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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한국화의 경계를 넘어: 정종미의 종이와 색채 실험 | 박은영

현대미술포럼



한국화의 경계를 넘어: 정종미의 종이와 색채 실험 



한국화의 전통을 계승하는 동시에 그 양식과 내용을 현대적으로 변화시키고자 하는 모색은 한국 미술에서 오랜 기간 논의되어 온 주제이자 과제이다. 정종미(1957~)는 자신의 노동을 바탕으로 한 종이와 안료에 대한 실험과 색채의 탐구를 통해서 한국화의 형식과 내용 모두에 새로운 언어를 부여한 작가이다. 정종미는 대학교에서 동양화를 전공하였지만, 미국 유학을 통해 종이에 대한 관심을 본격적으로 발전시키게 되었다. 그는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와 동대학원 동양화과를 졸업한 후 작가활동을 펼치다가 1994~1995년 뉴욕 파슨스 디자인 스쿨(Parsons School of Design)과 디외 도네(Dieu Donne) 종이 공방에서 수학했다. 미국에서 공부하는 동안 세계 각국의 다양한 종이를 접하게 되면서 종이를 작품을 위한 바탕 재료가 아닌 작품의 주체로 바라보게 되었고, 귀국 후에 종이의 물질적인 특성을 탐구하는 작품들을 제작하게 되었다. 특히 전세계의 종이를 연구하는 과정에서 그는 한지의 우수성에 대해 발견할 수 있었고, 두껍고 질긴 닥종이를 사용하는 작업들을 발전시키게 되었다. 

1990년대 중반에 시작한 <종이부인> 연작은 종이에 대한 실험을 본격적으로 발전시킨 정종미의 대표적 작품이다. 1990년대 제작된 <해족부인>, <수묵부인>, <황토부인> 등에서 작가는 황토, 삼지닥, 계란 껍질, 아이리스 풀 등 다양한 재료들을 종이를 제작과정에서 혼합하여 독특한 질감과 색감의 종이를 만들어냈다.1)  여기에 콩즙을 반복적으로 바르거나 들기름과 안료를 섞어서 바르는 방식을 통해서 종이에 투명한 피막을 형성하고 시간 속에서 축적된 색채 효과를 만들어냈다. 또한 종이를 찢고, 붙이고, 바탕에 요철을 만드는 등 다양한 종이기법을 사용해서 <종이부인> 속 여성들의 이미지를 재현하였다. 따라서 재현된 여성의 모습은 배경과 분리될 수 없으며, 재료를 준비하는 과정은 작품의 주체로 포함되고, 바탕제는 이미지를 구현하는 주요 매체로 전환하게 된다.

정종미는 자신의 노동을 통해 수작업으로 준비된 종이의 특성을 여성주의적 관점에서 이해하였다. “한반도의 땅에 오랫동안 뿌리를 틀고 자생하여 온 닥의 유전 형질과 한국 여인의 그것이 아주 잘 일치함을 발견”한다는 작가의 언급에서 나타나듯이, 닥종이의 질긴 습성과 색이 부드럽게 스며드는 특성을 여성의 인내와 강인한 근성, 포용력과 연계하여 이해함으로서 재료의 특성을 여성주의 미학으로 풀어내었다.2)  이러한 여성주의적 시각은 작품의 주제를 통해서도 전달된다. 1990년대 <종이부인> 연작에 표현된 여성들의 모습은 얼굴이 자세히 표현되지 않은 무명의 여성들이다. 그러나 이 무명의 여성들은 대형 전신상의 모습으로 정종미의 작품을 통해 초상화의 중심을 차지하게 되고, 자연적인 색채와 종이의 질감을 통해서 시각적, 촉각적인 경험으로 그 존재감을 드러낸다. 

