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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삶과 연결된 예술, 우순옥의 시간과 공간 | 장하영

현대미술포럼



삶과 연결된 예술, 우순옥의 시간과 공간



모더니즘의 캔버스 화면은 삶과 분리되어 있었다. 예술가의 삶과 작품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지만 형식주의 모더니즘 이론은 예술을, 지루하게 반복되거나 돌발적인 우연으로 채워지는 삶과는 다른 차원의 숭고한 성물로 탈바꿈시켰다. 그러나 모더니즘 이후 미술은 삶과 예술이 다른 차원의 것이 아니며, 예술가의 고군분투하는 혹은 지극히 일상적인 삶이 예술에 고스란히 담겨있음을 보여준다. 특히 우순옥(1958~)의 실천은 삶과 예술이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는 증거를 보여주는 예시이다. 

작가가 이화여대 미술학부와 대학원을 다니던 1980년대는 1970년대 모더니즘과 1990년대 포스트모더니즘 사이의 과도기적인 시대라고 할 수 있다. 1) 1980년대에는 군사정권에 대한 반발로 민중미술이 대두됨과 동시에 1960년대를 풍미한 앵포르멜과 기하학적 추상, 1970년대를 휩쓴 모노크롬 회화와 실험미술, 1970년대 중반부터 주목을 받은 극사실화, 1980년대에 선보이기 시작한 매체 미술 등 다양한 미술 현상들이 공존했다. 이러한 전환기적인 시대에 1985년 독일로 유학을 가기 이전 우순옥의 작품은 <두 개의 언어 사이>(1981), <생각은 그림자>(1981), <보이지 않는 기억>(1982)과 같이 언어, 존재, 인식에 대한 철학적인 물음을 던지는 회화가 주를 이루었다.

1985년 우순옥은 독일로 유학을 떠나 뒤셀도르프 미술대학에서 지도교수 권터 우커(Günther Uecker)와의 만남으로 예술관의 큰 변화를 겪는다. 우커는 ‘생각과 행동은 하나다’라는 신념으로 삶과 괴리되지 않은 예술관을 강조했고, 작가는 독일에 머무는 동안 걸프전, 독일 통일, 소련 붕괴라는 급박하고 거대한 세계의 변화 속에서 예술의 역할에 대해 고민하며 삶과 이어진 예술을 실천하고자 했다. 삶과 연결된 예술의 구체적인 모습은 대중적인 소재를 바탕으로 하는 미술, 사회 비판적 미술 등 작가들의 특성마다 여러 가지 양상으로 발현될 수 있다. 우순옥의 경우는 형식주의 모더니즘에서 가장 신성시된 회화라는 형식을 벗어나 삶이라는 가변적인 유무형의 것과 가장 긴밀히 관계된 시간과 공간이란 주제를 지속해서 탐구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1991년 서울 인공갤러리에서의 개인전 《시간여행》은 우순옥이 시간과 공간의 개념을 탐색해가는 시작점이라 할 수 있다. 거친 사선이 그려진 6개의 천을 벽에 걸고, 바닥에 설치한 3개의 나무 기둥 및 천장에 검은 천으로 매단 나무 기둥 하나로 구성된 <떠 있는 존재>(1987)는 증발하는 시간을 선으로 천의 표면에 남김으로써 시간을 기록하는 작가의 행위였다. <시간여행>(1989)은 물이 담긴 8개의 커다란 드럼통이 원형으로 배치되어 흰색 천으로 이어진 작품인데, 이는 시작과 끝을 알 수 없이 순환하는 시간을 상징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1993년 국제화랑에서 열린 전시 《물질비물질》은 우순옥 예술관의 확장과 흐름을 보여준다. 근본적으로 그의 작품은 언어와 사유에서 출발한다. 언어를 통한 철학적 사유는 인간의 존재에 대한 물음으로 이어지고 이는 존재를 구성하는 가장 기본적인 요소인 물질과 비물질에 대한 질문으로 연결된다. 물질과 비물질에 대한 탐구는 이 두 가지를 담아내는 공간과의 상호작용으로 이어지며 이는 공간과 사물에 깃든 시간과 시간성으로 확장된다. 

