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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바느질로 직조해 낸 김수자의 <일기> 연작 | 전유신

현대미술포럼



바느질로 직조해 낸 김수자의 <일기> 연작



김수자(1950~)는 이화여대 서양화과를 졸업했고, 대학원에 재학 중이던 1970년대 말부터 회화와 바느질을 결합한 <일기> 연작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작가는 “나의 일기는 내 인생의 매듭을 풀기라도 할 것처럼 많은 실을 느리우고, 감고, 홈질하고, 재단하는 몸짓이다. 붙이고, 꿰매는, 그리고 한뜸 한뜸 바느질하는 짓거리는 마치 일기를 쓰듯이 나의 진실을 토해내는 하나의 방법이기 때문이다” 1) 라고 언급한 바 있다. 매일 나를 돌아보며 일기를 쓰는 것과 바느질하는 행위를 동일시하는 것에서 <일기> 연작이 등장하게 된 것이다. 이 연작은 최근까지도 지속적으로 제작되고 있지만, 시기별로 작업의 양상은 조금씩 변화를 거듭해 왔다. 

1980년대의 <일기> 연작에 포함된 작품들은 삼각형 모양의 산이나 반듯하게 경작된 직사각형 의 밭고랑을 연상하게 하는 기하학적인 형태들로 구성된 추상적 풍경이다. 이 시기에 작가는 색을 칠하지 않아 광목천의 느낌을 그대로 노출시킨 직사각형의 캔버스 위에 삼각형의 천을 콜라주하고 그 형태가 캔버스의 틀을 벗어나도록 하거나, 삼각형 모양의 캔버스를 이어 붙여 마름모꼴과 같은 또 다른 기하학적 형태를 만들어 내기도 했다. 이 작품들에서는 정형적인 캔버스의 틀을 탈피한 ‘변형된 캔버스’ 대한 작가의 관심을 확인할 수 있다. 직조된 실의 텍스처가 부각된 천을 캔버스 전체에 도입하거나 부분적으로 덧붙이기도 하고, 때로는 삐뚤빼뚤한 손바느질의 효과를 그대로 살리는 식으로 천과 바느질이라는 재료와 기법을 도입했다. 여기에 연필과 유채를 이용한 채색이 추가된다. 

1990년대에는 기존 작업에서 부각되었던 기하학적인 캔버스 형태와 씨실과 날실이 수직과 수평으로 교차되며 만들어진 격자 형태와는 다른 요소들이 화면에 도입되었다. 이 시기에 작가는 곡선의 형태를 살려 잘라낸 비정형적 형태의 천을 연결해 기하학적인 캔버스의 틀을 탈피하고자 했다. 곡선적 요소가 강조된 변형 캔버스 위에 다양한 모양으로 자른 천들을 자유분방하게 배치하면서 화면에 리듬감도 더해졌다. 꽃무늬나 밝은 색의 체크무늬가 프린트된 천의 원래 색감과 디자인을 그대로 캔버스에 도입했다. 여기에 더해 원색의 강렬한 색채와 표현적인 붓질, 그리고 아크릴 물감의 번짐 효과를 통해 만들어지는 우연성과 같은 요소도 추가되었다. 다양한 형태와 무늬, 색으로 구성되어 자투리 천을 모아 만든 조각보를 연상시키는 1990년대의 <일기> 연작은 각 잡힌 기하학적 형태가 부각되고 색채는 부분적, 제한적으로 사용되었던 1980년대의 작업과는 여러 측면에서 차이를 보여주었다. 

1999년 관훈 갤러리에서 열린 개인전에 출품된 작업에는 <일기>라는 제목에 종이접기, 그림자, 우주, 기원과 같은 부제가 더해졌다. 새로운 제목이 추가되면서 유기적인 작은 생명체 혹은 기하학적 형태들이 마치 우주 공간을 떠다니며 유영하는 듯 보이는 새로운 조형적 특징들도 덧붙여졌다. 종이접기라는 부제가 붙은 작업들의 경우에는 여전히 삼각형이나 사각형과 같은 기하학적 형태들을 반복적으로 배열하거나 종이접기를 위한 도안을 펼쳐 놓은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2차원적인 평면성이 부각되었던 기존의 <일기> 연작과 달리 관훈 갤러리 전시 출품작들에는 3차원적인 공간과 입체감, 그리고 움직이라는 요소가 새롭게 도입된 것이다. 

1990년대 중엽의 작품에는 봄, 섬, 밤에, 바다안개, 사랑의 변증법 등 서정적인 부제를 붙였던 것과 달리, 1990년대 말에는 그림자, 우주, 기원 등의 존재론적 물음을 더한 제목을 사용한 것도 <일기> 연작의 변화된 일면이다. 작가는 “이 세상의 모든 욕망과 꿈과 사랑도 그림자에 불과하여 이것들을 이겨 내기 위해 바느질을 하는 것이다. 나의 경우 바느질은 곧 감정과 현실을 정화시키기 위한 걸러냄의 의식 내지는 초월의 의식이 아닐까. 그리하여 시친 바느질 자국은 열린 공간에서 춤추듯 노래한다”  2) 고 자신의 작업을 설명한 바 있다. 

