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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윤효준의 ‘여성되기’의 추상 | 조수진

현대미술포럼



윤효준의 ‘여성되기’의 추상  



1985년 여름, 종로구 사간동 그로리치 화랑에서는 윤효준(1950~)의 첫 유화 개인전이 열렸다. 폭 5m에 달하는 거대한 크기의 화면, 식물의 형태를 상징화한, 그 자체로 신체 행위의 물리적 흔적이 된 역동적 이미지, 원색의 붓질 위를 뒤덮은 대담한 흰색 물감의 마티에르는 작가의 예술적 활력을 생생히 드러내기에 충분했다. 당시 이화여대 대학원 서양화과를 갓 졸업했던 여성 작가 윤효준은 남성 못지않은 에너지를 뿜어내는 이 같은 작품으로 연이어 《인화랑 개관기념 정예20인초대전》(1986, 인화랑), 《토탈미술관 개관기념 초대전 “한국 현대미술의 오늘”》(1988, 토탈미술관) 등에 초대되며 화단의 주목을 받았다. 윤효준의 회화는 이처럼 1980년대 중반부터 미술계에 소개되었으나, 사실 작가의 경력은 이미 1980년대 초반 판화 분야에서 시작되었으며 판화작업에 쏟은 그의 열정 또한 회화 못지않게 뜨거운 것이었다. 

1970년대 초반 서울대학교에서 응용미술을 전공했던 윤효준은, 학부 졸업 후 순수미술로의 전향을 꿈꾸며 판화가이자 서울대 서양화과 교수였던 한운성(1946~)에게 개인적으로 판화를 배웠다. 한운성은 1973년 떠난 미국 유학 중 체득한 판화 기법을 『판화세계』(1978)라는 저술을 통해 국내에 전파해 한국 현대판화의 발전에 이바지한 작가로, 윤효준은 그로부터 동판화 제작 기술을 본격적으로 전수한 여러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1970년대 말엽에 이르러, 윤효준은 한운성의 여성 제자들이었던 동료 작가 이영애, 박광진, 전지원, 조수정 등과 여성 판화가들만의 모임을 만들자는 의견을 교환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1980년, 서울대와 이화여대 출신 여성 작가 6인이 결성한 한국 최초의 여성 판화가 단체 ‘서울프린트클럽(Seoul Print Club)’이 창립전을 개최하며 미술계에 등장했다. 

창립 당시 서울프린트클럽의 회원들은 ‘판화’와 ‘여성’을 핵심적 조건으로 삼고 예술적 교류와 현대판화의 발전을 도모하겠다는 목표를 밝혔다. 여성의 시각으로 판화 매체를 탐구하면서, 신진 여성 작가들에게 더 많은 작품 발표의 기회를 제공하겠다는 이 단체의 의지는 40년이 넘도록 유구히 이어지고 있다. 지난해 ‘서울프린트클럽’은 제43회 정기전 《SEOUL PRINT CLUB 2022》을 개최했는데, 한국 현대미술사에서 여성 미술가 단체의 이 같은 장기적인 활동은 사례가 매우 드문, 역사적으로 의미 깊은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윤효준은 ‘서울프린트클럽’의 출범과 초창기 활동에 주도적으로 관여했을 뿐 아니라, 1990년대까지 꾸준히 단체전에 작품을 출품함으로써 한국 여성판화 미술사 창조의 주역이자 산증인이 되었다. 

전통판화나 실용적 목적의 판화가 아닌 예술판화로서의 한국 현대판화는 1950년대 말 이항성, 유강열, 이상욱 등에 의해 처음 나타났다. 한국 판화는 이후 한국판화협회(1958), 한국현대판화가협회(1968) 같은 판화가 단체의 창립과 《서울국제판화비엔날레》(1970) 등의 국제전 개최를 통해 빠르게 발전해 나갔는데, 이 과정에서 김정자(1929~), 이성자(1919~2009), 박래현(1920~1976), 석란희(1939~) 등이 여성으로서 판화작업을 독자적으로 진행한 바 있으나, 여성 판화가들 간의 연대를 통해 단체 결성이나 그룹전 개최가 시도된 적은 없었다. 회화나 조각 같은 전통적 미술 장르에서 여성 작가들끼리 결집했던 가장 이른 예로는 1971년 서울대, 이화여대 출신 여성 미술가들이 설립한 ‘표현그룹’, ‘한국여류화가회’(1973), ‘한국여류조각가회’(1974) 등이 있었으며, ‘서울프린트클럽’은 바로 그 뒤를 잇는 판화 장르에서의 첫 여성 미술가 결집체였다.

