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


컬럼


  • 트위터
  • 인스타그램1604
  • 유튜브20240110

연재컬럼

인쇄 스크랩 URL 트위터 페이스북 목록

(73)동양적 감수성으로 물든 이수재의 서정적 추상풍경화 | 윤난지

현대미술포럼



동양적 감수성으로 물든 이수재의 서정적 추상풍경화



“반세기 동안의 끈질긴 정진으로 마침내 ‘이수재의 추상’이라고 말할 수 있는 독창성에 도달한 것 같다. 추상표현주의와 앵포르멜의 영향은 물론 한국 미술의 영향도 모두 지나간 후에 남은 것은 이수재의 추상뿐이다. 이렇게 허무하고 이렇게 투명하고 이렇게 탈속한 그림을 내 기억으로는 본 일이 없다” 1)

2009년에 열린 이수재(1933~)의 한국에서의 마지막 전시작들에 대한 정병관의 평문이다. 이는 화가 이수재에 대한 최고의 찬사이자 매우 정확한 평가다. 이수재는 시류에 흔들리지 않고 자신이 믿는 ‘예술’에 도달하기 위해 정진해 온 지극히 순수하고 올곧은 예술가다. 그에게 예술은 문자그대로의 ‘추상’ 즉 구체적인 현실을 떠난 순수한 정신의 울림 그 자체를 드러내는 일이었다. 

1958년 워싱턴 오벨리스크 화랑에서 발표한 그의 최초의 추상화가 이러한 이수재 예술의 시작을 알리는데, 이는 3년간의 미국 유학의 결실이다. 1955년에 이화여대를 졸업한 그는 곧바로 콜로라도 주립대학 석사과정에서 수학하는데, 그 과정에서 주변의 영향과 내적인 동기가 만나 특유의 추상화면이 만들어진다. 작가 자신은 네 자신을 발견하라고 한 지도교수와 스승이자 서북화파 추상표현주의자 칼 모리스(1911~1993)를 주요 멘토로 들었다. 또한 자신이 추상회화를 시도한 계기로, 커다란 캔버스를 바닥에 놓고 묽은 물감을 떨어뜨려 번지는 형태에서 물안개와 아지랑이 같은 자연의 정경을 발견한 순간을 언급하였다. 2) 

이 순간이 언제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1956~1957년경으로 추정되며, 테레핀에 유화물감을 묽게 타서 동양화처럼 그린 이 그림들을 최초로 발표한 것은 1958년 위의 전시를 통해서다. “부드럽고 가라앉은 화면” “미묘한 색조와 정감을 이끌어내는 붓터치” “자연에 대한 서정적 해석” “검은 칼리그래피” 3)  등 당시 평문의 내용과 <이른 아침> <신비로운 달빛> <한국의 환상> 등 제목을 통해 이미 이 때부터 이수재 특유의 그림이 만들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의 그림은 미국 추상표현주의의 영향권에서 만들어졌으나 강렬한 색조와 액션 중심의 주류와는 거리를 둔, 자연에의 조응을 지향하는 동양 전통 정서에 가까운 온화하고 부드러운 그림이었다. 4)

미국에서 먼저 발표된 이 그림들은 같은 해 한국의 중앙공보관 개인전을 통해 소개되고 작가는 이화여대 교수로 부임하면서 한국에서의 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였는데, 다시 도미하는 1962년까지 매년 개인전을 연다. 도미 후 1964년까지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에서 수학한 작가는 1960년대 후반에는 미국 갤러리들을 통해, 1970년대 중엽 이후에는 한국의 주요 화랑들을 통해 작품을 발표하고 1983년 이화여대 교수로 다시 채용되면서 정년퇴직 시까지 한국에서의 활동을 지속한다.  

이수재가 추상회화를 처음 시도한 1950년대 후반에서 1960년대 전반에 이르는 시기는 당시 한국 미술계를 휩쓴 앵포르멜 운동 시기와도 일치하며, 이후 국내외에서의 꾸준한 작업 행보도 앵포르멜 작가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남성 작가 위주로 쓰인 기존 미술사에서는 그의 이름을 찾아보기 어렵다. 이수재의 추상 작업을 재조명하는 일은 한 여성 작가의 작업을 한국 현대미술사의 일부로 수용하는 것을 넘어 그의 독특한 작업 면모를 더하여 이를 더욱 풍부하게 구성하는 일이 될 것이다. 또한, 대부분의 앵포르멜 작가들이 단색화로 형식을 전환한 것과 달리 고유 스타일을 평생 고수한 이수재의 행보는 한국 현대미술사의 또 다른 국면을 드러낼 것이다.
  
이수재 작업에서 특히 주목할 만 한 점은 ‘자연’을 예술의 근원으로 삼는 점이다. 그의 그림은 형식적으로는 당대 전 세계적인 주류였던 서정적 추상미술에 속하는 한편, 자연을 모체로 삼는 점에서는 풍경화의 오랜 전통을 계승한다. “물과 땅에 대한 터너 풍 해석” 5) 이라는 최초 전시작에 대한 평문처럼, 그의 그림이 터너나 코로의 풍경화에 자주 비교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또한 파랑과 보라에서 주황과 노랑에 이르는 그가 즐겨 쓴 색채들의 조합은 인상주의 풍경화의 색채를 환기한다. 그는 ‘서정적 추상풍경화’라는 독특한 영역을 연 것이다.  

