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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너머: 조기주의 여성성을 통한 초월에의 의지 | 장하영

현대미술포럼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너머: 조기주의 여성성을 통한 초월에의 의지



조기주(1955~)는 점, 선, 원을 모티브로 금박, 비즈, 금속, 유화물감 등의 다양한 재료로 작품을 창작해왔다. 그는 전통적인 회화에서 벗어나 캔버스의 입체적인 설치, 혼합재료의 사용, 영상 창작, 건축 폐기물을 활용한 작품 등으로 작업의 외연을 넓혀왔다. 조기주의 작업은 재료, 매체, 주제를 통틀어 ‘초월’이라는 단어로 축약할 수 있는데, 이를 가능케 하는 원동력의 주요인은 생명을 탄생시키는 힘, 즉 여성성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경향은 작가의 미술, 수학 배경과 남성중심적이었던 1980년대 한국 미술계에서 작가가 가졌던 문제의식에서 시작되었다. 

조기주는 1975년 이화여대 서양화과에 입학하여 1979년 졸업 후 미국 뉴욕의 프랫 인스티튜트에서 석사 과정을 마쳤다. 작가가 대학생이었을 때 한국은 모더니즘의 영향 아래에 있었는데, 그가 석사 과정을 위해 1970년대 말에서 1980년대 초까지 머물렀던 뉴욕은 이미 모더니즘의 맹위가 사그라들고 포스트모더니즘이 두드러지던 때였다. 당시 뉴욕은 앤디 워홀로 대표되는 팝 아트, 장 미셸 바스키아를 위시한 신표현주의, 행위예술과 개념미술이 혼재된 상태였다. 아울러, 독일 현대미술의 대표작가로 뉴욕 화단에 소개된 요셉 보이스의 전시는 작가에게 미술가의 역할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깊은 고민을 하게 했다. 

작가가 석사를 졸업하고 1982년에 돌아온 한국은 이와는 달리 1970년대 모더니즘에서 1990년대 포스트모더니즘으로 이행하는 과도기에 있었다.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이 주도하는 두 공간을 짧은 시간 안에 경험한 조기주는 두 경향 사이에서 자신이 추구해야 할 미술의 방향에 대해 탐구하게 되었다. 더욱이 그는 남성중심적인 1980년대 한국 미술계에서 가부장적인 남성 미술가들로부터 견제와 배척 등의 고난을 겪어야 했다. 이러한 경험은 조기주로 하여금 자신만의 예술로 표현할 수 있는 여성성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을 품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조기주가 발견한 미술가의 주요한 임무 중 하나는 기성 미술을 탈피하고 예술의 새로운 방향성을 찾아내는 것이었다. 그는 미술의 통념에 도전하는 활동을 <무제(Untitled 81-188)>(1981)라는 석사 졸업 작품으로 시작했다. 이 작품은 세 점의 캔버스 천을 세로로 구성한 것인데, 맨 위의 천에는 커다란 원이 그려져있고 중간에는 반원이, 맨 아래는 원의 일부만이 나타나 있다. 각각의 원에는 작은 유성 같은 무리가 운동성을 띠며 나타난다. 세 점의 캔버스 너비는 일정하지만 높이는 위에서 아래로 갈수록 좁아지고 순차적으로 원이 확대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관람자는 마치 연속적으로 움직이는 세 컷의 영상을 보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된다. 정지된 평면 회화로 운동성과 연속성을 추구한 이 작품은 사물이나 인물의 한 장면을 박제해 놓은 듯한 기존 회화의 전통을 부순 것이었다. 

더불어, 재료적인 측면에서도 작가는 아크릴, 유화물감, 백자토, 닥종이와 같이 기존의 유화에서 탈피한 여러 물질을 사용하여 회화의 관습으로부터 벗어나는 선택을 하였다. 이 작품의 커다란 원은 난자로, 작은 유성 같은 형태는 정자로 해석할 수 있는데, 1980년대 초에 한국 여성미술가가 난자와 정자처럼 여성과 남성의 구체적이고 생물학적인 성(性)을 작품의 소재로 사용한 예는 찾기 어렵다. 이는 운동성을 지닌 정자 같은 형상으로 대변되는 남성성을 포용하는 여성성에 대한 회화로 볼 수 있으며, 작가는 이 작품이 “주체적 창조자로서의 여성성” 1) 을 표현한다고 하였다. 

