상을 띤다. 이처럼 작가가 큰 규모로 작품을 제작하는 것은 초기 작품에서부터 나타난 특징인데, 흔히 바느질이 여성적인 이미지로 인식되는 것과 달리 그의 작업에서는 큰 규모와 재봉선의 속도감에서 비롯된 압도적인 에너지를 느낄 수 있다. 이 작품 역시 여러 천 조각에 수많은 실을 박음질하여 제작한 것으로, 중앙에 새겨진 굵고 검은 기둥은 여성의 자궁을 의미하며 좌우의 가느다란 기둥은 희생당해야 했던 여성들의 현실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한편 <날개 – 갇혀진 비상 Ⅱ>은 ‘여성주의 미술전’을 표방했던 《여성, 그 다름과 힘》(1994)전에 발표한 작품으로서 의미가 깊다. 이 전시는 “여성적 특성과 그 다름의 힘을, 즉 여성미술의 힘을 보여주고자 하는 의도에서” 3) 기획된 전시로, 하민수는 날개를 달고 비상하고자 하나 현실적인 한계에 갇혀 웅크리고 있는 여인의 모습을 형상화했다. 특별히 이 작품의 이미지는 모태가 지닌 원초적인 생명 창출의 본능과 힘을 다룬 연극 <태(胎)>(1997)의 메인 이미지로 사용되기도 했다. 4) 1997년 국립극장 상연 당시 극장 전면을 둘러싼 대형 현수막과 각종 배포자료에 삽입된 <날개 – 갇혀진 비상Ⅱ>의 이미지는 비상의 꿈은 좌절되었으나 내면에 폭발적인 에너지를 응축하고 있는 여체의 형상을 통해 연극을 효과적으로 시각화했다.

30 캐럿의 활동이 2000년까지 이어지면서 하민수는 주제를 환경, 인간, 생명 등으로 조금씩 넓혀 갔다. 2013년부터 작가는 ‘ART 제안’이라는 그룹을 조직하여 세월호 참사, 위안부, 코로나 펜데믹 시대에 소외된 이들 등을 주제로 사회 참여적인 미술을 실천해오고 있다. <너희를 결코 잊지 않을게>(2014)와 같은 최근 작품들은 천 위에 재봉틀로 수놓는 기존의 조형 방식을 그대로 따르되 전보다 부드럽고 섬세한 색감과 질감 표현 등으로 변화를 준 것이다. 일견 그의 작업은 연대별로 다른 양상을 띠는 것처럼 보이지만, 예술은 삶과 분리될 수 없다는 일관된 메시지가 그의 작업 전반을 관통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예술지상주의에 대한 문제 제기에서 출발하여 작가의 개인적인 삶으로, 주변의 삶으로, 더 나아가 우리 곁에 존재하는 이들의 삶으로 확장되며 천에 수놓아진다. 1980~1990년대의 한국 미술을 이야기할 때 하민수가 빠지지 않는 이유, 그리고 현재의 시점에서 그의 이름을 다시 불러보는 이유는 그의 작업이 늘 당대의 삶에서 비롯된 필요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박경화(1985~), 이화여대 대학원 미술사학과 석사, 현재 국립현대미술관 소장품자료관리과 재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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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하민수와의 메일 인터뷰, 2021년 12월 21일.

2)  하민수와의 인터뷰, 2020년 6월 22일, 경기도 과천.

3)  김홍희, “여성, 그 다름과 힘 - 여성적인 미술과 여성주의 미술 - ”, 『여성, 그 다름과 힘』, 삼신각, 1994, p. 8.

4)  오태석이 지은 희곡으로 1973년 안민수 연출로 드라마센터 극단에 의해 초연된 이후 여러 번에 걸쳐 국내외 무대에서 소개되었다. 1997년에는 작가 오태석이 직접 연출을 맡고 국립극단이 공연했다.  




하민수, <태초에>, 1985, 천에 수채, 솜, 130x210cm 




하민수, <아가(雅歌)>, 1987, 천, 골판지, 한지, 솜, 130x250cm 




하민수, <김씨가 이씨를 낳고, 이씨가 하씨를 낳고, 하씨가 신씨를 낳고…>, 1994, 
천에 바느질, 278x108, 278x162, 277x104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하민수, <날개 – 갇혀진 비상 Ⅱ>, 1994, 천에 바느질, 263x176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하민수, <너희를 결코 잊지 않을게>, 2014, 천에 바느질, 65x141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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