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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백순실의 생의 연가, 자연과 감각의 공명 | 박주연

현대미술포럼



백순실의 생의 연가, 자연과 감각의 공명 



백순실(1951~)의 작업의 가장 특기할 만한 점은 바로 감각의 공명에 있다. 요컨대 그의 작업세계를 논함에 있어 결코 빼놓을 수 없는 두 가지, 즉 ‘다도’와 ‘클래식 음악’은 각기 미각과 후각, 청각의 개입을 통해 인간의 감흥을 이끌어내는 영역이다. 백순실은 이 둘에 대한 깊은 인식적 체험에서 비롯한 내밀한 심상을 시각화하는 작업을 30년 넘도록 지속해왔다. 자그마치 30년이라는 긴 시간은 다도와 클래식 음악이 그의 삶을 구성하는 관념적인 일부가 아닌, 매일같이 지속되고 반복되는 실체로서의 일상 그 자체임을 드러낸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그의 작업은 형식주의의 기치 아래 일상과 예술의 극단적인 분리를 지향했던 모더니스트들의 태도와도 완연한 대척점에 있다. 

백순실은 1974년 서울대학교 회화과를 졸업했다. 가정을 이루고 잠시 화업을 내려놓았으나 1985년부터 다시 붓을 들어 <동다송(東茶頌)> 연작에 착수했고, 1988년 서울 그로리치 화랑에서 첫 개인전을 열면서 본격적으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조선후기 승려 초의선사가 한국의 차를 노래하는 고시체 송시인 동다송에서 모티프를 착안한 이 연작은 말그대로 차에 부치는 백순실의 연가이다. <동다송> 연작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했을 때, 흥미롭게도 그는 과수원을 운영하셨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유년시절부터 대지와 흙, 살아 숨쉬는 자연의 모든 생명체들이 그의 삶과 불가분의 것으로 여겨졌다는 말을 가장 먼저 꺼냈다.1)  다도와 차에 대한 전념 역시 아버지로부터 전수 받은 것이었다. 그런 그가 차에 대한 심상을 그려내는 방식이 전면적으로는 추상의 형태를 취하고 있으면서도 자연의 형상들을 어렴풋이 암시하고 있음은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이다.  

<동다송> 초기작들은 짙은 먹색이나 은은한 미색을 바탕으로 말린 찻잎을 연상케 하는 짧은 붓터치의 반복적인 선묘사가 주를 이룬다. 전체적으로 고요하게 침잠된 화면은 예법과 절차를 중시하는 다도를 통해 체득하는 ‘허령(虛靈)’, 즉 마음의 잡된 생각을 버림으로써 명료하게 정제된 의식의 발현을 쉽게 유추해볼 수 있게 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동다송> 연작은 점차 자연의 형상을 화폭에 담는 방향으로 전개된다. 율동하는 대지와 하나의 생이 움트고 열매 맺기 위해 수반되는 자연의 현상들이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기법적인 측면에서도 흡습성이 뛰어난 한지로 인해 비에 젖은 듯한 흙색 대지의 이미지가 가시적으로 연출된다. 또한 수 차례 덧발라지고 마르기를 반복한 물감과 과슈, 오일 바, 규사, 찻잎과 커피 찌꺼기 등 혼합재의 사용으로 두터워진 캔버스는 대지의 생명력을 촉각적으로도 감지할 수 있게 한다.

이는 겹겹이 쌓인 시간 속에 축적된 다도의 예법과 절차 그리고 차의 맛과 향 안에 깃들어진 생을 대하는 백순실의 태도를 은유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날마다 차를 마시며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지속되는 작업”2) 이라는 그의 말처럼 백순실이 그려내는 차에 대한 심상은 단순히 차를 마시는 행위의 즐거움과 맑게 정제된 의식의 관념을 노래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궁극적으로 자연과 생명이 깃든 모든 존재를 향한 찬가로 이어진다. 

이와 같은 백순실의 자연주의적 예술관은 판화 연작 <대지의 노래>에서 더욱 직접적으로 드러난다. 백순실은 동판화와 석판화 매체 고유의 간결하면서도 속도감 넘치는 선의 묘사에 천착하여 지금껏 약 700여점에 이르는 판화를 제작했다. 또한 1990년부터 20여년간 직접 판화공방을 운영하면서 국내 사례로는 최초로 대형 전지 사이즈의 판화를 제작하기 위한 프레스기를 새로이 도입하는 등 한국 판화사에 매우 주요한 족적을 남긴 바 있다.