조기주는 캔버스 천을 입체적으로 설치한 작품을 계속 진행하였다. 1989년 토갤러리에서 열린 개인전에서 그는 <위에서 아래로(Up and Down)>(1989)라는 작품을 선보였는데, 이 또한 전통적으로 벽에 걸리는 평면적 회화의 관습으로부터 탈출한 예시였다. 1993년 작품 <연속되나 연속되어지지 않는(Continued but Discontinued)>은 네 폭으로 나눈 캔버스 천을 그 아래에 부식시킨 동판과 연결한 작품이다. 분절된 캔버스가 벽이 아닌 곳에 설치되어 조각적인 요소로 볼 수 있는 금속판과 연결된 이 작품은 모더니즘의 전통을 전복시킨 결과물이었다. 아울러 작가가 네 폭의 캔버스에 나타난 원이 하나의 동일한 중심을 갖지 않도록 구성했다는 점은 포스트모더니즘의 특징인 탈 중심성을 시각적으로 보여준다. 

조기주는 1991년의 개인전을 준비하며 재료의 한계에 대해 고민을 하던 중 물질을 다른 존재 방식으로 변화시키는 연금술의 방법론에 흥미를 갖게 되었다. <이원성에 관하여 I(According to Duality I)>(1991)는 나무 패널에 원반 형태로 다듬은 구리판을 붙이고 백묵, 유화, 흑연 등으로 배경의 선과 원을 나타낸 작품이다. 여기에는 서로 이질적인 재료들이 연금술을 염두에 둔 작가의 손길에 의해 하나의 화면에 어우러져 있다. 

1997년의 개인전 《4차원으로의 여행》에는 연금술적인 접근에서 더 나아가 미지의 세계로 여겨지는 4차원을 작품으로 구현하고자 하는 조기주의 열망이 나타나 있다. 특히 이 전시에서는 작가가 컴퓨터 그래픽 프로그램으로 구현한 3차원의 가상공간을 작품에 사용함으로써 2차원 평면을 전제로 하는 회화의 확장 가능성을 넓혔다. <이원성을 넘어서 III(Transcendency of Duality III)>(1997)에는 프로그램을 이용해 3차원 공간을 평면에 구현한 배경 위에 금속 재료의 원반 형태와 운동감을 나타내는 선들이 나타나 있다. 이는 연금술이라는 주제와 더불어 새로운 차원을 탐구하고자 하는 작가의 도전을 시각적으로 구현한 작품으로, 이후 전통적 매체의 한계를 넘어서고자 하는 작가의 의지는 영상작업으로 확장된다. 

1999년부터 조기주는 꾸준히 영상작업을 발표하는데, 그는 영상이란 매체를 일컬어 “여성성이 드러난 새로운 미디어(Feminine Media)” 2) 라고 소개했다. 이를 뒷받침하듯이 영상 <초월적 맥(Transcendental Vein)>(1999)은 최소 조형 요소 단위인 점이 연속하여 선이 되고 정자가 되어, 커다란 원이자 우주를 상징하는 난자를 향해 질주하는 모습을 담고 있다. 영상의 배경에는 작가의 여러 작품 속에서 나타난 원의 형상이 겹쳐 나타남으로써 알, 자궁, 난자로 비유되는 여성성이 강조되고 있다. 

2005년의 <A-B-C>는 비유-신체-원을 뜻하는 영어단어 ‘Allegory-Body-Circle’을 축약한 제목으로, 이 작품은 작가가 신체 속에서 찾은 원의 형상을 촬영하여 컴퓨터로 영상 및 배경음악 편집을 하고 모니터에 송출한 것이다. 이는 작가가 1980년대부터 천착해온 운동성과 원 형태의 모티브, 1990년대부터 관심을 가진 테크놀로지, 여성성이 한데 어우러져 발현된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영상에 사용된 신체 부분들은 입, 젖꼭지, 배꼽, 눈, 코, 귀, 목 등으로 이전에 작가는 기하학적인 원형을 통해 여성성을 은유적으로 표현했다면 <A-B-C>에서는 여성성을 보다 직접적인 신체의 형상을 통해 드러내었다.

