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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정경연의 부드러운 조각 | 장하영

현대미술포럼



정경연의 부드러운 조각



정경연(1955~)은 섬유라는 소재를 주로 하여 1970년대 후반부터 작품세계를 펼쳐왔다. 그는 일반적으로 딱딱한 재료를 다루는 조각이란 분야에 섬유라는 부드러운 소재를 접목한 국내 ‘부드러운 조각(soft sculpture)’의 선구자이다. 오랫동안 직조, 염색, 바느질은 조각과는 어울리지 않는 것으로 치부되어 왔지만 정경연은 이러한 여성적 행위를 조각의 영역으로 포용하였다.

정경연은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2학년을 마친 후 1975년에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1978년 메사추세츠 컬리지 오브 아트(Massachusetts College of Art)에서 섬유예술(Fiber Art)을 전공하고 1979년 로드아일랜드 스쿨 오브 디자인(Rhode Island School of Design)에서 텍스타일(Textile) 전공으로 석사 과정을 졸업했다. 미국 유학 시절 회화과와 조각과 사이에서 어떤 전공을 선택할 것인지 고민 중에 미술 장르에 구애받지 않는 섬유예술의 매력을 발견하여 이를 전공으로 선택하였다. 

정경연은 대학시절에 직물과 같은 연성재료를 잘 다루려면 돌과 금속 같은 경성재료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어 조각에 대한 조예도 넓혀갔다. 이때 심화시킨 조각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그는 후에 브론즈, 도자, 테라코타 같은 입체작을 만들게 된다. 또한 섬유를 재료로 하는 전공을 익히다 보니 자연스레 직물 디자인 작업도 하게 되어 이는 그가 디자인으로도 예술적 영역을 확장하는 기회가 되었다. 이와 같이 폭넓은 예술적 실천의 중심에는 작가가 줄곧 천착해 온 장갑이라는 소재가 있다. 

그가 긴 시간 동안 장갑을 창작의 모티브로 삼게 된 계기는 개인적이고 친밀한 관계에서 비롯되었다. 미국 유학 중인 1976년에 정경연은 딸의 손이 고된 작업으로 상할까 염려하는 어머니로부터 한국에서 면장갑 한 상자를 받았다. 이에 작가는 모친의 사랑과 그에 대한 감사를 느끼며 자신이 스스로의 노력으로 누리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두 손 모아 기도하는 가족, 거리를 청소하는 환경미화원의 손, 장갑을 끼고 벽돌을 쌓는 인부 등 많은 타인의 손과 수고에 의해 이루어 진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이때 면장갑으로부터 받은 감흥은 이후 정경연의 작업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1980년에 작가가 완성한 <무제 80-7>은 각각 다른 색채와 모양으로 물들인 수백 개의 장갑으로 만든 작품이다. 작가는 각 장갑 위에 그림을 그리고 안에는 솜을 넣어 입체감을 살렸다. 깍지를 낀 모양, 주먹을 쥐거나 손가락을 접은 모양 등 색깔과 무늬만이 아닌 형태도 다채로운 이 장갑들은 서로 다른 삶을 살아가는 인간군상을 축약한다. 

1979년에 귀국하여 이듬해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교수가 된 작가는 1981년 서울 백상 기념관에서 초대 개인전을 열었는데, 이 전시는 한국 미술계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전까지 직물을 재료로 하는 미술 행위는 공예로 간주되었지만, 이 전시에서 정경연은 섬유로 순수미술 작품을 창작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1981년 당시 조선일보와 서울신문을 비롯한 여러 언론지에 정경연은 ‘파격적 섬유예술’을 처음으로 시도한 작가이자 ‘국내 첫 섬유 조형전’을 연 선구자로 소개되었다. 이 개인전에서 작가는 실제보다 더욱 크게 만든 장갑을 서로 맞물리거나 엿가락처럼 늘여진 원통형의 천을 쌓아 올리고, 길고 가늘게 잘린 한지의 끝부분을 염색하여 벽에 거는 등 가소성이 높은 부드러운 조각을 선보였다. 이는 섬유라는 재료의 다양한 형태와 조형적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1980년대 초중반부터 작가는 장갑의 손등과 손가락 부분을 길게 늘어뜨린 작품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1984년의 <무제 84>는 세 겹으로 겹친 장갑들의 손가락 부분이 길게 늘어져 있고 1980년대 중후반에 이르면 손가락이 더욱 길어져 마치 긴 촉수들이 군집하여 있는 듯 보인다. 1980년대 중반부터 정경연의 장갑은 관람자를 둘러싸는 설치예술로 확장된다. 손가락이 길게 늘어진 <무제 85>(1985)는 가로, 세로가 약 3미터에서 2.5미터에 이르는 대형 설치작이고 직사각형의 분리벽 6개를 장갑으로 빼곡히 뒤덮은 <무제 87-1>(1987)은 사람보다 한결 큰 너비와 높이로 구성되어 있다.

