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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박실, 존재의 수수께끼를 탐험하는 시간여행 | 전유신

현대미술포럼



박실, 존재의 수수께끼를 탐험하는 시간여행



박실(1951~)은 이화여대 미술대학과 동대학원을 졸업하고 1985년 공간미술관에서 첫 개인전 《서 있는 흙》을 개최하며 작가로서의 활동을 본격화했다. 이 전시를 시작으로 초기의 몇 년 간은 흙을 구워 만든 테라코타를 재료로 일상 속의 한 순간 혹은 연극 무대 위의 특정한 상황을 포착해 조각한 것처럼 보이는 작품들을 주로 제작했다. <어둠이 나그네 되어 문가에 서면>(1988), <그대는 아침 햇살로 다가와 가슴을 안아>(1988), <내 슬픈 전설의 언덕에서>(1988) 등 작품의 제목에서도 시적인 정서가 강조되었다. 

관객들로 하여금 테라코타로 제작된 인물과 배경, 제목을 연계해 자신만의 이야기를 상상해내도록 유도하는 소위 ‘이야기 조각’으로 시작해 박실의 작업은 ‘서 있는 흙’이라는 첫 개인전 제목처럼 땅에서 솟아오르거나 그곳에서 성장 중인 식물들을 연상시키는 생명감 넘치는 반추상적 오브제 조각들로 변화를 거듭했다. 이 초기 작업에서 두드러진 요소는 흙을 매개로 한 자연과 인간의 정서적 교감이었다.

이 시기부터 2000년대 이후까지 박실의 작업에서 줄곧 강조되어온 또 다른 요소는 ‘시간성’이다. 작가는 테라코타로 제작한 초기 작업들에서는 시계 혹은 시계 바늘의 조형적 형태를 작품 곳곳에 배치하거나 <7일간의 시간여행>(1988), <시간이 강물처럼 흐르는 들녘>(1988) 등 제목에서도 시간성을 강조하고자 했다. 1992년의 개인전에서는 <기행문-시간여행>이라는 제목의 연작을 소개했고, 1996년 이후로는 개인전의 제목을 아예 《시간여행-수수께끼》로 붙이는 등 시간성과 시간여행은 줄곧 박실 작업에 있어 핵심적인 탐구의 대상이었다. “인간의 생로병사, 역사로 이루어지는 시간성, 우주의 생성과 소멸조차도 긴 시간여행”에 다름 아니라는 작가에게 <기행문-시간여행>은 자신이 경험한 시간여행의 과정을 기록한 기행문이라 할 수 있다.

‘시간여행’이라는 키워드를 전면에 내세운 1992년의 개인전에서는 이전의 구상적인 테라코타 조각과는 구분되는 양식적인 측면의 변화 또한 확인할 수 있다. 복합토로 제작된 박실의 흙 조각들은 나무 기둥 위에 올려진 채로 서 있는 형상을 취하면서 토템을 연상시키는 조각이 되었다. 쇠 받침대 위에 세워진 목재 기둥은 낡은 건축물에서 떼어온 것들로, 뒤틀린 형태나 표면의 균열과 상처를 통해 세월의 흔적과 시간의 경과를 유추하게 한다. 나무 기둥 위에 올려 진 흙 조각들은 구나 원뿔과 같은 단순한 조형적 형태들로부터 뿔 달린 동물의 잘린 머리를 연상시키는 형태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작은 돌조각들을 쌓아 올려 만든 돌무덤이나 신성시하는 동물의 형태를 상징화한 토템처럼 보이는 조각들이다. 

<기행문-시간여행> 연작은 1996년에 열린 개인전 《시간여행-수수께끼》를 계기로 또 다른 ‘시간여행’ 연작으로 이어지게 된다. 삶과 죽음, 생성과 소멸, 빛과 어두움, 열림과 닫힘, 하늘과 땅이라는 서로 다른 기운들이 맞물리며 형성되는 생명의 수수께끼를 탐색하려는 이 연작에서 부각된 것은 원이나 타원형 같은 조형적 형태이다. 작가는 원이나 타원의 형상은 설명할 수 없는 수많은 현상과 비밀들을 간직하고 있는 행성이나 은하계를 연상시키기도 하고, 곤충의 알, 물방울, 돌멩이, 풀씨와 같은 생명의 근원이 되는 자연물들이 대부분 원이나 타원의 형태를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이 형태들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나를 이끌어가는 알 수 없는 의미와 푸른 생명의 수수께끼를 풀어내고자 하는 작가에게 원과 타원의 형태는 가장 먼저 탐구해야 할 대상이었을 것이다.

<시간여행-수수께끼> 연작의 타원형 구조물들은 복합토를 이용한 흙 조각뿐 아니라 동판 조각을 이어 붙여 만든 철 조각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재료를 이용해 제작되었다. 또한 동으로 만든 선을 이용해 타원의 형태들을 서로 연결하거나 벽면에 설치된 부조형 구조물에서 타원의 형태들이 떨어져 나온 듯이 보이도록 설치한 작품 등으로 설치의 방식 역시 확장되었다. 여기에 더해 금속봉을 용접하여 만든 거대한 알 모양의 조형물 안에 작가 자신이 들어가 껍질을 깨고 비상을 꿈꾸는 생명체 역할을 하는 퍼포먼스 작품으로까지 이어지게 된다.