이후 2015년의 <big and SMALL>은 각 단어의 뜻과는 상반되게 소문자로 표시된 ‘big’과 대문자로 표기된 ‘SMALL’이란 작품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 통념적인 위계질서를 타파하는 작품이다. 이 영상에서 몸집이 왜소한 여성인 작가가 방망이로 큰 체구의 남성을 공격하는 풀 샷 장면에서는 배경음이 거의 나지 않고, 이후 그녀가 종이에 원을 그리거나 뾰족한 바늘로 책상을 찌르는 클로즈업 장면에서는 큰 소리가 들린다. 이 작품은 작은 물체가 움직일 때는 큰 소리가 아닌 희미한 소리가 난다거나, 여성이 남성을 공격하는 경우보다 신체적 힘이 더 세 보이는 남성이 여성을 제압하는 경우가 많다는 등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위계를 청각‧시각‧개념적으로 뒤엎은 것이다. 이로써 작가는 주류와 비주류 또는 중심과 바깥을 구획 지은 모더니즘의 위계질서에 물음을 던지고 있다. 

2004년 인데코갤러리에서 열린 개인전 《화; 化, 和, 火, 花》에서 조기주는 진주 구슬, 비즈, 스팽글 같은 장식적인 재료를 작품에 사용했다. 철학적이고 심오한 내용보다 자연 앞에서 겸손해진 행복하고 즐거운 마음을 표현하고 싶었다는 작가의 바람처럼 2004년 작업의 색깔은 명도 높은 흰색과 파스텔톤이 주를 이루었다. 이는 생명력, 영원성, 우주를 상징하는 조기주의 원이 구슬로 변환되어 장식적인 면이 돋보이는 우아한 여성성으로 나타난 예시이다.

2008년에 들어서 조기주는 <삶의 흔적(The Stains of Life)>이라는 제목의 연작을 발표하는데, 작가는 이를 탈 모더니즘이자 흔적 속에 담긴 여성성을 탐구하는 작업이라고 하였다. 이 연작들은 둥근 원형 바탕의 패널에 물감, 금박, 레진 등의 혼합재료로 얼룩같은 형태를 남기는 방식이다. 이는 작가의 작업실에서 생성되는 날 것이자 친숙한 작업 현장의 자취이며, 모더니즘 회화의 캔버스 바깥에 있던 일상의 흔적을 화면 위로 불러오는 작가의 탈 모더니즘적 동작을 보여주는 기록이기도 하다. 

2014년부터 작가는 ‘스테인드 시멘트(Stained Cement)’라는 테마로 산업 재료인 시멘트 위에 금속, 물감, 흑연과 같은 여러 미술 재료들을 덧입히는 일련의 작업을 시작했다. 조기주는 이를 ‘여성의 연금술’이라 하였는데, 네모난 또는 둥근 모양의 회색 시멘트 바탕은 캔버스를 대체하여 작가가 펼치는 예술적 마법의 실험 판이 되었다. 혼합재료를 사용하여 비정형적인 여러 형태를 시멘트 위에 실험하는 작가는 이러한 작업을 새 생명을 탄생시키는 행위로 여기며 각기 다른 인간을 창조한 조물주의 기쁨이 어떤 것인지 공감하는 경지에까지 이르렀다.

시멘트를 처음부터 직접 반죽하여 작업의 재료로 사용한 것 외에도 조기주는 마르셀 뒤샹의 ‘파운드 오브제(found object)’처럼 ‘파운드 콘크리트(found concrete)’로 새로운 작업을 시작했다. 2020년의 <무제-2033-01>와 <무제-2033-02>처럼 재건축 현장의 무너진 폐건물에서 작가가 발견한 몇 개의 콘크리트 조각들은 그의 손을 거쳐 작품으로 새롭게 탄생하였다. 울퉁불퉁 잘린 콘크리트 조각 위에 금속재료와 물감 등으로 예술적 흔적을 덧입힘으로써 작가는 버려질 것을 새롭게 탄생시키고 상처를 치유하는 연금술을 펼쳤다. 