1990년대 작품의 특징은 <무제 90-A>(1990), <무제 90-D>(1990), <무제 90-O>(1990)처럼 장갑의 손가락 부분이 겹쳐 틈새 없이 서로를 붙잡거나 악수하는 듯이 이어져 있는 것인데 손들이 관계와 연대를 형성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한편, 1993년 작 <무제 93>은 약 4미터로 연장된 장갑의 길쭉한 손가락 대신 발가락 같은 뭉뚝한 형태가 이어져 있다. 작가는 각 장갑의 염색된 부분이 서로 엇갈리도록 배열하여 작품이 꿈틀대는 듯한 망막적 환영을 일으켰다. 아울러 기형적으로 단축되거나 늘여진 손가락은 불완전한 신체를 표상한다. 배척당하기 쉬운 불완전한 신체형상은 정경연의 작업에서 도리어 아름다움을 나타내고 신선한 충격을 유발한다. 

정경연은 첫 개인전에서부터 한지를 이용한 작품을 선보였듯이 직물만이 아니라 종이라는 재료에 관해서도 관심을 기울여왔다. <무제 P-1>(1994)은 여러 사람의 장갑 낀 손 백여 개를 한지로 형을 떠서 그것을 말리고 붙이기를 반복하여 10년간 집적시켜 만든 부조 작품이다. 사람의 얼굴에 못지않게 풍부한 이야기를 표현하는 신체 부위가 손인 만큼, 이 작품은 다양한 손의 표정을 통해 각양각색의 삶을 관람자에게 전한다. 

2004년에 작가는 표면에 염색한 한지를 붙인 한 점당 세로 2.5미터에 이르는 장갑 모양 여러 개를 천장에 매단 설치작 <무제 P-04>를 선보였다. 장갑은 손을 덮는 물건인데, 역설적으로 이 작품의 손등 중앙에는 동그란 구멍이 있다. 그리고 그 구멍은 안과 밖을 잇는다. 이 장갑은 야외에도 설치되어 구멍을 통해 풍경을 담아내는데 비움으로 채워지는 불교의 가르침을 시각적으로 나타내는 듯하다. 

2000년대 후반의 <블랙홀> 연작은 강하게 대비되는 진한 갈색과 흰색을 사용함으로써 음과 양, 삶과 죽음과 같은 인간 모두가 맞닥뜨리는 근본적인 주제를 담고 있다. 원형의 만다라가 연상되기도 하는 <블랙홀> 연작의 창작 배경에는 불교의 영향이 있었다. 이 일련의 작품을 창작할 때 작가는 자신의 작업 과정을 구도의 여정에 비유했다. 이처럼 끝없는 수행을 통해 정진하는 구도의 과정처럼 정경연의 작업은 노동집약적이다. 직물의 면을 분할해 채색하거나 염색한 후 말리고 찌고 꿰매며 올을 풀기도 한다. 손의 다양한 표정을 이끌어 내는 그의 작업은 실로 작가의 무수한 손길이 닿아 만들어지는 손의 흔적이다.

