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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경계 너머, 자유를 꿈꾸는 유현미의 도정 | 김해리

현대미술포럼



경계 너머, 자유를 꿈꾸는 유현미의 도정



유현미(1964~)는 작품에 회화, 조각, 사진, 설치, 영상, 문학을 총체적으로 활용한다. 작가는 작업이 이뤄질 특정한 실제 공간을 확보한 뒤, 그 안에 하얀 석고로 제작한 오브제를 배치한다. 이후 공간 전체에 강한 조명을 고르게 비추어 오브제의 그림자를 제거하고, 해당 공간과 사물을 캔버스 삼아 거친 붓질로 강한 색채를 가해 회화적으로 연출한다. 그리고 이 완벽히 통제된 장면을 사진으로 촬영해 작품을 완성한다. 이 과정에서 작가는 단편 소설을 집필해 내러티브를 구성하거나, 작업의 프로세스를 영상작업으로 재해석하기도 한다. 그 결과 유현미 작업은 대개 C-프린트 사진으로 제시되지만, 작품에서는 회화도 조각도 사진도 아닌, 혹은 그 모든 장르가 혼재되어 있는 기묘한 감각이 창출된다. 이처럼 다양한 장르를 융합한 제작 과정을 염두에 둔다면 유현미의 작업들을 단순히 사진의 문법으로만 파악할 수 있을까?

장르의 경계를 넘나드는 유현미 작업의 근간은 미술대학 시절의 수학기부터 발견된다. 서울대 조소과 출신의 작가는 물질을 매만져 매스를 구축하는 전통적인 소조 교육을 받았으나, 당시에는 취업을 위한 디자인 스쿨을 다닐 정도로 조각 자체에 몰두하진 않았다고 한다.1)  유현미가 작가로서 노선을 확정한 건 1989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고 나서이다. 뉴욕대 창작미술과 석사 과정에 입학한 그는, 명확하게 전공을 결정하거나 그에 관한 집중 수업을 듣지 않아도 되는, 당시로서는 선진적이었던 미국의 교육에 큰 영향을 받았다. 작가는 그곳에서 도자, 유리공예, 사진, 비디오, 조각, 판화 등 장르를 가리지 않고 수업을 들었으며, 이에 다양한 작업을 실험할 기회를 얻었다. 

미국 시절 유현미는 주로 깃털, 머리카락 등 부드럽고 가벼운 비미술 재료와 밀랍, 나무, 석고 등 고전적인 조각 재료를 혼용해 설치작품을 제작한다. 타조알에 석고로 만든 모형 손가락을 부착한 <알에 손가락>(1995), 전시장 벽부터 바닥까지 길게 늘어진 <깃털드레스 #5>(1995), 머리카락으로 둥지를 틀어 그 안에 밀랍으로 제작한 새알을 넣은 <머리카락 둥지에 알>(1995), 수십 개의 타조알에 검고 긴 머리카락을 부착해 바닥에 흩트려둔 <알에 머리카락 #2>(1995) 등이 그의 미국 시기 대표작이다. 조류의 알에 손가락 모형이나 머리카락을 부착해 익숙하면서도 낯선 감각을 자아내는 초현실주의식의 ‘언캐니’가 조형에 도입된 것이다. 한편, 닭, 오리, 거위 등 날지 못하는 새들의 깃털을 작업에 활용함으로써 날아오르고 싶은 ‘비상’과 ‘욕망’을 등치한다.2)   

유현미는 1998년 한국으로 귀국하며 <퍼즐>(1997~2005) 시리즈에 집중한다. 아무것도 그려져 있지 않은 빈 퍼즐을 상상하며 퍼즐의 앞뒷면을 의식과 무의식에 비유해 조각적인 형태로 구성한 작품이었다. 작가가 사진작업에 천착한 것은 2005년 <Still Life> 시리즈를 제작할 때부터이다. 그는 사람들이 실제와 비슷한 그림을 두고 ‘사진 같다’라고 하는 반면, 멋진 풍광을 담은 사진에 ‘그림 같다’라고 하는 말을 찬사처럼 사용하는 데에 의문을 품으며 사진을 탐구했다. 이렇게 유현미는 1990년대 말에서 2000년대 중후반까지 다양한 장르를 섭렵하며 주요 매체를 사진으로 좁혀 나간다. 다만 그의 작업은 장르로서의 사진일 뿐, 그 과정과 표현 효과에 있어서는 회화, 조각, 사진이 혼성돼 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Still Life>(2005~2006) 시리즈에서 작가는 벽, 창문, 모서리, 계단 등이 있는 작업실을 세트 삼아 사물과 공간에 그림처럼 색을 입히고 사진을 찍는다. 작업실의 한 모퉁이는 오브제와 색을 바꾸며 다른 정물화로 재생산된다. 작품을 위해 겹겹이 칠한 두꺼운 물감과 고전 회화에서 보이는 안정적인 구도는 북유럽 르네상스 정물을 연상시키는 한편, 함께 놓인 사물들의 기이한 조합과 인공적으로 연출된 표면 질감은 초현실적인 분위기를 창출한다.3)  또한 유현미는 2009년 영상작업 <그림이 된 남자>를 제작한다. 이 영상작업은 주인공의 집에 이웃집 사람과 동료 몇 명이 들이닥쳐 거실, 가구, 물건은 물론 급기야는 주인공 청년까지 그림으로 덧그려버리는 가상의 사건을 연출한 작품이다. 이는 어느 상상 속 이야기와 같은 내러티브를 가지고 있지만, 유현미의 사진작품이 탄생하는 일련의 과정을 영상으로 재탄생했다고 볼 수도 있다. 이외에도 작가는 <코스모스>(2012~14), <수의 육체>(2014~17) 등의 우주와 숫자의 본질을 탐구는 사진 시리즈를 선보이며 실재와 환영, 평면과 입체, 시간과 공간의 경계를 넘나든다.

