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


컬럼


  • 트위터
  • 인스타그램1604
  • 유튜브20240110

연재컬럼

인쇄 스크랩 URL 트위터 페이스북 목록

(88)심죽자의 꽃그림, 정물과 풍경의 사이에서 | 이소임

현대미술포럼



심죽자의 꽃그림, 정물과 풍경의 사이에서



1977년 12월, 조형화랑에서는 심죽자(沈竹子, 1929∼)의 첫 번째 단독 개인전이 열렸다. 전시장에는 인상주의 화풍으로 철쭉, 장미, 아네모네 등 꽃을 그린 다채로운 회화 작품이 주를 이루었다. 이미 24세에 《대한민국미술전람회》(1954)에서 특선을 수상하며 작가로 데뷔했음에도 불구하고, 남편 이용환과의 《부부전》 외에 단독으로 전시를 꾸려본 이력이 없던 그였다. 그러나 학문을 중시한 양반가 집안에서 자란 심죽자는 남대문소학교와 무학고녀에서 일본 신학문을 교육받고, 성북동회화연구소를 거쳐 서울대학교 서양화과에 제1회로 입학한 엘리트 미술인이다. 이런 그가 40대 후반까지 “반쪽짜리 전시장” 1) 에 작품을 걸어야 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가 단독 개인전 후 본격적으로 ‘꽃그림’을 그리게 된 경위를 추적하는 것을 시작으로 그의 70여 년 화력을 돌아보고자 한다.

작가는 1974년에 제1회 정월 나혜석 미술상을 수상하면서, 스스로 정체기라 보았던 당시의 상황을 타개할 새로운 소재를 찾기 위해 고심했다. 이는 고희동 미술상 이후 10년 만에 민간인에 의해 제정된 상이자, 63명의 남성 비평가와 미술가의 심사를 통해 얻은 성과인 만큼 의미가 깊었던 것이다. 이전의 《부부전》에서 심죽자가 주로 과일과 화병 등 기물을 구성한 실내 정물화를 발표해 온 반면에, 남편 이용환(1929∼2004)은 야외 사생을 기반으로 자연을 그린 풍경화를 선보였다. 

“내 ‘화가의 꿈’은 마치 밖에서 데리고 들어온 자식인 양, 온 식구가 잠든 후에야 보살핌이 시작되었다. 햇빛이 아닌 불빛 아래서 유화의 화학작용을 살피고, 밑의 색과 위에 올라오는 물감과의 조화를 보고, 칠하고 긁어내는 작업에 몰두하다 보면 밤도 잊었다” 
『월간독자 Reader』, 2017년 8월, p.83.

결혼 후 남편이 석사를 마치고 두 번에 걸쳐 프랑스 유학을 다녀오는 등 끊김 없이 활동한 것에 비해, 심죽자는 세 아이의 연이은 출산과 육아, 그리고 교육가로서 생업을 병행하느라 그림 그리기를 후 순위에 둘 수밖에 없었다. 남편과 함께 하는 《부부전》을 택한 데에도 생활에 치여 작업 분량을 채우지 못한 이유가 컸다. 이런 결혼생활 중 바깥의 자연이 아닌 집안의 전경, 정물은 그가 편하게 취할 수 있는 소재였던 것 이다. 따라서 1970년대 중반 이후 시작된 심죽자의 꽃그림은 현실과 타협하며 그린 1960년대 정물화에서 한 단계 나아간 것이자, 일생의 동반자이자 라이벌이었던 남편의 풍경화로부터도 거리를 둔 선택이었다. 이후 꽃은 색채에 대한 탐구와 맞물려 오랫동안 그의 작품세계에서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게 된다.

서울대학교 서양화과 재학시절(1949∼1955) 심죽자는 앞서 무학고녀에서 만난 스승 이해성(1916∼?)의 권유로 성북동회화연구소(城北洞繪畵硏究所)와 남산 시립미술원 활동을 병행했다. 2) 이는 아카데믹한 사생수업 외에 당시 흔치 않았던 유화와 파스텔, 수채 등으로 색을 자유롭게 구현하는 방법을 터득함으로써 1970년대 중엽 이후 본격적으로 전개된 색채 실험의 기본기가 되었다. 그는 특히 여러 재료 중에서도 깊이 있는 색을 구현하는 재료로 유화를 꼽았다. 이외에 이해성과 제자들의 합평모임이었던 심우회(心宇會) 역시 그가 진지하게 자신만의 예술관을 모색하게 한 배경이 된 것으로 보인다.