그리고 정경연의 작품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점은 산업사회와 노동을 상징하는 현대적인 사물인 면장갑을 염색하는 방식에서 엿보이는 수묵화와 같은 기법이다. 1980년대의 <무제> 연작은 길게 늘어진 장갑의 손가락 끝부분이 검정 또는 흰색이고 손목으로 갈수록 서서히 면장갑 본래의 색이나 어두운 색깔로 바뀐다. 작가는 이러한 색채와 명도의 변화가 동양화에서 얻은 영향 때문이라고 하였다. 십 대 시절 동양화를 배우며 화선지에 먹이 자연스레 번지는 효과를 체득했고 이러한 경험이 장갑을 염색할 때 무의식적으로 발현된다는 것이다. 1) 특히 <블랙홀> 연작은 먹물이 흰 화선지를 타고 점점 연해지듯이 장갑의 색깔로 먹의 농담을 표현하는 것 같은 효과를 낸다. 정경연은 섬유라는 유연한 재료로 조각의 지평을 넓힌 것만이 아니라 동서양의 문화와 다른 시대마저 접합하여 자신만의 독창적인 세계를 구축해 온 것이다. 

주로 무채색이었던 정경연의 작품에 2000년대 중후반부터는 다채로운 색깔들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그중 2006년의 <어울림> 연작은 색색의 장갑을 부조로 구성한 것으로 표면에 반짝이는 가루가 보인다. 이 가루는 치유를 상징하는 소재로서 작가는 은과 금을 벽사(闢邪)의 의미로 사용하던 옛 어른들의 지혜를 본받아 천에 금가루를 입히거나 광목 실에 금분을 묻히는 작업을 해왔다. 은, 금, 반짝이는 가루를 작업의 소재로 사용하면서 작가는 각종 참사나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무수한 비극을 애도하고 우리가 사는 세상에 사랑과 용서, 배려가 깃들기를 염원한다.

<하모니> 연작 중 2007년에서 2008년에 창작된 비디오 설치작업은 영상으로 형형색색의 장갑을 보여줌으로써 서로 다른 문화와 종교 간의 화합과 평화를 기원하는 작가의 메시지를 담았다. 자신을 위해 손 모아 기도하는 어머니께 받은 장갑에서부터 발현된 정경연의 손 형상은 개인의 영역을 넘어 동시대를 살아가는 무수한 타인의 안녕을 염원하는 손으로 지경을 넓혀가고 있다.

이처럼 부드러운 섬유를 소재로 한 정경연의 작업은 촉각적인 손의 형상을 반복하며 너른 외연을 빚어간다. 특히 납작하게 누르면 평면이 되고 쌓고 접거나 안에 무엇인가를 채워 넣으면 입체가 되는 정경연의 면장갑은 변신을 거듭하며 각 미술 영역을 구획한 모더니즘의 한계를 타파해 왔다. 색색의 장갑들은 화면과 공간을 가득 메우며 예술적 오브제인 듯, 우리가 사용하는 사물인 듯, 때로는 그 어떤 관념에도 속박되지 않는 생명체인 듯 목소리를 낸다. 그러나 정경연의 경계를 뛰어넘는 장갑은 당당하되 폭력적이거나 강압적이지 않다. 장갑의 본래 목적이 희로애락이 점철된 사람의 손을 감싸고 지키기 위함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경연의 작업은 누군가의 온기를 머금고 미술의 장르, 동양과 서양, 과거와 현대를 오가며 작가와 관람자의 삶을 따뜻하게 어루만질 수 있는 것이다. 



장하영(1986~), 이화여대 대학원 미술사학과 석사, 전 더컬럼스 갤러리 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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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정경연 홈페이지(http://chungkyoungyeon.com/INTERVIEW#lg=w202003062eea1465aec7e&slide=1), 2022년 8월 28일 접속




정경연, <무제 80-7>, 1980, 면장갑에 염색, 178×345cm 출처: 정경연 홈페이지




정경연, <무제 87-1>, 1987, 면장갑에 염색 및 혼합재료, 설치, 각 85×85×210cm 출처: 정경연 홈페이지




정경연, <무제 93>, 1993, 면장갑에 염색 및 혼합재료, 설치, 420×400cm 출처: 정경연 홈페이지




정경연, <어울림-사>, 2006, 혼합재료, 50×48cm 출처: 정경연 홈페이지




정경연, <블랙홀 09-01>, 2009, 캔버스에 혼합재료, 181.8×227.4cm 출처: 정경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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