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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자연을 품은 담담한 붓질, 박인경의 수묵 추상 | 최하림

현대미술포럼



자연을 품은 담담한 붓질, 박인경의 수묵 추상



박인경(1926~)은 1958년 프랑스로 건너가 현재까지 작업하고 있는 재불 화가이다. 1949년 이화여대 미술학부를 제1회로 졸업한 뒤 같은 해 《대한민국미술전람회》(이하 《국전》)에 <채석장>으로 입선했다. 이후 1950년에 당대 유일한 현대미술 상설미술관으로 평가받았던 대원화랑의 상설전시에 김은호, 이응노, 김기창, 박래현과 나란히 출품했고, 1954년 《대한미협전》에 이상범, 이응노, 박노수, 천경자 등과 함께 참여하며 국내 동양화단에서 입지를 다졌다. 그러던 그가 미술계에 첫걸음을 뗀 지 10년을 바라보던, 작가로서 한창 활발히 활동하던 시점에 돌연 도불을 결심했다. 다소 의문스러운 그의 결정은 남편 고암 이응노가 평론가 자크 라센느(Jacques Lassaigne)의 초청으로 프랑스에 방문한 후 잔류했기 때문이었다. 

프랑스로의 이주는 박인경에게 예술적으로 성장할 기회를 제공하리라 기대되었으나, 타지 생활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독일로 먼저 넘어간 첫해에는 고암과 함께 본(Bonn) 시립미술관의 예거호이센(jägerhäuschen)에서 《부부전》을 개최했다. 그러나 파리에서는 “저분(고암)만 그림을 그리고” 박인경은 그릴 수 없던 시절도 있었다. 1) 그는 아들 융세를 도맡아 돌보는 동시에, 프랑스어를 하지 못하는 이응노의 귀와 입이 되어야 했다. 고암의 주도로 1964년 파리동양미술학교(L’Académie de Peinture Orientale de Paris)가, 1976년 고려화랑이 설립된 뒤로는 더욱 작업에 몰두할 여력이 없었지만, 마치 예술을 사랑하는 방식에는 왕도가 없다는 듯이 박인경은 ‘예술 행정가’를 기꺼이 자처했다. 고암 사후에도 재단을 설립하고 국내에 이응노의 예술 세계를 전파하는 데 열정을 쏟았다. 그럼에도 박인경은 항상 붓을 놓지 않았고 구순을 훌쩍 넘긴 지금까지도 붓을 들고 있다. 그렇게 평생에 걸쳐 어떤 방식으로든 예술가로서의 꿈을 지키는 ‘화가’ 박인경은 항상 그곳에 있었다.

박인경의 초기작은 당대의 시대상을 반영하는 사실주의적 경향을 띤다. 그는 미술학교에 재학할 당시부터 일본식 채색화풍을 답습하는 것을 경계했던 국내 화단의 분위기를 이해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949년 이화여자대학교 1회 졸업 전시를 평한 『경향신문』 기사에서 김순자, 박정자, 그리고 박인경은 “분방한 필치이면서 구도 착상의 신선함이 전체에 유통”하는 작품을 구사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2) 졸업작 <풍경>은 현전하지 않고 사진 자료 또한 찾아볼 수 없으나, 박인경의 회고에 따르면 얼음낚시가 한창인 한강의 풍광을 담아낸 작품임을 알 수 있다. 

같은 해 《국전》에 입선한 <채석장> 또한 근대 도시 건축 과정에서 다수 생겨난 채석장을 배경으로 한다. 입선 이후 이 루어진 언론 인터뷰에서 “기성 화단이 걸어온 길을 추종하지 않고 앞으로의 창작은 오직 현실과 생활을 기반으로 하는 생명의 회화여야 하며, 많은 대중이 알 수 있는 의욕의 회화여야 한다”라고 언급한 것은 주제의 차원에서 변화를 모색했던 화가의 의지를 반영한다. 3) 이는 김기창이 1946년 12월 5일 『경향신문』에 발표한 글 「미술운동과 대중문화문제」에서 피력한 바와 궤를 같이하는데, 고답적인 형식의 회화를 탈피하고 방향성을 모색하기 위한 나름의 해답으로써 박인경은 누구에게나 익숙한 현실과 생활을 기반으로 한 ‘생명의 풍경’을 채택한 것이다.

1957년 제작한 인물화 <광주리장수>와 <옹기장수>, <언니/누나>도 전형적인 미인도의 여성 대신 생계를 이어가는 소박한 모습의 여인들을 소환한다는 점에서 한국화의 새로운 조형 어법을 확립하려는 시류에 부응하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비슷한 시기 관전형 일본 인물화의 관습을 탈피하고 현실의 모습을 포착한 인물풍속화 작품을 제작함으로써 민족미술의 진로를 모색하고자 힘썼던 대표적 인물이 이응노였다. 고암과 가깝게 지냈던 김기창과 그의 아내 박래현도 각각 <보리타작>(1956)과 <노점 A>(1956)를 발표하며 농촌과 도시 여성들의 생활상을 작품에 담았다. 