무명의 여성을 표현하는 것에서 나아가, 2000년대 제작된 <종이부인> 은 역사 속 실재하는 여성들을 대상으로 하였다. 정종미는 유화부인, 선덕여왕, 허난설헌, 논개, 매창, 명성황후, 유관순 등 시대가 요구하는 여성상에 순응하지 않고 스스로 주체적인 삶을 이끌어간 여성들을 선택하여 다양한 이미지와 기법으로 재구성하였다. 대표적으로 <역사 속의 종이부인-유화부인>(2009)에서 보이는 것처럼, <종이부인> 연작에 재현된 역사 속 여성들은 보다 구체적인 인물의 표현과 다채로운 색채의 사용이 특징을 이룬다. 종교화에서 사용되는 형식인 세 폭 제단화로 구성된 이 작품에서 유화부인은 중심 패널에 종이와 비단으로 재현되었다. 푸른색 바탕에 유화부인은 금색 비단에 빨강 무늬로 장식된 고구려 전통 의상을 입고있으며, 그 양쪽 패널에는 고구려 여인들의 모습이 고구려 고분벽화와 일본 고송총(다카마쓰총) 벽화의 인물과 의상 양식에 대한 작가의 연구를 바탕으로 그려졌다.3)  

유화부인은 고구려 건국신화 속 주몽의 어머니로 잘 알려진 인물이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등에 기록된 그의 생애는 아버지인 하백과, 연인이었던 해모수, 그리고 아들인 주몽 과의 관계 속에서 기술된다. 이처럼 남성과의 관계 속에서 정체성을 형성하고 역사적인 의미를 가지게 된 기록 속 유화부인과 달리 <종이부인> 연작에서의 유화부인은 다채로운 색채의 비단과 장식의 사용을 통해서 구체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주변의 배치된 여성들과의 관계 속에서 설명된다. 여성 작가의 개인적인 시각을 통해 재구성된 여성들의 이미지와 서사는 한국 역사와 사회 속에서 타자로 존재한 여성을 역사 서술의 주체이자 중심으로 전환시킨 작가의 시도를 보여준다.  

정종미의 작품들에서 보이는 다양한 색채의 사용은 수묵 중심의 한국화의 역사와 교육에 대한 회의에서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가 대학에서 동양화를 공부하던 1970년대 말 1980년대 초는 수묵화 운동으로 대표되는 것처럼 먹을 사용하여 정신성을 표현하는 동양화 전통의 계승과 이를 현대적으로 표현하는 매체의 탐구가 한국화단을 지배하였다. 해방 이후 일제 식민지 잔재를 청산하고 한국미술의 정체성 확립하는 과정에서 채색화는 일본화의 채색기법과의 관계가 강조되면서 왜색으로서 한국미술사에서 경시되었다. 이러한 편향된 한국화에 대한 이해에서 벗어나 작가는 고구려 벽화, 고려 불화, 민화 등 한국 회화의 역사 속에서 사용된 채색의 재료와 기법에 대해 연구하기 시작했고, 이를 작업적으로 표현하였다. 

2000년대 초반부터 제작된 <몽유도원도>(2000~), <황색산수>(2001), <오색산수>(2001) 등은 다양한 색채를 사용해서 추상적으로 산수화를 표현한 작가의 대표적인 작품들이다. 특히 조선 초기 대표적인 산수화인 안견의 <몽유도원도>(1447)를 재해석한 <몽유도원도>(2002)는 전통적인 산수화를 한국화의 재료와 기법, 이미지 실험의 장으로 전환시킨 작가의 도전을 보여준다. 이 작품에서 정종미는 종이에 천연 안료로 제작된 색채를 여러 번 덧칠하고 음영의 효과를 주어 색채의 변주와 화면의 깊이감을 만들어낸 후, 그 위에 여러 색채로 염색된 삼베나 모시 조각들을 화면의 중심과 주변에 콜라주하였다. 겹겹이 쌓인 색채들과 천 조각들은 화면에 공간감을 부여하는 동시에, 시각적 경험에 있어서 변화를 만들어내면서 관객들에게 풍경을 감상하는 듯한 인상을 전해준다. 작가는 조선시대에는 수묵이 이상을 담기에는 적합한 재료였지만, 이 시대의 이상을 담아보고자 색을 사용했다고 밝힌 바 있다. 4) 산수화를 추상과 색채로 재해석하는 과정을 통해서, 작가는 수묵과 정신성에 중점을 둔 한국화를 둘러싼 기존의 논점과 가치에서 벗어나 한국화의 영역을 확장하고 이를 동시대 미술의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냈다. 