독일어로 ‘materiell’인 ‘물질’과 ‘immateriell’인 ‘비물질’은 띄어쓰기를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물질 비물질(materiell immateriell), 물질 속의 물질(materiell im imateriell), 혹은 물질비물질(materiellimmateriell)과 같이 다양한 개념으로 읽어낼 수 있다. 작가는 일종의 언어유희를 통하여 물질과 비물질의 개념에 대해 탐구를 하는 것인데, 그는 ‘빛, 바람, 연기, 생각, 나’라는 물질 및 비물질은 결국에 하나라는 결론을 내린다.

《물질비물질》은 이러한 결론을 다양한 재료와 매체를 사용하여 나타낸 작품의 전시이다. 나무 합판 위에 흙을 섞은 물을 뿌리고 목탄으로 마치 연기와 같은 효과를 낸 <연기 드로잉>(1991), 목탄으로 검게 만든 종이를 벽에 붙이고 그 앞에 닿을 듯 말 듯한 긴 나무 막대를 천장에 매단 <메아리>(1991), 두 대의 프로젝터를 서로 마주 보게 한 뒤 그 사이에 놓인 반투명한 종이에 모나리자의 상이 맺히게 한 <그림자 빛>(1991), 12개의 검은 천을 천장에서 바닥에 거의 닿을 듯 늘어뜨리고 관람자가 천과 천 사이를 드나들 수 있게 한 <방>(1988/1993)과 같이 이 네 점의 작품을 통해 작가는 물질과 비물질의 관계성을 탐구하고, 공간과 존재에 관한 물음을 던진다.

1996년부터 일본에서 열린 전시들을 통하여 우순옥은 더 적극적으로 시간과 공간을 작업이 발현되고 존재하는 장소로 포용하였다. 이전의 작업에서 작가가 사물을 배치함으로써 구성한 공간을 작업의 요소로 다루었다면 <따뜻한 벽>(1996/2003)은 미술관의 한 벽면 전체를 작품으로 만들었다. 이는 작가가 의도하고 개입한 장소 자체가 작품이 되어 특정 시간과 장소에 현존하는 관람자를 둘러싸는 확장성을 보인다. 

도쿄와 오사카의 국립미술관에 설치된 <따뜻한 벽>은 우순옥의 예술에서 온도라는 촉각적 요소를 공간적 경험에 끌어들인 첫 번째 작업이다. 둥글게 곡선으로 부풀어 오른 벽의 모습과 전기 단열재를 넣어 다가가면 따뜻함이 느껴지는 벽은 관람자로 하여금 인간의 신체, 특히 어머니의 배나 가슴 같은 여성적인 몸을 떠올리게 한다. 실제로 작가는 이 작품을 창작할 때에 인간의 몸과 소통, 따뜻한 접촉에 대해 고찰했다고 한다. 이러한 촉각적인 경험은 관람자가 피부로 느끼는 온도를 넘어 전신을 사용하여 공간을 지각하고 탐구하는 2000년대의 프로젝트로 이어진다.

<나비의 꿈>(1996)은 1996년 12월 24일 저녁 6시부터 25일 아침 6시까지 안도 타다오가 설계한 빛의 교회 벽면에 우순옥이 비디오 영상으로 비춘 빛이 어느 순간 무지개색의 나비 형상으로 변하는 작품이다. 작가는 물질인 콘크리트로 지어지고 비물질적인 종교적 염원이 깃든 공간인 빛의 교회를 특정 순간에 명멸해버리는 나비 형상을 위한 최적의 장소로 선택했다. 물질과 비물질이 하나이고 삶과 예술이 이어져있다는 작가의 깨달음처럼 <나비의 꿈>은 현실과 꿈이 뚜렷이 구분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려준다. 또한 이 작품은 우순옥이 계속하여 강조하는 공간과 예술의 상호작용성 및 삶과 예술의 순간성을 잘 나타낸다. 