한편 작가는 한국전쟁의 발발(1950)과 함께 부산 피난길에 올라 전시연합대학에 다니게 되면서 아카데믹한 사생에서 벗어나 작품에 시대성과 역사적 참여의식을 담아내겠다고 다짐한다. 이후 <대보름 쥐불놀이> 등 전쟁과 피난생활을 소재로 한 그림을 그렸고, 환도 직후 열린 제3회 《국전》(1954)에 <어머니와 두 아이>(1953)를 출품, 특선을 수상하게 된다. 이 유화작품은 소련연방과 미국 두 축으로 전개된 냉전의 상황 가운데 격화되어간 남북한의 갈등관계를 형제가 서로 다투는 장면으로 비유해 그린 것이다. 그림에서 단순화된 얼굴표현은 전쟁 후 상실감을 나타내며, 붉은 색면으로 단일하게 표현된 배경은 이 가족의 비극적인 상황을 암시한다. 인물의 신체는 각진 형태의 구조로 분석되었으며, 함께 배치된 백자는 옆에서 본 시점으로 그려져 이 시기 작가가 큐비즘의 양식에 천착했음을 보여준다. 

사실 동시기 국내 화단에서는 큐비즘 양식과 전쟁주제를 결합한 그림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하지만 심죽자는 미술가의 시대성이 ‘유행화’되는 것을 지양하고, 이를 자신의 조형의식과 긴밀하게 결합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한국 현대미술사에서 1950년대 전반부터 큐비즘과 함께 당위적인 주제로 자주 채택된 ‘전쟁체험에 대한 기록’이 1950년대 말 이후 앵포르멜이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지속된 것과 다르게, 심죽자의 경우 1954년경을 기점으로 전쟁과 같은 서사적 주제로부터 빠르게 선회하는 경향을 보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주제적 변화는 1956년 첫 아이의 백일에 맞춰 개최한 제1회 《이용환, 심죽자 작품전》에서 가장 먼저 목격된다. 이 시기 심죽자는 <노란 옷>(1956), <연습복>(1957) 등 여성 인물화를 자주 그렸다. 모두 다른 여성을 모델로 한 그림이지만 화면을 가로질러 수직적으로 표현된 신체와 정면을 똑바로 응시하는 강한 눈빛에서 여성으로서 작가의 결연한 자의식을 느낄 수 있다. 또 다른 한편, 해당 그림들에서는 당시 작가의 관심이 큐비즘에서 다른 곳으로 옮겨가고 있음을 감지하게 한다. 기하학적인 구조로 견고하게 분할된 화면은 여전히 큐비즘의 영향으로 보이지만, 지나치게 단순화시킨 나머지 다소 부자연스러운 신체표현은 대상의 견고한 내적 균형과 질서의 감각을 중시했던 후기인상주의자들의 강령을 떠올리게 하는 것이다. 작가에 따르면 이 시기 그는 미협논란과 미술운동으로 소란스러운 국내화단의 동향으로부터 거리를 두고, 한국일보 연재기사로 접한 폴 발레리(Paul Valéry, 1871∼1945)의 상징주의 시론과 『예술신조(芸術新潮)』, 『미술수첩(美術手帖)』 등 일본 미술잡지에서 본 후기인상주의, 야수주의 등 서구 미술가들의 그림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소화시키는 데 전념했다고 한다. 

한편 작가는 서울대 졸업 직후부터 교육자로서의 생업을 시작해 1972년까지 수도고녀, 이화여자대학교, 건국대학교 등에서 지속했다. 또 출산과 육아로 5년 가까이 작업 공백기를 가지게 된 그는 프랑스 유학을 마친 남편의 귀국을 기념하여 열린 제2회 《부부전》(1962, 동화백화점 화랑)에 인물화가 아닌, 어두운 실내 전경을 그린 정물화를 출품해 주목된다. 이용환이 프랑스 정경을 그린 풍경화와 누드화 등 31점에 달하는 작품을 선보인 것에 반해 심죽자는 단 12점의 작품을 출품했으며 <실내>, <창가>, <정물> 등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 실내공간에 과일과 화병 등 기물을 배치해 그린 그림이 대부분이었다. 