작가가 서정적이고 아름다운 삶의 이면에 자리한 그림자와 어두움을 이겨내는 의식으로 바느질을 한 땀 한 땀 이어 나가면, 그 결과물인 바느질 자국이 캔버스라는 공간에서 춤을 추고 노래하듯 새로운 공간과 리듬을 창출해해는 것이다. 존재론적인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과정을 반영하고 있는 이 시기의 작업에서는 밝고 화려한 색채들을 자제하고 대신 검정과 흰색을 기조로 하는 무채색의 색조가 부각되었다.

조형요소에 대한 형식적인 탐구를 시작으로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삶의 문제를 모색하는 것을 거쳐 2000년대 초 김수자는 다시 한 번 작업의 변화를 시도한다. 꽃, 나뭇잎, 산 등 자연의 요소를 바느질해 화면에 도입하고 기쁨을 뜻하는 ‘열(悅)’이라는 부제를 붙이기도 하고, ‘우주적 공간’이라는 부제를 붙인 작품에서는 우주의 기운을 빨아들이는 듯한 원통형의 기하학적 형태를 도입하기도 했다. 이 시기 작업에서 가장 큰 변화는 재킷이나 바지, 목도리, 의자와 같은 의복과 가구, 즉 일상적이고 구체적인 형태들을 바느질을 통해 캔버스 위에 입체적으로 되살려낸 것이다. 

이 작품들에는 ‘부재(不在)’라는 부제를 붙였는데, 이는 누군가가 입거나 사용했던 의복과 가구를 캔버스 위에 덩그러니 존재하게 함으로써 그것을 사용했던 존재가 부재하게 된 상황을 역설적으로 드러내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작가는 세탁기에서 빨래를 꺼내다가 우연히 가시적인 것을 통해 비가시적인 것을 드러내는, 즉 존재를 통해 부재를 보여줄 수 있는 방식을 깨달았다고 한다.3)  옷을 소재로 존재와 부재의 양면성을 드러내는 새로운 <일기> 연작은 2010년대까지도 지속적으로 제작되었다. 이 작업에서는 실을 뽑아내 늘어트리는 방식을 새로운 바느질 기법도 시도되었다. 

김수자는 단색화가 한국 미술계의 주도적인 미술 운동으로 자리 잡았던 1970년대에 대학과 대학원에서 미술을 전공했다. 그의 작업에서 구상성을 제거한 모노크롬의 추상적 형태와 단색조의 색채 사용으로 요약되는 단색화의 특성이 엿보이는 것은 그러한 이유에서 일 것이다. 형식적인 측면에서는 이처럼 단색화의 영향을 일부 발견할 수 있지만, 김수자의 작업에서는 단색화가 지닌 형식주의를 탈피하기 위한 여러 시도들 또한 발견할 수 있다. 특히 주류 미술계에서 사용되어온 일반적인 미술 기법이 아닌 바느질을 작업에 도입한 것이 대표적이다. 

한국 미술계에서 남성 중심적인 주류 미술과는 구분되는 여성 미술가들의 작업이 부각되기 시작한 1980년대 이후 김수자의 바느질 작업도 본격화되었다. 이 시기에 일부 여성 작가들은 고급 미술에서 사용되었던 전통적인 기법들을 대신해 여성의 소일거리로 치부되었던 바느질을 통해 여성의 경험과 감수성을 드러내고자 했다. 김수자 역시 자신의 경험과 감수성을 드러내기 위한 수단으로 바느질을 작업에 처음 도입했다. 이것은 나만의 우주를 바느질로 직조하는 방식이기도 했다. 그렇지만 점차 실로 엮인 나와 너, 존재와 부재와 같은 서로 다른 대상들이 연결되어 있는 우주로 김수자의 세계는 점차 확장되었다. 나만의 내밀한 세계를 기록하는 일기라는 제목을 여전히 작품에 붙이고 있지만, 김수자의 일기는 우리의 삶에 존재하는 양면적이고 이중적인 요소들을 실과 바느질로 연결하는 행위로 점차 확장되어 가는 과정에 있는 것이다. 



전유신(1975~), 이화여대 대학원 미술사학과 박사,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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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김수자, 「작가 노트」, 최순택, 「자연적 섭리와 내면적 체험을 직조한 시정적 추상회화」, 『김수자』, 마르스 아트 갤러리, 1994에서 재인용.

2)  김수자, 「작가 노트」, 김복영, 「걸러냄 또는 초월의 몸짓」, 『김수자』, 관훈갤러리, 1999에서 재인용.

3)  고충환, 「Diary-Existence」, 네오룩, 2015 (https://neolook.com/archives/20150405e)




김수자, <일기 ’85-10>, 1985, 실, 유채, 연필, 135x245cm, 출처: 김수자 개인전 도록




김수자, <’94 Diary-Two Minds>, 1994, 혼합매체, 34x49.5cm, 출처: 김수자 개인전 도록




김수자, <’99 일기-그림자>, 1999, 혼합매체, 139x139cm, 출처: 김수자 개인전 도록




김수자, <’02 일기-부재 II>, 2002, 혼합매체, 150x150cm, 출처: 김수자 개인전 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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