2000년에 우순옥은 삼청동의 가옥 한 채를 개조하여 <한옥 프로젝트>(2000)라는 장소 특정적 작업을 하였다. 우순옥은 “작업은 잠시 머물게 되는 공간에서 그들 스스로 살아 존재 2) ” 한다고 하였으며 전시가 진행되는 공간의 의미를 중요시했다. <나비의 꿈>에서 작업이 수행되는 공간의 의미가 강조되었는데, <한옥 프로젝트>는 더 나아가 집 한 채의 벽, 방, 마당 등의 총체적인 건축적 요소들이 작업을 이루는 구성요소가 된 결과물이다. 이 작업에서 작가는 안방의 창문을 통유리로 대체하여 관람자가 바깥의 풍경을 투명하게 마주하게 하였고, 창가의 벽 아래에는 관람자가 양손을 넣을 수 있는 두 개의 구멍을 내었다. 이 두 구멍은 서로 연결되고, 중앙에는 양모가 있어 두 손을 집어 넣은 사람이 따뜻한 감촉을 느낄 수 있도록 하였다. 

한편, 한 방에는 6폭의 백색 병풍이 놓여있고, 그 위 가느다란 문틈으로 마치 햇빛이 들어오는 것 같은 따뜻한 주황색 빛의 무리가 서로 교차하여 시간에 따라 다른 형태로 비친다. 작가는 이를 <빛 드로잉>(2000)이라고 명명하였다. 내부가 붉은 갈색으로 칠해진 다른 방에는 <연기 드로잉>(2000)이 있다. 이 바닥에는 원형의 뜨거운 금속판이 놓여있고, 그 위로 물방울이 하나씩 떨어지며 연기로 변한다. 전시 기간 동안만 존재하는 <한옥 프로젝트>의 일시성처럼, 각 공간에 배치된 작품들은 시간에 따라 변화하고 움직인다는 특징이 있다. 이러한 특성들은 우순옥의 작업을 관통하는 개념인 순환하며 살아있는 예술로 수렴된다.

2002년에 통의동에서 약 한 달간 전시된 <장소 속의 장소>(2002)는 과거에 가정집이었던 3층 주택 전체를 설치작업으로 변모시키는 큰 프로젝트였다. 작가는 공간의 흔적을 다듬어 그곳에 새겨진 시간과의 대화에서 건져 올린 감흥들을 작품으로 표현해냈다. 우선 전시의 제목이자 작품명이기도 한 ‘장소 속의 장소’라는 표현은 이 작업의 특성을 한 마디로 축약한다. 집 내부의 방, 통로, 벽, 마루는 그 각각의 요소들이 개별적인 장소 특정적 작품이 되어 관람자가 각기 다른 공간적 경험을 하게 한다. 그러나 작가의 세심한 공간 설치로 각 장소의 세부 요소들은 전체적으로 잃어버린 시간, 부재, 기억이라는 일관성을 띠고 있다. 

아무런 가구도 없는 텅 빈 방의 창에 덮인 부드러운 커튼, 커다란 거실이었을 공간의 벽을 비추는 촛불과 들꽃 다발의 영상, 어두운 방 벽면에 천천히 떠오르는 아스라한 색면의 조합, 흰벽에 흐릿하게 그려진 드로잉과 글자들, 복도에 사람처럼 서 있는 여러 개의 샹들리에. 실용적이고 실제적인 삶의 장소가 작가에 의해 기억과 상상의 공간으로 치환된 장소를 채우는 사람들은 그곳에 살던 가족이 아닌 관람자들이다. 관객들은 저마다 다른 감흥과 느낌을 안고 이곳을 떠난다. 그리고 그 개인들의 떠남은 작가의 작업이 타인의 기억과 삶 속에서 제각각 다른 의미와 경험으로 다시 태어나는 순환의 출발이 된다.