이수재에게 자연은 영감의 원천이자 재현의 대상이고 또한 제작의 원리다. 아스라이 멀어져 가는 산봉우리들, 새벽안개 속에서 가까스로 드러나는 호숫가 정경, 구름층을 뚫고 나오는 다양한 빛의 향연 등 그의 화면은 자연의 정경들을 암시한다. 한편 그의 그림은 이런 연상을 넘어서는 순수한 조형적 관계 또한 드러낸다. 화폭을 가로지르는 경쾌한 혹은 묵직하고 힘 있는 붓질들, 깊이 스미거나 빠르게 스치는 채색효과들과 이들이 만들어내는 색들의 변주, 크고 작은 형상들의 다양한 배열과 이를 둘러 싼 광활한 여백,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을 통괄하는 조화로운 구성감각 등이 그것인데, 이는 작가가 체득한 자연의 원리가 조형적으로 구현된 결과다.
 
이처럼 자연의 구체적 형상과 추상적 원리가 병존하는, 즉 구상과 추상의 구분을 넘어서는 작가적 태도의 뿌리는 그가 수업기부터 천착해 온 동양의 자연관과 이에 근거한 예술관이다. 인간과 자연, 주체와 대상의 이분법을 애초부터 벗어나 있는 동양화 전통에 깊게 공감한 그에게 보이는 형상과 그 형상을 보이게 하는 원리는 다른 것이 아니었다. 청전 이상범을 스승으로 모신 그는 동양 산수화가들처럼 형상이자 내적 원리로서의 자연을 그리고자한 것이다. 

인위적인 요소를 최대한 멀리하면서 문자 그대로 ‘자연’스러운 그림을 그리고자 하는 그의 제작태도 또한 이러한 동양의 넓은 의미의 자연주의에서 기인한 것이다. 이수재의 트레이드마크인 너른 여백과 간소하면서도 즉흥적인 붓질들은 외견상으로도 문인화나 서예, 혹은 노장의 무위자연을 구현한 선화(禪畫)를 떠올린다. 자연의 기(氣)에 조응하면서 이를 그림을 통해 드러내고자 한 전통 화가들처럼 이수재는 자신의 몸을 가능한 자연에 맡긴 채 간결한 붓터치들을 화면에 남기는 방법으로 작업했다. 힘차고 과감한 혹은 빠르고 경쾌한 붓질들이 출몰하는 그의 화면은 우연과 절제 사이에서 절묘한 균형을 이루는데, 이는 무의식적인 행위에 천착한 추상표현주의자들의 액션페인팅보다는 깨어 있는 의식에 의해 통제된 붓놀림을 구사한 문인들의 서화에 더 가깝다. 이경성의 표현처럼, 그것은 “유화 재료를 써서 그린 동양의 그림” 6) 인 것이다.  

“내가 그림을 통해 지향하는 것은 궁극적인 것 즉 고도의 정신적인 세계다” 7) 

작가의 이 말은 서화를 수신의 도구로 삼은 옛 문인들 뿐 아니라 예술의 본질을 ‘정신적인 것’에서 찾은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를 환기한다. 또한, 광활한 여백에 최소한의 붓 자국을 남긴 이수재의 그림은 ‘정신성’을 구현하기 위해 형태를 감축한 말레비치의 절대주의가 당대 양식을 통해 환생한 예다. 물질의 비움이 곧 정신의 충만함을 의미하는 그의 그림은 당대 서정적 추상 양식과 동양의 예술관 그리고 초기 추상미술의 정신주의가 만나는 지점을 드러낸다. 이수재의 그림을 동서고금을 넘나드는 문화교차로로서, 그리고 그러한 교류가 활발해진 시대의 증거로서 주목하는 이유다. 

이수재 작업의 주류 남성미학과의 ‘다름’은 바로 이런 지점, 즉 주류와 주변을 자유롭게 오가는 ‘유연함(flexibility)’에 있다. 즉 작가의 여성으로서의 정체성이 어떤 특정한 속성을 통해서라기보다 다양한 특성들을 오가는 이른바 '사이(the in-between)'의 미학을 통해 발현되는 것인데, 이는 주류가 막강한 힘을 가진 모더니즘 역사 속에서 여성 작가가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주요 통로가 되었다. 이수재의 그림은 서정적 추상미술이라는 당대 주류 미학을 구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주류와의 ‘다름’을 매우 유연하게 수용한 ‘또 다른’ 그림인 것이다.     

