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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허계의 소나무 | 정하윤

현대미술포럼



허계의 소나무




한국인에게 소나무는 특별하다. 오래도록 한국을 대표하는 나무인 것처럼 여겨져 왔기 때문이다. 애국가의 가사에도 등장하는 소나무는 남산 위에 우뚝 서서 철갑을 두르고 바람서리 불변하며 우리 기상을 상징하는 수종으로 인식되어 온 것이다. 그러한 소나무에 천착한 화가가 있다. 허계다. 


허계(1944~)는 평생 동안 미술 교육자이자 화가로서의 길을 걸어온 미술가이다. 그는 수도사범대학교에 입학하여 당시 한국 미술계에 중요한 화가로 꼽히던 임직순, 장두건, 손동진, 최덕휴, 김흥수, 권옥연 등으로부터 미술 수업을 받으며 실력을 키웠다. 허계의 학교는 초, 중, 고등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칠 수 있는 교사를 양성했지만, 그는 선생님과 동시에 화가에 대한 가능성도 보았다. 자신을 가르치던 미술가이자 선생님들로부터 화가의 길과 교사로서의 길을 병행할 수 있음을 자연스레 인지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그리하여 평생 교육자로서의 역할에 충실하면서도 개인전을 꾸준히 개최하는 등 화가로서의 행보도 계속하여 걸어왔다.


화가로서 허계는 소위 ‘소나무 작가’로 알려져 있다. 1980년대부터 붉은색 기둥을 가진 소나무를 꾸준히 그려왔기에 그렇다. 하지만, 허계가 초기부터 소나무를 그렸던 것은 아니다. 화가로서 붓을 잡은 직후였던 1970년대 초부터 1980년대 중엽에는 보다 몽환적인 느낌이 강한 그림을 그렸다.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탁자 위에 놓인 꽃이나 어항 속의 물고기, 여인 좌상과 같은 정물화, 또는 주변의 풍경과 같은 작품이었다. 그 당시의 그림은 회색빛과 보라색조가 지배적이다. 또한, 묽은 농도의 물감을 활용하여 색채가 번지고 서로 스며드는 기법을 사용하였다. 환상적인 색채와 번지는 물감 때문에 작품은 전체적으로 부드럽고 잔잔한 분위기를 풍기며, 마치 꿈속에서 보았던 모습을 재현하거나 기억 속의 어느 순간을 표현한 것 같은 인상을 준다. 작품 제목 또한 <회상>인 경우가 많다. 허계는 1977년에 열었던 제1회 개인전에서 이처럼 꽃과 물고기를 재구성한 몽환적인 분위기의 정물화를 선보이며 화가로서의 데뷔를 알렸다. 


작품에 소나무가 본격적으로 나타난 것은 1981년 <장생> 부터다. 이 작품을 시작으로 하여 3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소나무를 그려왔다. 왜 하필 소나무였을까? 그의 말을 직접 들어보면 이렇다. 


“남편하고 외국에 나가 있을 당시 아무리 서양화를 한다고 하지만, 우리 정서에 맞는 것을 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뉴욕과 파리 등지를 한 80일간 다니면서 뭘 그릴 줄 안다, 하고 말하는 건 작가가 해야 할 말이 아니라는 걸 알았죠. 즉, 내 것, 내 것을 해야 한다는 걸 터득하면서 소나무 작업을 굳히게 된 것입니다. 소나무는 우리 민족성과 아주 밀접한 나무고 조형화하는데 얼마든지 하겠더라고요. 굳이 사생을 하지 않더라도 화면의 필요에 의해 활성화할 수 있는 이점도 있죠” 1)


본인이 명쾌하게 이야기하다시피, 허계는 외국 여행을 계기로 우리 문화, 우리 정서에 대해 자각하게 되었다. 서양의 재료를 사용하여 그림을 그리지만, 한국적인 어떤 것에 대한 필요를 느꼈다는 말이다. 허계는 그 답을 소나무에서 찾았다. 소나무에서 “민족성”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보다 앞서 김환기와 같은 화가가 달항아리나 매화와 같은 소재에서 한국성을 느꼈던 것과 같은 맥락이라 할 수 있다. 