조기주가 추구한 연금술은 그가 그동안 추구해왔던 ‘재료의 찬미(Celebration of Materials)’라는 주제와 하나가 된다. 2022년 토포하우스에서 열린 모녀전 《발견의 시학 구상과 추상 사이》에 선보인 <기억의 길(Memory Lane)>(2022)은 연금술과 재료의 찬미가 통합된 주제를 잘 보여주는데, 작가는 시멘트, 나무, 구리와 청동, 금과 도자기 등 다양한 재료의 고유한 본질을 탐구하며 각기 다른 물질들이 작품으로 어우러지게 하였다. 그리고 각각 다른 재료들이 입혀진 여러 크기의 패널 여섯 점을 전시장 벽의 하단부터 상단에 이르기까지 세로로 설치함으로써 원이 내포한 운동성을 공간적, 입체적으로 확장하였다. 

더불어, 이 전시에서 조기주는 자신의 얼굴 형상이 희미하게 보이는 <자화상(Self Portrait-2150-WNT)>(2021)과 <자화상(Self Portrait-2150-SMR)>(2021) 등 다섯 점을 전시했다. 네모난 시멘트 패널 위에 배열된 색색의 동그라미, 얼룩, 격자무늬는 이전 조기주 식의 추상화이면서도 여인의 눈코입과 두상 형상은 작가의 기존 추상화에서 결코 찾아볼 수 없던 구상화의 요소이다. 이 연작은 어느 날 작업 중이던 시멘트 위의 우연한 흔적에서 구상적 이미지를 찾아낸 작가의 경험에서 비롯되었다. 나아가 모더니즘적 추상화에 그 반대급부인 구상화를 조화시킨 작가의 선택은 그가 더 이상 거대 담론에 얽매이지 않는 예술적 완숙기에 있음을 보여준다. 

이와 같이 조기주의 작업은 하나의 재료나 매체로 한정 지을 수 없다. 그는 전통적인 네모난 캔버스 위의 유화에서 벗어나 둥그런 화면, 산업 및 건설재료로 여겨지는 시멘트, 비즈나 진주 구슬 같은 비관습적 재료를 사용하고 회화와 설치, 영상, 조각, 공예 사이의 경계를 오가며 미술의 지평을 넓혀왔다. 최근에는 건축폐기물을 사용한 업사이클링 작업에까지 이르며 자칫 포스트모더니즘이 봉착하기 쉬운 허무주의를 재탄생이라는 창조적인 방향으로 치환하고 있다. 

1970~80년대 초 작가가 한국에서 받았던 모더니즘의 세례와 이후 미국 유학에서 경험한 포스트모더니즘의 물결은 이후 그의 작품세계에서 양측을 통섭하며 생명력과 초월을 지향하는 경향으로 다양하게 변주되어 나타났다. 조기주의 작품은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두 거대 담론을 몸소 체험한 예술가의 살아있는 증거물과도 다름이 없다. 그는 정반합의 원리처럼 그 둘을 거쳐 여성성을 통해 기존 예술을 뛰어넘고자 함으로써 남성중심적인 한국현대미술에 변화를 선도한 선구자라 할 수 있다.



장하영(1986~), 이화여대 대학원 미술사학과 석사, 전 더컬럼스 갤러리 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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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조기주 홈페이지( http://kheejoo.com/artwork/), 2022년 7월 12일 접속

2) 위 홈페이지, 2022년 7월 12일 접속  




조기주, <무제(Untitled 81-188)>, 1981, 캔버스에 혼합재료, 188×331cm




조기주, <연속되나 연속되어지지 않는(Continued but Discontinued)>, 1993, 
캔버스에 흑연, 구리안료, 알키드 물감, 한지, 동판, 360×245cm




좌) 조기주, <A-B-C-I-BODY>, 2005, TV 모니터 3대, 40분, 100×123.5×58.1cm
우) 조기주, <A-B-C-IV-Face>, 2005, TV 모니터 6대, 각 6분, 171×173.5×58.1cm




조기주, <기억의 길(Memory Lane), 2022, 패널에 혼합재료, 184×355cm 



조기주, <자화상(Self Portrait-2150-WNT)>, 2021, 시멘트 패널에 혼합재료, 50×50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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