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


컬럼


  • 트위터
  • 인스타그램1604
  • 유튜브20240110

연재컬럼

인쇄 스크랩 URL 트위터 페이스북 목록

(92)선에 실린 실존적 고뇌의 자화상, 문은희의 수묵 누드화 | 박주연

현대미술포럼



선에 실린 실존적 고뇌의 자화상, 문은희의 수묵 누드화



소원(小園) 문은희(1931~)는 홍익대학교 미술학과 최초의 여성 졸업생이자 나체를 그리는 것이 금기시되었던 수묵화 장르에서 선구자격으로 누드화 작업을 전개한 인물이다. 문은희의 수묵 누드화는 여성 스스로 주체가 되어 작가 본연의 내면세계를 투영한 매개로 나부(裸婦)를 그렸다는 측면에서 여체를 관조의 대상으로 간주했던 남성중심주의적 관점의 누드화와 차별성을 지닌다. 한편으로 자아의 실존적 주체성에 대한 고뇌가 담긴 그의 작업은 많은 여성화가들이 그리했듯 여성의 몸을 자연과 등가적인 관계로 조망하면서 모체(母體)나 모성의 상징으로 시각화하는 방식과도 거리가 있다. 

미술학도를 꿈꾸던 문은희는 1948년 풍문여자고등학교 재학시절 서양화가 남관의 문하생이 되어 그의 작업실에서 데생을 배웠다. 그 후의 결혼 생활과 1955년 자녀를 출산하고 나서야 비로소 홍익대학교 서양화과에 입학하게 된다. 재학 도중 작업의 방향을 동양화로 선회하였으나, 그는 스승의 작품 모사를 중시하며 혹독한 수련을 요하는 전통적인 준법보다 본능이 이끄는 대로의 호방한 먹의 필치에 더욱 매료되었다. 그러면서도 수 차례 드로잉 습작을 선행하여 단순한 감흥과 직관에 의한 일필휘지가 아닌, 실재하는 대상에 대한 철저한 관찰력을 바탕으로 한 작업들을 이어갔다. 1959년 《제8회 미술 전람회》의 입선작 <뽀뿌라>(1959), 졸업작품 <당인리>(1959)와 같이 현대 사회의 실경을 묘사한 작품들은 사전 수행된 스케치 습작의 효과 뿐 아니라 서양화의 채색기법이 새롭게 가미된 양상 또한 보여준다.

재학 시절 두 아들을 양육하는 와중 남편이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홀로 가정생활을 꾸려가며 생활고를 겪게 되자 문은희는 10여 년이 넘는 긴 시간 동안 화업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막내딸을 출산 후 다시 화가로서의 행보를 재기하여 1970년부터 홍익대학교 출신 동양화가들의 모임인 ‘신수회’에 입회, 정기적으로 단체전에 참여하였고 1975년 서울 신세계 화랑에서 첫 번째 개인전을 개최함으로써 본격적인 등단을 알렸다.

1970년대 초반부터 누드화가 작업 궤도에 오르기 전 까지 선보여진 문은희의 수묵화는 일관성을 띄지 않고 매우 다채로운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1950년대부터 한국 화단에 성행했던 앵포르멜 계열과 유사성을 보이는 추상화 연작부터 요동치는 성난 파도를 그린 노도(怒濤) 연작, 적색과 황색 위주의 강렬한 채색 산수화, 문인화의 일종인 감 그림, 심지어는 도자 작업까지 매우 다양한 범주를 포괄했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그동안 억눌렀던 창작을 향한 의지와 감정을 폭발적으로 분출시키는 듯한 표현성이 거의 모든 작업들을 아울러 공통적으로 감지되는 특성을 보인다.

문은희는 1979년부터 서양화가 이규호의 화실에서 누드 크로키와 데생을 배우며 인체의 선과 수묵의 먹선이 아름다운 조화를 이룬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렇지만 한번 붓을 떼면 수정이 불가한 모필의 습성으로 인해 그는 다시 한번 긴 시간을 크로키와 스케치 습작으로 선의 필력을 연마해야 했다. 