허계의 작품에는 특별히 붉은색 기둥을 가진 소나무, 적송이 자주 등장한다. 민화에서 자주 나타나는 나무다. 허계는 민화를 떠올리게 하는 적송을 사용함으로써 한국의 전통을 다시 한 번 상기시킨다. 색채 또한 매우 선명하게 발랐다. 진한 푸른색의 배경 위에 구불거리는 붉은색 기둥과 진초록의 둥근 잎 덩이를 가진 허계의 소나무 그렇기에 더욱 한국적인 모습을 띈다. 평론가 유준상는 이에 대해 “수려한 자태로 서 있는 우리나라의 수종들”은 “고래로부터 전수되어온 도상과 닮은 데가 있다”라고 평한 바 있다. 2) 


더불어 허계는 소나무가 ‘조형화’ 하는데 유리하다고 느꼈다. 직접 보고 똑같이 그릴 필요 없이, 화면의 어우러짐을 위해 그 크기와 기둥이나 잎의 모양을 임의적으로 선택할 수 있다는 말일 테다. 이는 소나무라는 수종 자체가 크기, 기둥의 구불거림의 모양이나 정도, 그리고 수피의 색과 형태가 각기 다르게 생긴 덕분에 얻은 자유로움이다. 허계의 장생 작품에서는 율동감이 강하게 느껴지는데, 이는 명랑한 색채의 소나무가 불규칙하게 배열된 데서 오는 것도 있지만, 그림을 그리는 과정 중 작가가 화면 위의 소나무의 위치와 형태를 잡는대서 자유로움을 느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1990년이 되면서 허계는 <장생>이 아닌, <소나무>로 명제를 바꾸었다. 여전히 적색 기둥을 가진 소나무가 등장하지만 민화적인 느낌을 축소하고 싶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특별히 1990년대는 활달한 필력과 대담한 색채의 사용이 눈에 띈다. 붓질이 마치 춤추는 것 같은 모양을 띄며, 번지기 기법이 완전히 사라지면서 화면 전반에 진한 녹색과 청색, 버밀리언을 불투명하게 사용하였다. 힘찬 붓질을 통해 소나무의 기세를 나타냄과 동시에 선명한 색채를 사용함으로써 장식적인 느낌을 준다.


그러나 허계가 한국성을 오직 소나무에서만 찾았던 것은 아니다. 그는 1980년대 중반 무렵 그는 연꽃에서도 한국적인 느낌을 발견했고, 이를 다룬 작품 또한 꽤 많이 남겼다. 활달한 필치를 사용하고, 진한 녹색이 주조로 사용되면서 푸른색과 보랏빛, 그리고 분홍색을 간간이 가미시킴으로써 강하면서도 부드러운 꽃 그림을 완성하였다. 소나무에서는 남성성을, 연꽃에서는 여성성을 찾기 쉽지만 허계는 결코 특정 대상을 특정 성별로 연결시키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소나무나 연꽃이 인습적인 의미로 해석되는 것을 거부한다. 두 가지 소재 모두 허계에게는 한국적인 소재, 그리고 시각적으로 끌리는 대상이었을 뿐이다. 


점차적으로 점점 더 자유로운 필치를 구사하던 허계의 소나무는 시간이 지나면서 그 붓질이 한껏 더 느슨해지고, 2000년대 이후부터는 거의 추상에 가까운 화면을 선보인다. 제목은 여전히 <소나무>이지만, 소나무로 국한시켜 보지 않아도 될 만큼 대상으로부터 훨씬 더 자유해진 모습이다. 화력도 쌓인 만큼, 붓질에도 전혀 거침이 없다. 결과적인 화면만 보았을 때는 마치 서양의 표현적인 추상화처럼도 보이는데, 허계는 여기에 자신의 서명만큼은 굳이 한글로 크게 남겼다. 여전히 그 안에 한국적인 것을 추구하는 성향이 남아 있음을 보여준다고도 할 수 있겠다.


1980년대부터 지금까지, 주로 소나무라는 소재에 몰두하여 한결같이 그림을 그려왔던 허계. 누군가에게 그는 ‘한 우물을 깊이 판 자’로 존경받을 수 있겠지만, ‘새로움의 충격’이 견인해오던 현대미술에 익숙한 누군가에게 그의 작품은 어쩌면 식상해 보일 수도 있을 것 같다. 소나무라는 소재는 이미 수천 년 동안 그려져 왔던 것이고, 허계가 늘 사용하는 캔버스에 유채라는 재료 또한 새로운 매체는 아닌 데다, 소나무에서 전통이나 우리의 기상을 읽어내는 것 또한 그다지 신선하다고 할 수 없을 수도 있다. 