<대지의 노래>는 화사하게 만개한 봄 꽃, 산에 우거진 짙은 녹음, 아스라이 안개 낀 소나무 숲, 추수를 기다리는 황금빛 논밭, 빈들에 소복하게 내려 앉은 눈, 산봉우리에 걸쳐진 해와 달무리 등 우리에게 너무도 익숙한 사계절에 따라 변모하는 한국땅의 풍광을 다채로이 담아냈다. 이처럼 그의 작업 전반을 관통하여 등장하는 생을 잉태하고 소출을 내는 대지의 이미지는 세 아이를 양육하며 임신과 출산을 경험한 어머니로서 작가의 ‘모체(母體)’가 투영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백순실의 작업 안에 깃든 여성주의적 미술의 의의는 자연을 탐색과 개척의 대상으로 바라보지 않고 그저 당연한 듯 나와 공존하는 존재로 대하는 무위자연의 예술관과, 오직 여성만이 경험할 수 있는 ‘생명의 잉태’와 ‘모성’이라는 고유의 여성성이 조화를 이루어 구현되고 있는 점이라 하겠다. 어떠한 명확한 의도를 지니고 작업을 통해 이렇다 할 메시지를 표출하기 보다 자신의 생과 소소한 일상에 굳건히 기반한 이야기를 우직하게 그리고 순리적으로 풀어나가는 자연스러움, 그로 인해 관람자들이 평온함을 느끼는 것이 바로 백순실의 작업이 지닌 가장 큰 강점이 아닐까.

또한 시각을 가장 우월한 감각으로 간주하여 오직 눈으로만 탐색 가능한 미술을 최우선의 가치로 여겼던 시각 중심주의적 모더니즘 계열과 달리 백순실은 다양한 장르의 예술가들과 적극 협업하며 그만의 독특한 공감각적 작업세계를 확장시켰다는 면에서도 특이점이 있다. 백순실은 1985년부터 7년여간 예술전문지 월간 『객석』에서 시인 최승범과 함께 「한국의 소리를 찾아서」라는 제목의 에세이에 실리는 판화를 연재했다. 

일례로 시인이 “발그레 불 밝혀 놓고 지새우는 긴 밤: 등잔 심지 소리”라는 제목으로 옛 시조와 가락을 곁들여가며 이제는 사라져버린 밤의 정경을 회상한다.3)  등잔불 심지에 불이 붙고, 기름이 타들어 가면서 그을음이 끼고, 불씨가 사그라드는 일련의 과정 중에 발생한 미세한 소리를 시인은 다양한 의성어와 의태어에 빗대어 정겹게 묘사한다. 이에 화가는 그로부터 떠오르는 심상을 자신만의 추상의 언어로 시각화한다. 이는 전적으로 백순실의 내면으로부터 연유한 심상적 풍경이나 그 추상의 언어가 결코 난해하지 않다. 그가 옛 소리로부터 환기되는 대상의 재현성을 인위적으로 제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한 수 차례 판을 제작하여 하나의 종이에 찍어야 하는 판화매체 고유의 특성은 소리의 울림과 깊이를 절묘하게 표현해낸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시인의 글과 화가의 판화가 조응을 이루며 추억하는 우리의 옛 소리는 과거의 시공간을 그리는 향수를 보다 감도 깊게 불러일으키는 효과를 창출한다. 

소리와 조형언어의 협응은 클래식 음악으로도 이어진다. 「한국의 소리를 찾아서」연재 종료 후 백순실은 시인이자 월간 『객석』의 편집장인 이인해와 함께 2002년부터 9년 동안 월간 『피아노 음악』에 <Ode to Music>이라 명명된 120여점 가량의 판화와 유화 연작을 게재했다. 전작과 마찬가지로 시인은 세계적인 클래식 거장의 삶과 음악에 관한 에세이를 쓰고, 백순실은 음악에 대한 깊은 조예에서 비롯한 영감과 감흥을 조형의 언어로 환원하는 식이었다. 각각의 작품에는 작곡가의 이름과 곡명, 악장 등이 구체적으로 명시되었고 시인은 음악가의 생애와 곡이 탄생하게 된 비화 및 사회적 배경 등을 곁들여 곡에 대한 묘사를 이어간다. 