그러나 이응노는 <도시풍경-양색시>(1946) 외에 노동의 주체로서 여성을 그린 경우가 많지 않았고, 운보와 우향은 여성의 노동을 그렸지만 입체파 양식의 실험으로 이를 심미적 관점에서 파악하려 한 경향이 짙었다. 반면 박인경의 여성들은 “씩씩한 생활의 주인공”으로서 그려졌다. 4) 투박하게 묘사된 여성 상인은 자기 몸집만큼 큰 광주리와 옹기를 주렁주렁 이고 생계에 뛰어들었고, 등 뒤에 업힌 아이의 덩치와 견주어 보았을 때 동생을 돌보기에는 한참 어린 <언니/누나>는 딱하게도 일 나간 어머니의 역할을 대신하고 있다. 이들은 모두 목가적 풍경으로 이상화되지 않은, 동란 이후 자립적으로 살아가야 했던 여성의 실질적 모습이었다. 이렇듯 박인경은 꾸밈을 더하거나 얹지 않고 있는 그대로 작품에 담아내 약동하는 생명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고자 했다.

한편, 형식적 측면에서는 전통적 수묵화의 필법을 계승하여 그 안에서 동시대성을 찾는 방식을 모색하고자 했다. 1958년 7월 4일 『조선일보』에 실린 《현대작가미술전》에 대한 평론을 살펴보면, 당시 비판 없이 추상의 형식만을 가져오는 세태 속에서 서구의 추상 개념과 동양화의 필법을 적절하게 절충하는 데 성공한 작가 중 하나로 박인경이 거론된다. 이때 출품한 <광주리장수>에는 뭉툭한 필선이 몇 개 모여 인체를 만들고 필요 이상의 세부 묘사는 모두 생략된 단조로운 화면이 돋보인다. 서구의 추상 형식을 그대로 빌려오는 대신 선과 여백만으로 대상을 표현하는 동양화의 기조를 지키는 것이 추상의 관념에 가장 적합하다고 평한 것인데, 실로 박인경은 외국 화파의 형식을 따르거나 매체의 다양성을 탐구하는 대신 오랫동안 동양화의 정신성을 고수하며 전통의 현대화를 꾀했다.

지필묵 본연의 소박한 맛을 내세우는 박인경의 화법은 도불 이후 파리의 동시대 화단과 교류하며 본격적 수묵추상화로 발전했다. 파리에 정착한 이후 이응노는 폴 파케티 화랑(Galerie Paul Facchetti)과 긴밀한 관계를 맺는다. 폴 파케티는 잭슨 폴록의 첫 유럽 전시를 성사한 인물로 미셸 타피에(Michel Tapié)와 함께 앵포르멜 화풍의 작가들과 협력해 왔다. 파케티 화랑을 거쳐 프랑스 미술계의 중심과 교류했던 박인경도 이 시기 동양화의 매체를 가지고 당대의 예술 연구에 참여했다. 

파리에 적응하던 초반, 작업에 매진할 수 없어 크게 실망한 박인경은 1964년 아들만 데리고 프랑스 남부 생테니미(Saint Enimie)의 수도원에 들어갔다. 이 시기 탄생한 <세브르의 달>(1964), <샘>(1964) 등은 붓의 개입 없이 한지 위로 부은 물감이 만들어내는 비정형적 자국으로 그려진다. 필선 대신 물감이 흘러간 자국과 색면이 부딪혀 만드는 율동감만으로 구성되는 화면은 동양화론의 중심을 이루는 골법용필(骨法用筆)의 중요성을 과감히 버리고 앵포르멜 화단의 조형적 실험에 박인경도 가담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면서도 60년대 초반 종이를 붙여 화면의 마티에르를 쌓는 콜라주 작업에 매진했던 이응노에 비해 자연이라는 주제는 물론 여백으로 화면을 구성하는 조형성을 고수하며 동양화의 기본 골조를 지켰다. 

1967년 동백림사건과 1977년 백건우, 윤정희 납치 미수 사건으로 고초를 겪었던 박인경은 1980년대에서 1990년대에는 다시 전통적 동양화를 다수 제작한다. 이 기간에 박인경은 동양미술학교 교수직에 전념했던 것으로 보인다. 1996년 가나화랑에서 열렸던 개인전의 출품작이 대다수 꽃과 정물 등을 제재로 한 전통 동양화풍의 회화로 꾸려진 점도 그 이유일 것이다. 부침을 겪고 마치 모든 걸 비워내 처음으로 돌아간 듯, 소담하고 정갈한 운필이 두드러지는 물고기 그림이나 군더더기를 빼고 대상을 대변할 수 있는 부분을 강조하여 은유적으로 본질을 드러내는 절지화가 주를 이뤘다. 딸기, 포도, 양파와 고추 등 가까운 데서 찾을 수 있는 일상의 소재들을 가져와 화폭에 담아내기도 했다.