나아가 같은 해 이혼을 기점으로 본격적으로 시작된 누드화는 문은희에게 해방감과 고독, 이 양가적 감정들의 융합의 도상으로 다가왔다. 자신만의 고유한 작업세계를 구축하기 위해 과감히 홀로서기를 감행함과 동시에 그동안 축적되었던 현실의 노고로 인한 심리적 고갈이 누드화를 만나 폭발적으로 분출된 것이다. 유려하고 섬세하면서도 강렬한 동세가 느껴지는 인체의 선 이면에는 이렇듯 역동하는 작가의 내면세계가 오롯이 응축되어 있으며, 이에 문은희는 자신의 작업을 일컬어 “육체와 영혼의 만남” 1) 이라 표현하기도 했다. 이는 또한 문은희의 누드화 속 여인들의 몸짓이 여체의 관능성에서 비롯된 에로티시즘보다 외려 처절한 몸부림에 가깝게 느껴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처럼 ‘누드’라는 자못 파격적인 주제를 택하여 자아 본연의 감정과 심리를 가감없이 화폭에 투사했던 문은희의 작업은 보수적 성향의 수묵화 장르에서 그만의 매우 독보적인 위치를 점하며 화단에 등장하였다. 그러나 수묵 누드화의 첫 선을 보인 1987년 서울 조선화랑에서의 제5회 개인전을 향한 미술계의 반응은 예상 외로 시큰둥했으며, 그의 작업에 먼저 지대한 관심을 보인 쪽은 흥미롭게도 일본의 화단이었다. 

평론가 우사미 쇼오고의 권유로 1987년과 그 이듬해까지 두 차례 일본의 4대 미술전 중 하나인《동경전(東京展)》에 출품된 문은희의 작업은 수묵 누드화의 효시라는 찬탄을 받으며 각종 매체의 주목을 받았다. 그 결과 1989년 도쿄의 롯폰기 스트라이프 하우스 미술관에서 개인전 《문은희 수묵화전 ‘나부백태(裸婦百態)’》가 개최되었으며, 본 전시를 통해 같은 해 서울의 바탕골 미술관이 주관했던 《누드 헤프닝》에서 선보여진 장장 34m에 달하는 누드 대작이 소개되어 일본 화단의 초미의 관심사로 부상했다. 나아가 아사히 방송국의 아트 프로그램에 단독출연으로 보도되는가 하면, 1990년에는 일본 브리태니카 국제 연감 미술 부문에 세계 작가 5인 중 한 명으로 선정되는 영예를 안기도 했다. 국제 무대에서의 문은희의 행보는 프랑스로도 이어져 1992년 파리의 한국문화원에서 개인전을 여는 성과를 내기에 이르렀다. 

일본과 프랑스의 화단은 무엇보다 문은희의 수묵 누드화가 지닌 조형적 측면에서의 독자성에 주목했다. 순간의 몰입과 단번의 필력으로 나부 군상을 그려낸 그의 작업은 각각의 인체들이 모필의 자적 안에서 유기적 흐름으로 연결돼 하나의 매스(mass)로 인지된다는 측면에서 “융합되는 서양의 형태와 동양의 선묘”2)  “서구적인 형태분석 시각 위에 동양의 서예에서 찾아볼 수 있는 모든 기술의 도입” 3) 이라는 호평을 이끌었다. 즉, 가장 기본적인 조형요소인 선의 필력만으로 대상에 생동감을 부여하고 구성의 전체적인 통일성을 완성한 표현의 기교를 높이 샀던 것이다. 허나 이처럼 국제 무대에서의 쏟아지는 찬사에도 불구하고 그를 향한 한국 화단의 시선은 여전히 냉담하기만 했다. 