《서울프린트클럽 창립전》을 전후해 윤효준이 선보였던 주된 판화 경향은 기하학적 추상 이미지를 탐구하는 동판화였다. 1950년대 이래 한국 현대판화의 주류는 목판화와 석판화, 그리고 1960년대부터 그 기법이 국내에 도입된 실크스크린 판화였다. 동판화는 1970년대에 이르러서야 본격적으로 한국에서 제작되기 시작한 판화 경향으로, 작품의 완성을 위해서는 아연판을 질산으로 부식시키거나 무거운 프레스 기계를 자유자재로 다루는, 위험하고 힘이 많이 드는 과정이 요구되었다. 윤효준은 한마디로 남성적인 성격의 작업이라 할 수 있는 동판화의 창조를 적극적으로 시도하는 진취적 창작 행위를 선보였는데, 이 시기 대표작 중 하나인 <Dream Ⅱ>(1981)은 격자형 공간 속 다면체와 선의 조화가 도드라진 추상 경향의 동판화이다. 윤효준은 작품에서 동판화 특유의 날카로운 선의 맛을 기하 형태로 살리는 동시에 산의 부식효과를 이용해 직선과 대조되는 개성 넘치는 곡선 이미지들을 창출해 냈다. 그는 이 같은 판화작업으로 1984년 열린 《제3회 공간국제판화전》(공간미술관)과 《한국현대판화가협회 공모전》(미술회관)에서 각각 우수상을 받았다. 그의 수상은 그즈음 판화계에 신진 여성 작가들의 진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있었음을, 또 이를 계기로 국내 판화 예술 경향의 판도가 변해가고 있었음을 알리는 징후였다. 1)

윤효준은 그러나 당시 이 같은 판화 분야에서의 성취에만 머물러 있지 않았다. 같은 시기 이화여대 미술대학원에서 서양화를 전공하며 김형대(1936~)의 지도로 추상 회화 분야에서의 새로운 도전을 꿈꾼 것이다. 그러므로 1985년의 첫 개인전에서 그가 선보인 액션 페인팅 성격의 <心像(Image)> 시리즈는, 기하학적 추상 판화에서 표현적 서정 추상 회화의 세계로 향해간, 작가 예술 세계의 전환의 이정표였다고 할 수 있다. 윤효준의 추상 회화는 이후 1990년대 초반에 이르기까지, 작가가 아크릴 물감을 적극적으로 사용하면서 중대한 변화를 맞게 된다. 속건성을 지닌 아크릴 물감은 평론가 서성록의 언급처럼, “윤효준 필치의 자유로움과 힘을 보여주고 폭발적인 화면 형성력을 내보이기에” 더욱 적합했다.2)  나아가 작가가 내면의 표출 수단으로 선택한 추상적 상징화의 대상 역시 초창기 식물에서 동물, 인간, 풍경 등으로 확장되었는데, 이는 이 시기 범 자연적 소재를 탐구하는 <合의 祈願>, <自然의 꿈> 시리즈로 가시화되었다. 

이런 작업을 통해 윤효준은 “1980년대 초 성행하기 시작한 신표현주의 붐을 타고 부각된 작가군” 중의 한 명으로서, “여성 작가답지 않은 힘찬 붓질로 폭풍의 바다처럼 회오리치거나 용암로처럼 들끓는 자연의 역동성을 표현한” 작가로 평가되었다.3)  이처럼 평론가들을 놀라게 한 것은 작품 <하늘>(1986)에 나타난 것과 같은 윤효준 화면의 조형적 특징, 즉 주로 남성 작가의 것으로 여겨져 온 대담한 원색, 환경 그 자체가 된 광대한 캔버스, 격렬한 행위의 궤적으로서의 붓놀림 등이었다. 이런 성격은 윤효준의 예술 세계를 빠르게 한국의 주류 미술계에 편입시킨 주된 원인이었을 것이다. 그의 추상이 1970년대 중반 이후 한국 추상 화단을 주도해 온 단색조 회화와 선명히 차별화되면서, 자연, 인간 같은 보편적 상징을 이용해 화면에서 표현성의 회복을 추구하는 당대 국제적 추상의 특색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평론가들은 <合의 祈願>(1989)과 같은 작품을 “분출하는 내면의 흐름을 신표현 기법으로 강렬하게 전개해 감성의 명쾌한 전달에 성공하고 있다” 4)  라고 설명하면서, 윤효준을 새롭게 부상하던 표현적 추상 양식의 선도적 작가로 보고자 했다. 