전통적으로 주류 미술사의 주변이자 여성의 영역이었던 ‘공예’의 재료와 기법을 적극 기용한 1990년대 콜라주 작업은 이런 ‘다름’을 더 구체적으로 드러내는 예로, 모더니즘이 힘을 잃은 당대 정황을 예시한다. 삼베나 한지, 말린 꽃 등 주로 여성, 동양, 전통, 자연의 기호인 재료들을 남성 문화의 표상인 서구 현대 추상미술에 편입시킨 이 콜라주들에서 작가가 더 이상 주류 논리를 의식하지 않게 되었음을 유추할 수 있다. 이는 중심과 주변의 이분법을 벗어난 이른바 ‘혼성의 시대’가 왔음을 알리는 증표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이수재의 콜라주는 전통적인 유화 기법에 대한 일종의 저항으로 시작된 큐비즘이나 팝 아트의 그것과는 다르다. 너른 여백과 겹쳐진 붓자국들을 환기하는 삼베 조각들은 그의 콜라주가 유화 작업의 연장선상에 있음을, 그에게 유화와 콜라주는 다른 것이 아님을 환기한다. 유화와 콜라주 사이를 자유롭게 움직이는 그의 작업은 모더니즘의 배제의 논리에서 벗어난 여성적 포용의 원리를 시각화한다.     

이렇게 이수재는 서구가 주도한 당대 미술의 매트릭스에서 추상미학과 수묵의 정신을 융합한, ‘한국적’ 현대회화의 전형을 만들어냈다는 평가가 아깝지 않은 작업을 구현해냈다. 그가 동서고금을 가로지르는 진정한 융합을 실현할 수 있었던 것은 모든 것을 아우르는 모성적 자연의 원리에서 출발했기 때문이다. 그는 여성으로서의 자신의 정체성을 ‘자연스럽게’ 작업에 투여함으로써 시대, 사회적으로 의미 있는 작업을 구현할 수 있었던 것이다. 

“내가 희구하는 세계는 정신의 평화이며 이것이 나의 예술을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행복할 수 있다” 8)    

이렇게 말한 작가는 자연이 주는 정신적 위안을 그림을 통해 전하고자 한 진정한 ‘자연주의’ 예술가다. 이수재 그림의 힘은 자연을 통해 바라본 투명한 정신세계 그리고 그것이 주는 마음의 평안에 있다. 한국에서의 마지막 전시작들이 보여주는 것처럼, 이러한 목표를 위해 정진해 온 평생의 작업은 결국, 위의 정병관의 표현처럼, 이른 바 “이수재의 추상”에 이르렀다.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순수한 정신주의 그림... “허무하고 투명하고 탈속한...”  
    
이 글을 쓰며 교수 시절 내 옆방을 쓰시던 이수재 선생님의 근황이 궁금해졌다. 자연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자주 말씀하시며 한국의 미를 발견한 최순우 선생을 존경하시던, 그리고 야외에 나갈 때면 항상 스케치북을 준비하시던... 은퇴 후 미국에 가신 후 한동안 연락을 주고 받았는데, 무심한 세월 속에 연락도 끊겼다. 미국의 제자를 통해 어렵게 연락이 닿았는데, 89세의 선생님은 귀가 안 들릴 뿐 따님의 보살핌을 받으며 여전히 건강하시다고 한다. 부디 그 순수한 열정으로 붓질을 오래 지속하시기를 바랄 뿐이다.     



윤난지(1953∼), 이화여대 대학원 미술사학과 박사, 이화여대 교수(∼2019), 현재 현대미술포럼 대표



ㅡㅡㅡㅡㅡ
1)   정병관, 「최후의 서정추상」, 『이수재』(전시도록), 아틀리에 705, 2009, p. 2. 

2)  송희경, 「작가 이수재의 추상회화 연구: 작품에 반영된 동양적 요소」, 『이수재』(정년퇴임 기념전 도록), 이화여자대학교미술관, 1997, n.p. 

3)   Leslie Judd Portner, The Washington Post & Times Herald, January 12, 1958, n.p.: 『이수재』(정년퇴임 기념전 도록), 이화여자대학교미술관, 1997, n.p.

4)  그는 유학시기에 칸딘스키 등의 서양 추상미술 이론 책과 함께 노장 등의 동양 사상을 영어로 익혔다. 대학원 졸업 논문 또한 「동서양 미학의 비교」다. 

5) Portner(1958), n.p.

6)  이경성(1991), 「이수재의 작품세계」, Recent Works by Soojai Lee (전시 리플렛), Laca Gallery, 1992, n.p

7) Soojai Lee, “On Painting”(전시 리플렛 글), Vincent Price Gallery, 1968, n.p. 

8)  이수재, 『이수재 작품전』(전시도록), 현대화랑, 1975, n.p. 





이수재, <작품Ⅱ>, 1967, 캔버스에 유채, 130.5x100cm




이수재, <작품Ⅴ>, 1983, 캔버스에 유채, 81x101cm




이수재, <석양>, 1992, 캔버스에 유채, 100x141cm




이수재, <작품3>, 1993, 캔버스에 삼베 콜라주, 33x24cm




이수재, <무제>, 2004, 캔버스에 혼합매체, 20x26cm







하단 정보

FAMILY SITE

03015 서울 종로구 홍지문1길 4 (홍지동44) 김달진미술연구소 T +82.2.730.6214 F +82.2.730.9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