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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홍순주의 결과 겹 | 정하윤

현대미술포럼



홍순주의 결과 겹



홍순주(1954~)는 한국적인 재료를 사용하면서 추상의 언어로 작업을 이어가는 미술가이다. ⟪대학미술전람회⟫(이하 대학미전)에서 대학교 2학년 때 동상, 3학년 때 은상, 4학년 때 동상을 탔다. 스물 다섯 살에는 ⟪대한민국미술전람회⟫(이하 국전)에서 특선을 거머쥐었고, 서른 살에는 동덕여대 교수로 임용되었으며, 은퇴 이후에도 활발한 작품 활동을 보이고 있다. 듣기만 해도 화려한 이같은 이력 뒤에는 한국화에 대한 한결 같은 작품에의 몰두와 고민이 있었다. 홍순주는 한국화를 대학에서 처음 배웠다. 그가 수학했던 동덕여대는 학부제로 학생을 선발했고, 1, 2학년 때는 다양한 재료를 접할 수 있었다. 작가는 경기여고 미술부에서 그리던 수채화와는 전혀 다른 매력을 한국화에서 느꼈다. 한편, 홍순주가 대학을 다니던 1970년대는 공모전의 시대였다. 매년 과해지는 국전에 대한 열기로 국가에서는 대학생들만 참여할 수 있는 대학미전을 별도로 만들었는데, 여기서 홍순주는 세 차례 상을 받았다. 

그 중에서 <한정>(1973)은 옥수수 밭 앞에 있는 어린 아이 세 명의 그림으로, 김기창의 작품을 참조하여 만든 것이다. 사생을 중요시하던 홍순주는 직접 말죽거리에 가서 옥수수를 뿌리 채 뽑아 와서 그림을 그렸다. 이화여대 대학원으로 진학한 홍순주는 국전에서 문공부장관상을 수상했다. 현재 국립현대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하오>(1979)라는 작품이다. 친정어머니가 모델을 하고, 남동생의 어린 시절 사진을 참고로 하여 그린 이 그림은 사실적인 묘사 방식을 기본으로 한 작품이다. 각종 미술 대회에서 상을 휩쓸며 인정받던 홍순주의 그림은 1980년대 중반 무렵, 크게 변한다. 작품이 변한 직접적인 계기는 ‘조각보의 발견’이었다. 이전에 조각보는 한국의 집집마다 있는 흔한 물건이었다. 이렇게 일상 곳곳에 있던 것이 작가의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홍순주는 재료를 사러 인사동에 나갈 때도 조각보가 걸려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익숙한 소재를 재발견하면서, 조각보가 작품이 될 수도 있으리라 생각하게 되었다.

작품이 급하게 변한 것은 본인 스스로 고백하듯, 홍순주가 워낙 호기심이 많은 성격이기도 했지만 환경의 변화도 무시할 수 없다. 1980년대 홍순주는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았다. 이전에는 긴 호흡으로 한 번에 큰 화면을 채워낼 수 있었지만, 더 이상은 그렇게 그릴 수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짧은 호흡으로도 작업을 지속할 수 있는 방식이 필요했고, 새로운 방법을 모색하던 중에 발견하게 된 것이 조각보였다. 처음에 홍순주는 조각보를 그대로 재현했다. 올 하나하나, 색감 그대로 마치 사진으로 찍은 것처럼 조각보를 그렸다. 그러다가 점차 조각보의 결에 집중하게 되었다. 씨실과 날실이 교차하며 만들어 내는 조각보의 결을 물기를 머금지 않은 붓으로 수없이 그어가며 까슬까슬한 촉감을 살렸다. 본격적인 추상화의 시작이자 이후 작가가 천착하게 되는 ‘결’ 시리즈의 탄생이었다.  

사실 <결> 시리즈는 조각보 보다 더 이전의 작품과도 연결이 된다. 1979년 작품인 <하오>에서 보이는 어머니의 치마나 1973년에 그린 <한정>의 베 바지 결에서 그 전조를 볼 수 있다. 한복의 천이 씨실과 날실이 교차하여 이루어지는 것처럼 홍순주는 그림에서 가로선과 세로선을 사용하여 그 질감을 묘사하였다. 그러나 작가 자신은 그보다도 일찍, 대학교 1,2학년 무렵 머리카락을 가닥가닥 그렸던 동양화의 방식에 매료된 시절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고 설명한다. 1) 한국화에서는 머리카락 한 올, 한 올을 먹 선으로 그리는데, 대학 입학 초기만 해도 수채화에 훨씬 익숙했던 홍순주는 대학교에서 처음 한국화를 접하며 이렇게 선으로 그리는 것이 너무 신기했다고 회고한다. 그렇게 연결시킨다면, 작가는 한국화와의 첫 만남에서 받았던 가장 강렬했던 인상을 계속하여 작업의 방식으로 사용하고 있는 셈이다. 