그 때문인지 윤효준은 추상 회화를 소개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곧 화단의 떠오르는 신예가 되었고, 당대의 주요 국내 전시인 《서울현대미술제》(1985, 미술회관), 《에콜 드 서울》(1985, 관훈미술관), 《한국현대미술의 최전선》(1986, 관훈미술관), 《뉴웨이브 86전》(1986, 워커힐미술관), 《석남 이경성 선생 고희 기념전》(1988, 호암갤러리), 《한국현대미술전》(1988, 국립현대미술관), 《'89 서울미술대전》(1989, 서울시립미술관), 《레알리떼 서울》(1990, 미술회관), 《한국 현대판화 40년》(1993, 국립현대미술관), 《대전 엑스포 국제 판화제》(1993, 한밭도서관 부설 미술관) 등에 활발히 참여했다. 그는 이상의 전시들에서 한국 미술계에 새로운 기류를 형성한 ‘영파워’로서, 또 이른바 ‘80년대 화가’로 불리는 일군의 젊은 작가들 가운데서도 뉴페인팅 계열의 추상화가로서 인식되었다.5) 

한편 윤효준의 해외 무대에서의 활동도 돋보였는데, 그는 1982년 브라질에서 열린 《카보프리오 국제판화 비엔날레》를 시작으로, 《아시아 현대미술제》(1985, 일본 후쿠오카), 《현대 파스텔전》(1986, 프랑스 파리), 《터키 판화 비엔날레》(1988, 터키 앙카라), 《베를린 국제현대 미술전》(1989, 독일 베를린), 《한국 현대회화 30인전》(1989, 베를린, 파리) 등의 대규모 국제전에 참가해 주목받았다. 이처럼 국내외 주류 미술계에서 맹활약하면서도, 작가는 동시에 1970년대에 결성된 여성 미술가 단체들인 ‘표현그룹’과 ‘한국여류화가회’의 정기전에 1980~1990년대 내내 꾸준히 참여하고, 여성미술 기획 단체전인 《80년대의 여성미술전》(1989, 금호미술관), 《한국 여성미술가 55인전》(1990, 토탈미술관) 등과 한국 여성주의 미술운동의 대표 전시인 《’99 여성미술제 “팥쥐들의 행진”》(1999, 예술의전당 미술관, 김홍희 기획)에 작품을 출품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한국의 여성주의 미술 이론과 미술사 연구에서, 1970년대 이후 여성 추상화가들의 작업과 그들의 단체 활동은 그간 유의미한 평가를 받지 못해왔다. 여성주의 미술비평가와 미술사학자들은 한국미술의 1960~1970년대를 남성 미술의 시대로, 당시의 여성 추상 작가들을 “기존 남성 지배적인 모더니즘 미술 영역에 성공적으로 진출한 대단히 예외적인 여성들” 6) 로 간주했다. 이들은 그러면서 “현존하는 남성 미술가들을 기준으로 하는 ‘미술가’에 대한 표상, 미술에서의 업적을 평가하는 남성 편향적 기준들은 이 시기 여성 미술가에게 성차(性差)의 인식에 기초한 가치전복적인 비판과 실천보다 기존 미술 제도권에서 탈성적(脫性的)인 ‘작가’로서 승인받기 위한 노력에 강조점을 두도록 했다”라며 이로 인해 “여성미술의 개념이나 여성 미술가의 정체성에서 성차의 가치들이 수용되지 못했다”라고 지적했다. 7)

이들은 주장은 한마디로 여성 작가가 남성적 모더니즘 미술의 언어인 추상 양식을 선택하게 되면 그의 젠더는 남성으로 정의되며, 이 때문에 근본적으로 여성주의적인 미술의 창조가 불가능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 논리를 따르자면 1960년대부터 활약한 한국의 1세대 여성 추상 미술가들, 즉 이성자(1918~2009), 이수재(1933~), 방혜자(1937~), 최욱경(1940~1985), 조문자(1940~), 이정지(1943~) 등의 후예인 윤효준의 추상 회화 역시 여성주의적 가치를 지니지 못하게 된다. 그러나 윤효준 화면에는 과연 여성 특유의 성향이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또 그의 작업은 여성주의 미술로서의 의미를 전혀 갖추지 못하는 것일까?