<Ode to Music> 시리즈는 백순실의 전작들에 비해 다채로운 색감과 더불어 구상적 요소가 빈번히 등장하는데, 이는 음악의 풍성한 하모니와 각각의 곡에 담긴 서사를 조형의 언어로 은유하기 위한 작가의 의도로 여겨진다. 즉 음악의 비가시성과 추상성을 접목하여 미술의 시각중심주의적 속성을 강화하려 했던 모더니스트들과는 달리, 백순실은 음악의 청각적 감각 뿐 아니라 그 안에 내재된 서사 마저도 아우르며 두 장르 간의 긴밀한 융합을 시도하고자 했던 것이다. 

따라서 그의 작업에서는 추상과 구상의 구분이 무의미하며, 글과 그림이 하나가 되어 선보여질 때 관람자들은 보다 폭넓은 감각의 공명을 경험할 수 있게 된다. 나아가 2007년 파주 윌리엄 모리스 뮤지엄에서 열린 《음악찬미(Ode to Music)》전에서는 피아니스트와 바이올리니스트, 첼리스트가 전시회장에서 직접 클래식 콘서트를 열어 말 그대로 눈과 귀가 함께 감상할 수 있는 음악의 장을 열기도 했다.

한국의 옛소리와 클래식 음악, 미술의 협업은 각각 『한국의 소리를 찾는다』(1992) 시리즈와, 『랩소디 인 블루』(2004), 『시인이 읽고 화가가 그리는 영혼의 클래식 100』(2011)이라는 제목의 도서들로 출판되었고, 이는 백순실과 다양한 장르의 예술가들이 협업하여 일궈낸 매우 유의미한 결과물이 아닐 수 없다. 이처럼 소리와 음악에 대한 문학과 미술의 밀접한 조응을 시도했던 백순실의 작업은 ‘이성’ ‘시각’ ‘관념과 정신성’ 등의 개념으로 치환되는 주류 모더니즘의 미술을 넘어선 다층적 감각의 포용을 구현했다는 측면에서도 매우 중요한 미술사적 의의를 지닌다.      

2013년 백순실은 파주 헤이리 예술마을로 이주하여 그곳에 블루메 미술관을 건립했다. 현대미술을 통해 자연과 생명의 소중함을 환기하고자 하는 미술관의 지향점은 건물의 외관에서부터 증명된다. 그는 미술관 건립부지에 자리하고 있던 아름드리 나무를 베어내지 않고 건물 안으로 품어 나무의 가지들이 뻗어 자라날 수 있도록 콘크리트 외벽에 구멍을 뚫고 창을 냈다. 이 나무는 블루메 미술관의 상징이 되었다. 전시의 테마는 단연 자연이 주를 이루며, 미술관 내 정원에서는 주기적으로 음악회가 열린다. 지금껏 백순실이 올곧게 표방해왔던 예술관이 이제는 이차원의 캔버스로부터 나아와 공공의 삶 가운데 실현되고 있는 것이다. 이 글을 작성하기 앞서, 인터뷰를 위해 작가에게 통화를 시도했을 때도 백순실은 정원에 물을 주고 있었다. 인터뷰 말미 해사하게 웃으며 “이제는 정원이 나의 작업실”이라 말하던 작가의 목소리가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이다. 



박주연(1985~), 이화여대 대학원 미술사학과 석사, 전 재단법인 아름지기 문화기획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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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백순실과의 전화 인터뷰, 2022년 5월 19일.

2)  『아르비방 2 · 백순실』, 시공사, 1996, n.p.

3)  최승범, 『한국의 소리를 찾는다』, 예음, 1992, pp. 44~46.





백순실, <동다송 9216>, 1992, 한지에 아크릴, 135x165cm




백순실, <한국의 소리 9112>, 1991, 석판화, 24x19cm




백순실, <Ode to Music 0744, 주페의 『시인과 농부』 서곡>, 2007, 캔버스에 아크릴과 유채, 116.8x91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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