하지만, 설령 그렇게 느끼더라도, 허계의 작품이 한국 미술사에서 갖는 의의만큼은 간과해서는 안 된다. 엄밀히 말해 허계는 한국 미술사의 굵직한 흐름을 이끈 작가라고도 말할 수 없다. 미술계의 중심에 서서 새로운 경향을 이끌었다기보다는, 오래도록 미술 교사로 근무하며 자신의 자리에서 묵묵히 개인전이나 동인전을 통해 작품을 발표한 화가다. 거칠게 말해 미술계의 ‘주변부’에 있었다고 할 수 있을 텐데, 그럼에도 허계가 ‘한국성’에 대해 깊이 고민했던 것은 우리 미술사에서 고유의 문화적 정체성을 찾는 것이 얼마나 큰 숙제였는지를 또 한 번 시사한다. 허계가 ‘한국성’에 대해 깊이 고민했다는 사실은 김환기나 박서보와 같은 한국 미술계의 ‘리더’가 아니었더라도, 또는 ‘단색화’나 ‘민중미술’과 같은 거대한 물결에 속하지 않았더라도, 한국 미술계 구성원 개개인이 각자의 자리에서 한국 미술의 정체성이 어디에 있는가에 대한 탐구를 이어갔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한국성’을 찾는 것이 미술계의 특정 구성원만이 아닌, 당시 한국 미술계 전반에 스며들어 있었던 고민이었음을 또 한 번 증명한다고나 할까. 


동시에 허계의 작품은 한국의 화단이 상대적으로 약하다고 여겨져 온 구상 회화의 맥을 찾게 해준다는 점에서도 중요하다. 해방 이후 한국 현대 미술사는 추상의 흐름이 상대적으로 강했고, 1990년대 이후부터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으로 워낙 다양화되었기 때문에 1980년대의 민중 미술을 제외하고는 ‘구상 미술’의 흐름을 보기가 어렵다는 인상을 주곤 하는데, 허계와 같은 화가가 구상 회화를 몇 십 년에 걸쳐 제작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우리의 현대 미술사에서 구상 회화를 보다 풍성하게 서술할 가능성을 보여준다.  


그리고 무엇보다 허계의 작품은 시각적인 만족을 준다. 보기에 좋다는 말이다. 밝고 명랑한 색채가 호방한 필치로 그려진 그의 캔버스는 기운이 넘친다. 직관적으로 그 색채의 즐거움과 필치의 율동감을 경험할 수 있다. 그렇기에 허계의 작품은 개념이 중요시되면서 눈의 즐거움을 상당 부분 잃어버린 오늘날의 ‘시각 예술’에 대해 아쉬움을 느끼는 자들에게 충만한 볼거리를 제공한다. 


평생을 교육자로, 또 화가로 살아온 허계는 곧 여든을 맞는다. 국내에는 드문 노년의 여성 화가다. 사실 해외에는 노년에도 작품 활동을 하는 (또는 했던) 여성 미술가를 심심치 않게 찾을 수 있다. 미국의 조지아 오키프, 영국의 로즈 와일리, 일본의 쿠사마 야요이나 오노 요코, 쿠바의 카르멘 헤레라 등등... 한국에는 그러한 ‘할머니 미술가’를 떠올리기가 (윤석남을 제외하고는) 그리 쉽지 않다. 이러한 의미에서도 허계가 힘찬 필치와 명랑한 색채로 가득 찬, 그 특유의 작품을 오래도록 그려주면 좋겠다. 




정하윤(1983~), 캘리포니아 주립대 샌디에이고 캠퍼스 미술사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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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김설류, 「청정한 자연으로 이끄는 소나무의 세계」, 『월간 갤러리 가이드』 1996년 6월호, 「작업실 탐방」, 갤러리가이드[편], 『許桂 : 1974년작 - 2013년작』, 갤러리가이드, 2013에서 재인용.


2)  유준상, 「허계의 송덕송」, 『미술세계』,  2013년 5월호, 위의 책에서 재인용.





허계, <회상 77>, 1977, 캔버스에 유채, 72.7x60.6cm





허계, <장생 81-1>, 1981, 캔버스에 유채, 60.6x50cm





허계, <소나무 96-29>, 1996, 캔버스에 혼합재료, 60.6x91cm





허계, <소나무 01-11>, 2001, 캔버스에 혼합재료, 72.7x90.9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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