미술사상 전통적으로 남성들의 장르였던 추상 회화를 통해 여성 작가 윤효준이 한국 미술계에서 획득한 가시적 성취는 분명 높이 평가받을 만한 것이다. 그런데 여성주의적 관점에서도, 윤효준의 예술가로서의 수행은 이미 시작부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서울프린트클럽의 결성과 활동, 그리고 《표현그룹》 전시를 비롯한 여러 여성미술 단체전 참여 당시 작가의 동기와 관심사가 분명 가부장제 내부에서의 여성 미술가의 위치와 역할, 여성들 간의 연대의식 고취에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윤효준이 “당대 유명 화가들을 제치고 기획전마다 주역을 맡는 ‘청년작가’들” 8) 중 한 명으로 부상하던 1980년대 중반, 언론은 그가 참여했던 《표현그룹》 정기전 소식을 전하며 그와 동료들을 “미술대학을 졸업한 30대 주부들”로 지칭하고, 이들을 “무엇을 남긴다는 것보다 열심히 노력한다는 그 자체를 중요시”하는 주부며 어머니인 여성으로 정의했다. 9)  아이러니하게도 해당 전시가 열린 1986년 윤효준은 『공간』 5월호 특집으로 각계 미술인 56인이 선정한 ‘80년대 괄목할만한 화가 28명’ 중 한 명에 선정된 바 있다. 10)  같은 해에 한 사람에 주어진 이런 상반된 평가의 원인은 바로 그가 여성이라는 사실에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윤효준은 자신을 전문 작가라기보다 미대 출신 주부로 간주하는 이런 차별적 시선 속에서도, 여성들만의 전시에 참여하는 일을 결코 멈춘 적이 없었다.

근대 이후 한국의 여성 미술가들에게 작가로서의 주체성을 확립하는 일, 다시 말해 남성 중심 미술계에서 작품과 여타 활동으로 두각을 나타내는 일은 직업 수행 과정에서 여성성을 형성할 수 있게 한 전제 조건이었다. 여성 미술가들은 남성들의 미술 언어로 전업 미술가의 지위를 획득하면서 여류라는 호칭을 얻었다. 그러나 곧 이를 여성들 간 연대의 용어로 전유(專有)하고 그들만의 전시를 꾸림으로써, 미술가라는 직업에서의 남녀 차이를 여성들의 위치에서 독자적으로 생산해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윤효준의 작가로서의 행보는 그 자체로 그간 무성, 혹은 남성으로 여겨져 왔던 여성 추상 미술가들의 ‘여성되기’의 과정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윤효준의 작업에서는 이뿐 아니라 남성적 추상 언어를 여성인 자신의 것으로 완전히 옮겨내려는 작가의 끊임없는 노력, 그리고 그로 인해 작품에 내포된 여성적 정체성 역시도 발견된다. 

윤효준이 1997년 자신의 열한 번째 개인전 《시(始)-비롯함에 관한 명상전》에서 선보인 설치와 퍼포먼스 작품들은 작가의 이런 노력의 대표적 사례라 할 수 있다. 그는 이 전시에서 천연염색 및 우리 옷 연구가 이나경, 놀이패 ‘궁’ 대표인 성철웅, 전통문화연구가이자 시인인 박희준, 한국 무용가이자 서도소리 전수자인 김경란 등 여러 전문가와 함께 한국의 자연과 민속에 관한 깊이 있는 토론을 진행하고, 한국의 전통 윷놀이를 주제로 삼은 설치와 퍼포먼스 작품들을 발표했다. 그는 이 같은 시도의 이유에 관해 “화가의 작품은 늘 정지상태이다. 다른 분야의 작가들이 참여함으로써 비롯함, 움직임을 얻게 되었다” 11) 라고 밝힌 바 있다. 전시에서 작가가 이제까지 관심을 두었던 자연과 추상의 상징적 결합은 동양적 우주관이 함축된 윷판을 조형화하거나, 작품에 태극 문양을 도입하는 것으로 발전되었다. 이에 더해 전통 공예품이자 여성의 물건이었던 한복, 색동 누비 베개, 화각장 등에 추상적 붓질을 가한 여러 설치 작품들도 소개되었다.