박실은 조각과 설치 이외에 퍼포먼스 작업도 지속적으로 선보인 바 있다. 1995년에는 <신성한 땅>이라는 제의적 퍼포먼스 작업을 시도했고, 1996년과 1998년에는 <시간여행-수수께끼> 연작과 연계한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그는 퍼포먼스를 “안으로부터 나를 강하게 이끌고 있는 에너지의 표출이며 또 하나의 새로운 잉태와 탄생” 1) 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 그런 만큼 퍼포먼스 작업에서 박실은 우주의 기운을 받아들여 새롭게 탄생한 존재이자 그 기운을 전달하는 매개자로서의 역할로 등장한다. 알의 형상을 한 원과 타원형의 조각들 역시 이 퍼포먼스에서 우주의 생명력을 전달하는 매개적 존재이자 생명과 소멸의 원리를 함축한 우주적 존재로서 의미를 갖는다.

1997년 제27차 국제극예술협회(International Theatre Institute) 총회와 세계연극제의 서울 개최를 기념하기 위해 대학로에 세워진 상징 조형탑 역시 박실이 지속적으로 탐구해 온 주제와 연계해 제작되었다. 공연 예술을 통해 시공을 초월한 세계의 화합, 참 문화의 확산, 삶의 상승” 2) 을 이루기를 기대하며 제작했다는 이 작품은 계단 모양의 기둥 세 개가 하늘을 향해 상승하다가 하나의 꼭짓점에서 만나는 형상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이 구조물의 중앙에는 거대한 알 형상의 구조물이 설치되어 있다. 알은 생명을 탄생시키는 주체이자 우주의 기운을 함축하고 있는 상징적 존재라는 점에서 작가는 이러한 생명력과 기운을 매개로 세계가 하나로 화합하고 문화 예술의 영향력이 확산되는 장을 마련하고자 한 것이다. 

이 조형탑을 제작한 다음 해인 1998부터 2001년 사이 박실은 파리에 체류하며 낯선 곳에서 자신과 작품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고자 시도하게 된다. 이 시기에 작가는 바닷가에서 주운 작은 돌멩이들을 나무 박스 안에 부착한 뒤 상자의 투명 덮개 위에는 마른 해초들을 연상케 하는 채색을 더한 <시간여행-수수께끼> 연작을 제작했다. 이 상자 작업들과 더불어 얇은 동판을 부식시켜 만든 원형질 모양의 시계 연작도 새롭게 시도되었다. 

이 연작들의 공통점은 원형질과 같은 자연의 가장 기초적인 물질계를 연상시키는 상자나 시계가 벽에서 무한하게 증식되는 것처럼 보이도록 설치한 점이다. “작은 유기체들이 모여 다시 커다란 유기체를 탄생시키는 방식으로 진행되는 그의 작업은 부분과 전체, 인간(부분)과 우주(전체)의 프랙탈 관계를 상시기킨다” 3) 는 평가처럼 이 시기의 작업은 파리 체류 이전에 제작된 <시간여행-수수께끼>와는 또 다른 방식으로 생명과 우주의 수수께끼를 드러내며 색다른 시간여행을 제안한다.

박실은 주변의 일상을 세심하게 관찰하면서 그곳에서 인간의 삶과 죽음, 우주의 생성과 소멸과 같은 수수께끼를 발견하게 되었고, 작업의 과정을 통해 이 헤아릴 수 없는 수수께끼를 풀기 위한 시간여행을 시도해왔다. 그런 점에서 박실의 작품은 이 시간여행의 여정을 기록한 기행문이자 이를 통해 관객들에게도 자신만의 새로운 시간여행을 제안하고자 한 시도라 할 수 있다.



전유신(1975~), 이화여대 대학원 미술사학과 박사,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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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자끄린느 몽고비끼, 「시간여행」, 『박실 시간여행-수수께끼』, 박영덕화랑, 2000, 페이지 표시 없음

2) 송병형, “[박소정의 메트로 밖 예술세계로] (22) 근대로의 시간여행 안내자, 혜화역 마로니에 공원 ‘세계연극제 상징조형탑’”, 『메트로』, 2016.5.18.

3) 최광진, 『박실 시간여행-수수께끼』, 박영덕화랑, 2000, 페이지 표시 없음.





박실, <기행문-시간여행>, 1995, 혼합재료, 가변크기, 
출처: 『박실 시간여행-수수께끼』, 박영덕화랑, 2000




박실, <생명현상-수수께끼>, 1996, 복합토, 가변크기, 
출처: 『박실 시간여행-수수께끼』, 박영덕화랑, 2000




박실, <27 ITT 총회, 97 세계연극제 상징조형탑>, 1997, 코르텐, 브론즈, 780x780cm, 
출처: 『박실 시간여행-수수께끼』, 박영덕화랑, 2000




박실, <시간여행-수수께끼>, 2000, 혼합재료, 가변크기, 
출처: 『박실 시간여행-수수께끼』, 박영덕화랑,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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