우순옥의 작업에서 공간과 시간이란 개념은 2006년에 <아주 작은 집>(2006)이란 작품을 통해 새롭게 변모된다. 108가지 사물들을 바닥에 격자무늬 모양으로 놓고 느리게 깜박이는 LED 램프를 설치한 이 작품은 개별적인 사물들로 세상 전체를 은유한다. 연관성이 뚜렷하지 않은 각 사물들은 작가가 오랜 기간에 걸쳐 선물 받거나 특별한 장소에서 얻게 된 물건들이다. 서로 다른 이야기와 만남이 집적된 이 물건들은 관람자들의 내면에서 상상을 불러일으키고, 기억 속에서 여러 시공간을 겹쳐지게 함으로써 보는 이의 심리적 역동과 반응을 이끌어낸다. 

2016년 국제갤러리에서 열린 《무위예찬》은 시간의 다양한 형태를 보여준다. 이 전시는 영상작품이 여럿 포함 되었는데, <무위의 풍경>(2014)은 작가가 독일의 한 예배당을 찾아가는 여정을 100배로 느리게 만든 것이고 <조용히…>(2014)는 그 예배당의 내부 천장에 난 구멍으로 보이는 하늘을 4분 33초간 촬영한 작업이다. 아울러, <무위의 정원>(2015)은 흔적 없이 사라질 황금색 가루로 공원의 바닥에 글을 쓰는 작가의 행위를 찍은 영상이다. 이러한 영상작업과는 달리 <시간의 그림>(1983/2016)은 1983년 작가가 제작 후 독일에 보관했다가 약 20년 뒤 꺼내보니 오랜 시간 말려있던 탓으로 주름이 생긴 회화 그 자체를 전시에 선보인 것이다. 

이 작품들은 모두 조금씩 다른 형상으로 시간을 담아내고 있다. 느리게 늘어진 시간, 침묵 속에 4분 33초간 끊임없이 반복되는 시간, 곧 사라져 없어질 흔적을 기록하는 시간, 독일과 한국이라는 물리적 거리 속에서 20년간 쌓인 축적의 시간. 이같은 작업을 통해 작가는 영상과 회화, 설치 등의 예술적 장치를 이용하여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시간을 가공하는 작업을 해낸다. 현실의 자연적 시간은 느리게 감을 수도, 되돌릴 수도, 압축할 수도 없지만 개인이 감지하는 시간은 상대적이고 예술은 삶을 통해 경험하는 시간의 상대성을 표현하기에 더없이 효과적인 수단이 된다. 

이처럼 우순옥의 작품은 회화에 국한하지 않고 오브제, 영상, 설치 등 폭넓은 매체를 사용하여 변화하는 삶을 다양한 방식으로 재구성하고 나타낸다. 그는 예술을 통해 삶의 과정과 눈에 보이지 마음이나 상태들을 표현하고자 했다. 손으로 잡을 수 없고 구체적인 형상으로 고정할 수 없는 삶을 가장 잘 담아낼 수 있도록 작가가 찾아낸 일종의 예술적 그릇은 바로 시간과 공간이라는 차원이었다. 그 두 차원의 형태에 삶을 반영한 우순옥의 미술은 작가 개인을 넘어 관람자의 삶과 연결된다. 그리고 변화하는 시간과 공간, 시대 속에서 잔잔한 공명을 더해간다. 



장하영(1986∼), 이화여대 대학원 미술사학과 석사, 전 더컬럼스 갤러리 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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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국현대미술사 연구회 편, 『한국현대미술 198090』, 학연문화사, 2009, p. 9.
2.  우순옥, 『예술은 이미 당신의 마음속에 있다』, 닻 프레스, 2018, p. 71.




우순옥, 《아주 작은 집》, 국제갤러리 전시 전경, 2006, 108개의 사물, 108개의 LED, 광조정기, 전선, 
사진: 김용관, 이미지 제공: 국제갤러리




우순옥, 《무위예찬》, 국제갤러리 전시 전경, 2016, 사진: Keith Park, 
이미지 제공: 국제갤러리  




우순옥, <시간의 그림>, 《무위예찬》, 국제갤러리 전시 전경, 2016, 사진: Keith Park, 
이미지 제공: 국제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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