그러던 그가 1980년대 중반부터는 돌연 박경리의 『토지』를 읽고 <풍경Ⅱ>(1996)와 같은 이른바 ‘글쓰기 회화’를 시작하며 지금의 수묵추상의 토대를 마련한다. 마치 고행의 일환으로 필사를 선택한 수도자처럼 당대를 증언하는 소설, 성경, 정치적 사건을 다룬 신문 기사의 한 구절을 1미터 남짓한 화폭에 빼곡히 채워 넣었다. 문자는 겹쳐지고 무너지면서 의미보다 그 조형성이 강조되었고 자음과 모음 사이 틈새는 여백을 창출해 종이에 깊이를 불어넣었다. 생트-에니미 시절 작품에서 붓질 대신 물감을 부었다면 ‘글쓰기 회화’에서는 다시 붓을 가져와 글씨로 선과 면을 메워 형태를 살렸다. 겹쳐진 문자들과 틈 사이로 마치 운무가 낀 능선이나 강가가 떠오르는 은유적 풍경화를 창조한 것이다.

2000년대에 이르자 굵은 필선과 수묵의 농담으로 깊이감, 여백미 등을 창출해 일체의 수식 없이 대상을 간결하게 표현하는 화풍으로 완숙한다. 오랜 기간 천착해 온 자연을 다시금 주제로 가져왔고 문자를 붓질로 대체했을 뿐 ‘글쓰기 회화’에서 터득한 흑백의 반전을 통한 조형 방식 또한 고수했다. 정방형의 화면에 먹점이 가득 찬 <비>(2009)는 암시만으로 대상의 특성을 관통하는 화가의 숙달된 능력을 보여준다. 흰 여백은 후경을 열어주고 검은 점들이 화면을 지배해 시선을 이끈다. 마치 바닥에 떨어진 빗방울을 집요하게 기록하듯 비가 지면과 닿는 찰나의 순간을 포착한 박인경은 응물상형(應物象形)의 원칙에 따라 비라는 현상 중 일부를 자신이 경험한 대로 선택하여 전달한다. 이는 화가의 몸을 거쳐 나온 비언어적 경험으로 대상의 기(氣)를 감각적으로 공유함으로써 실재를 조형적으로 규정하려는 시도라는 점에서 산수화의 속성을 잃지 않는다. 그렇게 박인경의 그림은 “추상화처럼 보이지만”, 궁극적으로 화가가 창 너머로 “보이는 풍경을 그린” 풍경화가 된다. 5) 

박인경은 이응노의 아내라는 역할에 가려진 것은 물론 일련의 정치적 사건으로 인해 오랫동안 국내에서 주목받지 못했다. 그러나 그의 행적을 살펴보면 동시대 화단의 흐름에 함께하며 누구보다 자신의 자리에서 박인경만의 화풍을 구축하고자 노력했음을 여실히 알 수 있다. 특히 1970년대 중반부터 국내 화단의 흐름과는 거리를 둔 채 동양화의 진로를 객관적으로 살피며 자신의 주변을 소담하게 담아내는 특유의 수묵추상화를 완성할 수 있었다.

그렇게 박인경은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좌절하지 않고 내면에서 차오르는 기쁨을 위해 줄곧 붓을 들며 자신의 예술 세계를 담담히 그리고 견고히 쌓아갔다. “그간도 혼자서 나를 위하여 그려왔기에” 박인경은 앞으로 그려나갈 무궁한 미지의 세계를 기대하며 “열심히 그릴 것이다. 죽을 때까지”



최하림(1992~), 이화여대 대학원 미술사학과 석사, 현재 에이라운지갤러리 어시스턴트 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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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울-파리-동경: 이응노, 박인경, 도미야다 다에코 대담」, 『고암 이응노 삶과 예술』, 얼과 알, p.416.

2) 이대미술학부 졸업작품전평」, 『경향신문』, 1949년 7월 4일

3) 『태양일보』, 1950년 1월 1일

4) 박인경과 박계리의 인터뷰, 2016년 5월 11일; 박계리, 「현실과 생활을 기반으로 하는 생명의 회화를 그리고자 합니다」, 『박인경: 추상이된 자연』(전시도록), 이응노미술관, 2016, p.125.

5) 박인경과 박계리의 인터뷰, 2016년 5월 13일; 박계리, 앞의 글, p.129.




박인경, <광우리 장수>, 1957, 한지에 수묵 담채, 137x70cm




박인경, <풍경 II Paysage II>, 1996, 한지에 수묵담채, 66x69




박인경, <비 La Pluie>, 2009, 한지에 수묵, 105x105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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