윤효준은 이 전시에서 최초로 빛, 물, 나무, 불, 흙, 쇠 등에 대해 고찰하는 퍼포먼스를 작품 세계에 도입했다. 이는 작가가 일찍부터 행위성이 강한 추상 회화를 제작했던 일의 연장 선상에서, 또 그가 1980년대 후반부터 한국 미술계에 강하게 나타났던 퍼포먼스, 총체예술, 민족적인 것에의 관심에서 영향받은 결과로도 해석할 수 있다. 전시 기간 중 전통 무용과 민속 음악에서 영감받은 흥미로운 퍼포먼스가 펼쳐졌는데, 이를 통해 연희와 제의의 형식을 통한 관람자와 공연자의 예술적 상호교류가 이뤄졌다. 작가는 이처럼 ‘한국-자연-여성-신체-놀이’의 관계를 추상 양식과 설치 및 퍼포먼스의 형식으로 탐구함으로써, 그간 ‘서구-문명-남성-정신-노동’의 개념과 결부되어 이해되어 온 기존의 추상에 도전하는, 총체적인 성격의 새로운 추상예술을 창조해 냈다. 그리고 이로써 그의 작업은 여성으로서의 인간 윤효준의 삶과 추상이 하나로 통합되는, 또 다른 차원의 경지에 도달하게 되었다. 윤효준 추상예술의 여성성, 나아가 그것이 지닌 여성주의적 의미는 바로 이 지점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윤효준은 이처럼 자신의 작품이 가장 빛나던 순간, 작가로서 명성을 누리던 시절인 2000년대 초반에 돌연 작품 활동을 멈추고 말레이시아로 떠나갔다. 그가 한국 미술계를 버리고 머나먼 타국 행을 결정한 이유는 선교사로서 신의 말씀을 전파하기 위해, 또 타인에게 봉사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선교사의 소명을 따랐다 해도 이후의 그의 삶에서 예술과 그 창작은 결코 분리된 적이 없었다. 윤효준은 여전히 말레이시아에서 신과 자연을 찬양하는 회화 작업을 계속하고 있으며 이를 전시에서 활발히 발표한다. 이렇게 그는 지금도 젊은 날의 여성 작가 윤효준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모습으로, 여성 추상 미술가의 삶을 영위하고 있다.



조수진(1969~), 이화여대 대학원 미술사학과 박사, 미술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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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80년대 초반 윤효준 외에 판화 공모전에서 수상한 여성 작가로 장영숙, 이영애가 있다. 

2)  서성록, 「공간의 역동적 해석, 윤효준의 추상화된 자연현상작업」, 『윤효준 개인전』 도록, 예일화랑, 1990. 11. 16.~11. 25. 

3)   유석우, 「인간이 자연과 일치되고자 하는 염원」, 위의 도록. 

4)   김종근, 위의 도록.

5)   「연말 화단에 ‘청년(靑年)작가’ 물결: 유명 화가들 제치고 기획전마다 ‘주역’ 초대」, 『조선일보』, 1986. 12. 19.

6)   임정희, 「여성미술과 모더니즘」, 여성문화예술기획 99 여성미술제 추진위원회, 『팥쥐들의 행진』, 홍디자인출판부, 1999, pp. 71-72.

7) 위의 책, pp. 71-72.

8)  「연말 화단에 ‘청년작가’ 물결: 유명 화가들 제치고 기획전마다 ‘주역’ 초대」, 『조선일보』, 1986. 12. 19.

9)  「미대 출신 주부들 모여 15년째 ‘그룹전’」, 『동아일보』, 1985. 2. 25.

10)  윤효준은 『공간』 1986년 5월호 특집 「80년대 전반의 한국미술」에서 임옥상, 신학철, 황주리, 권순철, 박불똥, 이석주, 이명미, 이정지, 황재형과 함께 서양화 장르의 괄목할만한 작가로 선정되었다.

11)   「문화계 ‘탈장르 교류’ 확산, ‘색깔’은 달라도 주제는 ‘하나’」, 『경향신문』, 1997. 11. 7.







윤효준, <Dream Ⅱ>, 1981, 종이에 동판화, 39×38cm 




윤효준, <하늘>, 1986, 캔버스에 아크릴, 500×180cm




윤효준, <合의 祈願>, 1989, 천에 유채, 300×900cm



윤효준, <Wish Eternity>, 1989, 캔버스에 아크릴, 324x130cm




윤효준, 《시(始)-비롯함에 관한 명상전》(1997. 12. 4.~1998. 1. 15., 플러스갤러리)에서의 설치 작품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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