아울러, 재료사용에 있어서도 변화를 보이는데, 깊이감 있는 색채표현을 위해 유화를 고집했던 수업기와는 달리, 빨리 마르고 취급이 간편한 수채화와 아크릴을 사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면서도 수채화가 가진 가벼운 표현의 한계에서 벗어나기 위해 젯소로 밑칠해 두터운 바탕을 만드는 방법을 개발하기도 했다. 양육과 생업으로 바빠 어두운 밤이 되어서야 붓을 들 수 있었던 작가는 태양광에 의한 찰나의 인상보다 오랜 시간 치밀한 계획을 통해 사물 내부의 본질을 이끌어내는 방법에 매진하게 되었다. 이러한 방법론은 자연히 대상의 조화로운 배치와 안정적인 구도를 이루어내는 데 중점을 둔 그림들로 나타났다.

또한 작가는 1970년대 전반까지 정물화 외에 세 아이를 모델로 수많은 인물화를 남겼다. 당시 소아마비를 앓던 딸을 그린 <소녀>(1964)에서 확인되듯 아이들은 주로 집안에서 낮잠을 자거나, 쇼파에 앉아 책을 읽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이러한 목가적인 풍경은 평화로운 가정을 상징하는 스테레오타입과도 같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당시 집안에서 가사를 수행하는 일이 일상의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던 작가 자신의 자전적 기록으로도 읽힌다. 같은 시기 <화장>(1970년경), <머리빗는 소녀>(1972년경) 등 여성 인물화도 종종 발견되는데 강인한 모습으로 그려졌던 1950년대 여성 인물화와 다르게 주로 창가나 정원과 같이 사적인 장소에서 화장하고 머리를 빗는 등 단장하는 모습으로 표현되어 차이를 보인다.

한편 이런 그림들과는 다르게 작가는 지식인으로서의 소명을 다하기 위해 여러 활동을 꾸준히 지속했는데, 이는 특히 1970년대 초에 가장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학창시절 시작된 앙가주망(engagement) 동인회 활동 외에도 1972년에는 여성의 사회참여를 위해 결성한 ‘전문직업여성클럽(B.P.W.) 한국연맹’의 회장직을 역임하기도 했다. 당시 심죽자와 함께 활동한 인물로는 한국 소비자운동을 이끈 정광모 한국일보 기자와 김옥길 이화여대 총장 등이 있다. 또 경향신문 ‘명사의 소리’ 부문에 정치권을 비판하는 칼럼을 여러 차례에 걸쳐 기고했으며, 소설가 이병주(1921-1992)와 가깝게 교유하며 한국 근현대사의 이데올로기 문제를 드러낸 소설 「지리산」(1972∼1978), 「예낭 풍물지」(1974)의 삽화를 그려 이례적이다. 이후 아이들이 모두 학교에 입학해 양육에 부담을 덜게 되고, 종국에는 1977년 정월 미술상을 수상하자 작가에게 이 시기는 자신의 작업을 새로운 국면으로 진전시킬 중요한 변곡점으로 인식되었다.

“아이들을 기르면서 내 그림도 바뀌기 시작했다 … 학생시절 ‘진부하게 무슨 꽃이야!’하며 무시하고 정물화나 꽃그림은 거들떠보지도 않던 나로서는 큰 변화였다. 계절에 따라 찾는 꽃시장에서 느껴지던 움트는 생명의 힘! … 나는 꽃을 사실로 그리지 않는다. 다 시들고 모든 모습이 사라진 후 내 마음에 간직되는 세계를 그렸다 … 한동안 꽃을 그리다 나중에는 꽃 이파리만 그렸다. 개화, 그것은 감동 그 자체였다. 땅의 모든 정기를 담고 올라와서 줄기를 타고 마지막에 활짝 핀 꽃, 내가 그린 꽃잎 하나하나에는 내 얘기가 담겨있었다” 
『가톨릭 다이제스트』, 2010년 4월, p.32.