홍순주의 작품 제목은 대부분 ‘결’이다. 그런데, 홍순주의 ‘결’은 단지 한 겹이 아니다. 그의 ‘결’은 무수히 겹쳐지면서 ‘겹’을 만들어낸다. 작가 작업의 또 다른 키워드이다. 작가의 작업은 그 어떤 것도 한 번에 끝내는 법이 없이 언제나 무수한 겹으로 만들어진다. 그는 <결> 시리즈에서 가로선과 세로선을 셀 수 없을 만큼 반복하여 긋는다. 한 겹 바르고, 마르기를 기다렸다가 또 한 겹 올리고, 또 기다렸다가 또 한 번 올리면서 중첩한다. 그래서 작품 하나에는 무수히 많은 시간이 농축되어 있다. 도판으로 보면 홍순주의 작업은 강렬하다. 흑백이 주조를 이루고, 종종 빨강이나 파랑처럼 강렬한 색채가 화면 전체를 뒤덮기에 그렇다. 그러나 작품을 마주하면 단단하게 쌓아 올린 화면에 부드러운 느낌이 있다. 시간을 들여 쌓인 씨실과 날실의 힘인 거다. 

작가가 많은 시간을 들여 겹겹의 층을 쌓아 올리는 이유를 생각해보면 한국화의 채색 방법과 연관시킬 수 있다. 전통적으로 한국화는 여러 번 쌓아 올려 색을 만들어 낸다(홍순주의 초기 작업에서 사람의 피부색도 여러 번 칠해 올려진 결과다). 칠하고, 마르기를 기다렸다 얹고, 또 마르기를 기다렸다 다시 얹으면서 깊이 있는 색을 만들어낸다. 새로운 색을 칠할 때, 아래 있는 색을 덮는 유화나 아크릴과는 달리 한국화의 채색은 아래 있는 색을 은은하게 베어 나오게 한다. 그런 의미에서 홍순주의 거대한 추상 작품 아래 쌓여진 무수한 붓질의 겹은 이같은 한국화의 채색 방법을 극대화 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1990년대 나타나는 홍순주의 입체 작품도 마찬가지다. 평면 작품에서 선이 겹쳐져 색이 우러 나왔다면, 입체 작품에서는 실재 천이 여러 겹 중첩되어 색의 섬세한 변화를 보여준다. 예를 들어 작가의 입체 작품 중 1호짜리 나무 박스 안에 삼베, 모시 등을 담은 작업이 있다. 이는 멀리서 보면 추상화처럼 보이지만 실재 천을 구겨 담은 입체 작품이다. 부분 부분마다 어떤 색의 천이 몇 겹으로 겹쳐졌는지에 따라 색이 오묘하게 다르다. 머릿속으로 생각할 때는 흰 모시 위에 노란 모시를 겹치나, 노란 모시 위에 흰 모시를 겹치나 별 차이가 없을 것 같지만 직접 천을 겹쳐 보면 무슨 색을, 어떤 순서로, 얼마만큼 겹치는지에 따라 오묘하고 미묘한 변화가 확실히 있다.

작가는 이렇게 겹쳐지는 옷감은 경기여고 경운박물관에서의 전시 ⟪옛 속옷과 침선⟫를 보고 직접적인 영감을 받았다고 말한다. 2) 더불어, 민속박물관에서 알게 된 왕비의 겉옷 아래로 15겹의 옷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상당히 인상적이었다고도 회고한다. 홍순주의 작업이 여성들의 몸을 쌓고 있던 무수한 겹에서 영감을 받았다면, 그 작품들은 수많은 겹으로 자신을 쌓고, 드러내지 말아야 했던 여성들의 삶의 모습을 추상적으로 재현한 것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겹겹이 쌓인 화면 아래 민낯을 드러낸 작품도 있다는 것이다. 

2019년 동덕아트갤러리에서 대거 선보인, 먹을 여러 번 쌓아 올린 흑색의 바탕 위에 흰 색의 커다란 붓질이 시원하게 지나가는 회화 작품이다. 대단히 즉흥적인 붓질이다. 놀랍게도 이 즉흥적인 붓질은 대부분 <결> 시리즈에 존재한다. 다시 말해 묵묵히 쌓아 올린, 정적으로 보이는 화면 아래 사실은 이토록 신나는 붓질이 있는 것이다. 이는 완전히 정제된 붓질로만 구성되었을 것으로 생각하기 쉬운 작가의 작품에 반전이 있는 지점이다. 홍순주는 그 에너지 가득한 붓질에 대해 “너무 절제하고 살아서 이런 즉흥적인 붓질로 좀 푸는 게 아닌가”라고 말한다. 3) 가정과 사회에서 스스로 절제하며 지내다가도 그림 앞에 서서는 내재한 에너지를 뿜어냈다는 말일 것이다. <결> 시리즈에서 그런 즉흥적인 붓질이 무수히 반복되어 그 즉흥성을 가렸던 것과 달리, 그 시원한 붓질을 드러내는 작업이 해방감을 준다. 작가의 앞으로 행보가 더욱 기대된다. 



정하윤(1983- ), 캘리포니아 주립대 샌디에이고 캠퍼스 미술사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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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홍순주와의 인터뷰, 2021년 12월 9일, 인사동.

2) ⟪옛 속옷과 침선⟫, 경기여자고등학교 경운박물관, 2006년 4월 27일~7월 15일. 홍순주와의 인터뷰, 2021년 12월 9일, 인사동.

3) 홍순주와의 인터뷰, 2021년 12월 9일, 인사동.




홍순주, <한정>, 1973, 화선지에 먹, 담채, 182x119.2cm, 동덕여자대학교 박물관




홍순주, <보자기에서>, 1994, 한지에 먹, 채색, 119.5x119.5cm, 동덕여자대학교 박물관 




홍순주, <결>, 2004, 모시, 나무, 31.6x22.7cm




홍순주, <결>, 2016, 한지, 먹, 호분, 60.5x72.5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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