매체의 한계를 벗어나는 정종미의 작업은 최근 3차원 공간으로 확장되었다. 이미 종이와 천을 이용한 다양한 기법으로 평면작업에서 입체감과 실체감을 주는 작품들을 선보인 작가는 <여성성에 바치는 헌사>(2010~) 연작에서 천과 종이를 이용한 설치 작업을 제작하였다. 2018년 페이퍼 하우스 갤러리에 전시된 <여성성에 바치는 헌사-Buddha in Women)>는 회화, 조각, 종이 설치가 함께 어우러진 혼합매체 작업이다. 벽면에는 고려불화의 이미지를 떠올리는 <오색불>과 종이꽃으로 여성의 몸이 표현된 <지화부인> 등 평면 작품들이 걸렸고, 바닥은 오방색의 종이꽃들과 찢어진 책 페이지들, 염색된 천조각들로 채워졌다. 이 공간 한가운데에는 닥종이를 여러 겹 발라 입체로 만들어낸 붉은 빛의 반가사유상이 세워졌다. 반가사유상 안에는 전등이 설치되어 밤에는 은은한 빛을 발하였다. 

작가에 따르면 <여성성에 바치는 헌사>는 한국 여성들을 위한 제례 의식을 열고자 하는 의도에서 시작되었다. 5) 포용력과 인내, 희생정신을 지닌 여성의 이미지는 종교적인 구분을 넘어 부처와 보살로 표현될 수 있다고 보았고, 반가사유상은 이러한 부처이자 보살로서의 여성의 삶이 시각화 될 수 있는 대표적인 도상이라고 본 것이다. 중성적이고 유연한 미를 지닌 반가사유상을 통해 구현된 여성의 삶과 경험은 남성에 반대항으로서 아니라 다변적이고 유연한 모습을 지닌 존재로서의 여성의 이미지를 만들어내고자 한 작가의 시각을 반영한다. 전시 공간 내에 펼쳐진 제례 의식을 통해서 한국 역사 속 여성들의 삶과 경험은 현재에서 재조명되는 동시에, 동시대 관객들과의 만남과 소통을 통해서 그 의미를 다시금 만들어내게 된다. 

이처럼 정종미는 공예와 회화, 남성과 여성, 한국화에서의 물질과 정신, 수묵과 채색, 재료와 내용, 추상과 구상 등의 미술 내 다양한 이분법적 구분들에서 벗어나 한국화의 경계를 넘는 시도들을 지속해왔다. 그리고 한국화에 대한 실험과 탐구를 자신의 노동으로 실현시키는 과정에서 미술사와 역사 속 여성의 존재와 노동을 강조하고 그 중요성을 재평가하는 기회를 만들어냈다. 또한 작가 스스로도 연구자이자 교육자로서 자신의 역할을 확장해왔다. 그는 채색화 전통과 재료에 대한 연구를 후배 미술학도들과 나누고 그들의 창작활동에 도움이 되고자 2001년 『우리 그림의 색과 칠: 한국화의 재료와 기법』을 출판하였다. 이 책은 한국과 미국, 중국, 일본에서의 자료조사와 안료, 먹, 접착제, 종이의 역사와 종류, 제조방법 등에 대한 작가의 8여년간의 연구를 종합한 결과물이다. 또한 2008년부터 고려대학교 디자인조형학부 교수로서 한국화 교육에 힘쓰고 있고, 대학 부설 색채연구소를 설립하여 색채 연구에 대한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고 있다. 다양한 영역에서 지속되는 정종미의 연구와 실험은 현대 한국화에 여전히 존재하는 시차를 극복하고 이의 동시대적인 의미와 가치를 알리는데 기여하고 있는 작가의 노력과 활동을 확인시켜 준다. 



박은영(1982- ), 미국 캔자스 대학교(University of Kansas) 미술사 박사, 미국 케이스 웨스턴 리저브 대학교(Case Western Reserve University) 미술사학과 조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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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정종미, 「종이부인」, 1999, https://jungjongmee.com

2)   정종미, 「종이부인」, 2004, https://jungjongmee.com

3)   정종미, 「역사 속의 종이부인」, 2009,  https://jungjongmee.com

4)   정종미, 「현대산수」, 2000, https://jungjongmee.com

5)   정종미와의 전화 인터뷰, 2022년 1월 17일




정종미, <역사 속의 종이부인-유화부인>, 2009, 한지, 천, 안료, 염료, 180x450cm




정종미, <몽유도원도>, 2002, 장지, 안료, 염료, 천, 135x327cm





정종미, <여성성에 바치는 헌사-Buddha in Women>, 2018, 서울 페이퍼 하우스 갤러리 전시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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