작가의 말처럼 꽃은 과거의 소재였던 정물(靜物)을 과감히 넘어서서, 무한한 생명력을 발현하는 근원으로서의 자연(自然)이다. 또한 꽃은 순수한 조형적 관계에 대한 탐구를 심화시킬 수 있는 탁월한 소재이기도 했다. 1980년경에 그린 <꽃>에서 꽃은 형태가 아닌 구조를 통해 인식된다. 다시 말해 객관적인 형상으로 재현되기보다 아래에서 위로 빠르게 뻗어 올라가는 붓 터치와 경쾌한 색채의 배열, 그리고 이 모든 조형요소의 조화로운 구성을 통해 생명의 본질 그 자체로 치환되는 것이다. 특히 그는 꽃이 지닌 화려하고 생동감 있는 이미지를 통해 비로소 ‘순수한’ 색채를 구현할 수 있었다. 심죽자는 조색하지 않은 물감 본연의 순수한 색감만으로 한층 더 풍부하고 청아한 자연의 화면을 만들어내고자 했다. 또 순수한 화면을 위해서는 자연 앞에서의 오랜 사색이 선행되어야 하며, 이후 치밀하게 계산된 밑칠과 덧칠, 그리고 색채배열만이 오히려 시시각각 역동적으로 변화하는 자연의 본성을 통찰하는 결과를 이끌어낸다고 보았다.

결과적으로 꽃그림을 통한 생명감 있는 화면의 시도는 작가로 하여금 풍경화라는 새로운 장르에 도전하게 한 것으로 보인다. 1991년 프랑스 체류를 계기로 <창> 연작을,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는 <무지개> 연작을 시작한 것이다. <창>(1992)에서 작가는 발코니의 난간이라는 장치를 사이에 두고 자연을 관조하고 있지만 3) , 이후 2000년대 그림에서 총천연색으로 빛나는 무지개는 손에 닿을 듯 가깝다. 정물을 거쳐 꽃의 생명력을 통해 순수한 색이 현현할 수 있음을 깨달은 작가는, 점차 자연과의 실질적 거리를 좁혀나가며 그것이 담지한 더 많은 가능성을 찾아나간 셈이다. 필자가 마주한 아흔세 살 작가의 뽀얀 얼굴은 이제 막 영근 꽃처럼 맑은 정취와 에너지를 발산하고 있었다. 이런 순수함이 지난 70여 년, 여러 풍파 속에서도 묵묵히 혼자만의 탐구를 개진해오게 한 그만의 원동력이 된 것은 아닐지 짐작해 본다.



이소임(1988∼), 이화여대 대학원 미술사학과 석사, 현재 아마도예술공간 코디네이터



ㅡㅡㅡㅡㅡ
1) 심죽자와의 인터뷰. 2022년 8월 1일, 작가의 작업실.

2) 당시 관학교육기관이었던 동경예술학교(東京藝術大学)에서 유학하고 무학고녀에 첫부임한 이해성은 심죽자에게 석고상과 정물, 인체를 모델로 명함, 원근법과 같은 기초지식을 가르쳤다. 심죽자는 그의 권유로 1948년 환도 직후 성북동회화연구소에 입소하여 1년간 전문교육을 받았으며, 1950년에는 남산 시립미술연구원으로 옮겨 연구를 심화해 나갔다.

3) 이러한 구도는 “내 세계는 내부에 있었고, 외부 역시 창가를 통한 것”이었다는 작가의 고백을 떠올리게 한다. 「심죽자 인터뷰(일시: 2011, 사당동 자택)」, 『한국 근현대예술사 구술채록 연구시리즈 214 심죽자: 작품 활동 Ⅲ(1990∼2000년대)』(한국문화예술위원회 예술자료원, 2011)




심죽자, <어머니와 두 아이>, 1953, 캔버스에 유채, 113×145.1cm, 사진: 작가 제공




심죽자, <정물>, 1962년경, 《제2회 이용환, 심죽자 작품전》(1962. 10. 20. ∼ 26, 동화백화점화랑) 출품작, 
종이에 수채, 사진: 작가 제공




심죽자, <소녀>, 1964, 캔버스에 유채, 90×72.7cm, 사진: 작가 제공




심죽자, <꽃>, 1980년경, 《심죽자 작품전》(1980. 5. 6. ∼ 12, 수화랑) 출품작, 캔버스에 유채, 41×32cm, 사진: 작가 제공




심죽자, <창>, 1992, 캔버스에 유채, 사진: 작가 제공






하단 정보

FAMILY SITE

03015 서울 종로구 홍지문1길 4 (홍지동44) 김달진미술연구소 T +82.2.730.6214 F +82.2.730.9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