이처럼 유현미의 작품은 결과적으론 사진이지만 사진예술의 도식으로는 온전히 해독할 수 없다. 외려 작가는 구상과 추상, 지각과 직관, 서사와 상징, 내용과 형식, 표현과 개념 등과 같은 이항대립주의를 격파해 온 현대미술의 역사를 직접 수행하며 매체 혼종적인 작업을 제작한다. 즉, 장르간의 이종교배 혹은 다종교배가 만연해지면서, 형식이라는 단어 자체가 무색해진 현대미술의 탈장르적 움직임이 유현미의 사진작업에 그대로 드러나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유현미의 작업 세계는 미술장르의 경계를 둘러싼 문제를 소환하여, 그 존재 방식을 근본부터 되묻는 메타 비평적인 방법론을 취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여러 요소(장르)가 조직되어 하나의 전체(작업)를 이룬다는 점에서 유현미의 작업을 ‘통합예술’이라 명명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면 유현미는 왜 ‘통합예술’을 지향할까? 이에 대한 근원적인 사유는 작가가 직접 집필해 온 단편 소설들에서 실마리를 얻을 수 있다. 그는 『나무 걷다』(분홍개구리, 2012), 『그림 없는 퍼즐』(헥사곤, 2022), 『적』(헥사곤, 2022) 등의 짧은 소설을 지어왔다. 걸어서 세상 구석구석을 탐험하는 나무 이야기를 담은 『나무 걷다』, 각기 다른 패턴과 형태를 가진 퍼즐들의 성장 스토리를 동화처럼 풀어낸 『그림 없는 퍼즐』, 나의 성장을 막는 진짜 적은 타인이 아니라 내 안의 나라는 사실을 일깨우는 『적』이 종이 출판물로 발간된 작가의 소설들이다. 전혀 다른 내용을 다루고 있지만, 사실 소설이 말하고자 하는 주요 골자는 일맥상통하다. 유현미는 소설을 통해 사회가 강요하는 편견을 깨고 과감한 도전을 통해 자유롭게 살아가고자 하는 희망을 일관되게 말하고 있다. 

또한 작가는 소설의 내용을 사진과 조각 등의 시각예술로 재해석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현재 개최 중인 《드로잉 나우》(소마미술관, 2022)에서도 작가는 소설과 조각을 병치하고 있는데, 그는 그 이유에 대해 “완벽히 내 것인 독창적 세계”를 창안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즉, 소설의 서사성, 회화의 표현성, 사진의 기록성, 조각의 물질성 등을 모두 가용한다면 그 누구도 도용할 수 없으며, 반대로 다른 작가를 참고하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결백한 작업 세계가 완성된다는 것이다. 그로써 작가는 오리지널만이 갖고 있는 예술적 ‘자유’를 얻게 된다. 다시 말해 작가는 소설, 회화, 조각, 사진 장르의 특수성을 추출해 ‘통합예술’을 이룩하면서 ‘유현미 양식’을 개척하는 과정을 통해 그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원본성, 고유성, 독창성의 성을 쌓고 자유를 만끽하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포스트모더니즘의 탈장르화 경향을 활용해 이를 모더니즘식의 오리지널리티를 확보한다는 점에서 작가는 20세기 후반의 사회, 문화, 철학적 전환기를 겪은 동시대 예술인의 다중적이고 분열적인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유현미의 ‘자유론’을 미술의 장르 실험적인 차원으로만 환원하는 것은 오히려 그의 예술세계를 협소하게 보는 일이다. 그의 작품에는 항상 ‘내용’이 들어있다. 작가는 뉴욕 유학 시절부터 현재까지 날지 못하는 새가 하늘로 날아오르는 꿈을 꾸듯, 나무가 성큼성큼 세계를 탐험하듯 ‘자유와 비상’을 노래하고 있다. 사회가 세운 규칙과 질서를 깨고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일을 하도록 희망의 메시지를 끊임없이 던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자유와 비상의 꿈을, 수많은 사회적 룰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한국 여성 작가가 아주 오랫동안 말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는 귀중한 예술가상이기도 하다. 작가가 인터뷰를 마무리하며 한 말이 귓전에 맴돈다. “무엇이든 마음껏 하세요. 결과가 어떨지라도”



김해리(1993~), 이화여대 대학원 미술사학과 석사, 현재 아트인컬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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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작가와의 인터뷰, 2022년 3월 26일. 이하 직접 인용은 모두 같은 인터뷰에 의거하였다.

2) 루이스 네스빗,《유현미 개인전》전시도록, 1998, 금호미술관, pp. 2~3.

3) 이선영, 「마법에 걸린 눈」, 『아트인컬처』(2007. 08), p. 74.




유현미, <소우주(Still life)>, 2008, C-프린트, 195×185cm




유현미, <포즈를 취하고 있는 보마의 초상>, 2010, 단채널 비디오, 컬러, 사운드, 12분




유현미, <그림이 된 남자(Bleeding Blue)>, 2009, C-프린트, 180×249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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