파리에서의 개인전을 마치고 귀국하여 휴식기를 갖던 중, 문은희는 불교철학자 김구산과의 만남으로 불교의 ‘연기론(緣起論)’을 깊이 접하게 되며 그의 영향을 받아 1994년 충청북도 충주로 거처를 이전하였다. 그 해는 문은희가 남편과 재결합하여 여생을 함께 충주에서 보내기로 결심한 해 이기도 하다. 그러나 머지않아 불의의 교통사고로 남편이 세상을 떠나며 문은희는 3년여의 시간 동안 다시금 붓을 내려놓고 인고의 시간을 감내하나, 충주의 아름다운 자연이 주는 위로와 가족의 보살핌 그리고 종교에 힘입어 재차 일어나 화판 앞에 선다. 

불교의 중심사상인 연기론은 이 세상에는 영원한 것 도, 절대적인 실체도 없으며 모든 존재가 상호 의존적인 관계 속에서만 의미를 지닌다는 이치의 교리이다. 이와 같은 가르침은 그동안 문은희가 그토록 집착했던 실존적 주체성을 향한 번뇌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며, 누드화 작업 역시 이러한 불교적 교리에 감화되는 방향으로 확연한 변화를 보이기 시작했다. 

문은희는 그동안 고수해왔던 한 획의 흐름으로 완성되는 크로키 방식의 누드화 작업을 중단하였다. 대신 긴 시간을 들여 화폭 전체를 빈틈없이 메우는 올 오버(all-over) 구도의 콜라주 연작을 새로이 선보였다. 콜라주 작업은 기존에 그려진 누드화 위에 또 다른 인체 그림들을 잘라서 덧붙여가는 방식으로 제작되었는데, 겹겹이 뒤엉킨 나부의 집적은 마치 생을 지닌 모든 존재들의 상생과 순환에 대해 논하는 윤회사상을 형상화 한 듯 보인다. 또한 작품으로 채택되지 못한 습작들을 버리지 않고 다시 모아 새로운 작업으로 재탄생시킨 콜라주의 제작 방식과 <무제>, <회귀_넋>, <인연>과 같은 작품의 제목 또한 이와 같은 불교적 명상의 영향력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충주로 화실을 이전한 후부터 시작된 지공예 작업 역시 이의 연장선에 있다. 문은희는 누드화를 그리면서 버려진 수 많은 파지들을 물에 짓이겨 풀을 먹인 후 불상을 만들거나 고뇌 앞에서 번민하는 인간의 형상을 빚기도 했다. 무엇보다 1960년 4·19민주혁명 당시 항거하던 학생들이 경찰에 진압되어 피를 흘리며 후송되는 장면을 목도했던 순간이 뇌리를 떠나지 않아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마음으로 촛불을 켜기 위해 제작된 지공예 작업은 불교적 명상이 단순히 개인의 내면적인 차원에만 머무르지 않고 사회를 바라보는 시선으로 까지 확장되었음을 보여주는 예이다. 

이렇듯 간결한 필선으로 나부를 그려낸 수묵화부터 불교철학의 영향이 짙게 배인 콜라주와 지공예에 이르기까지, 문은희의 모든 작업들은 가정생활을 영위하며 동시에 창작을 향한 욕구와 의지를 실현하고자 분투했던 그의 삶 자체를 대변하는 자화상에 다름 아니다. 

본 원고를 작성하기 위해 문은희 작가에 대한 연구를 거듭하며 과연 그만큼 ‘여성화가’로서의 삶과 예술이 현실적으로 동일시된 사례를 찾아볼 수 있을까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문은희의 작업이 지닌 여성주의적 미술의 의의는 ‘여성적 기법’ 혹은 ‘주류와의 다름’ ‘주변부적 포용성’ ‘자연과의 연계성’과 같은 수식만으로 형용할 수 없는, 날 것 그대로의 ‘여성의 삶 위에 놓여진 예술가의 길’ 그 자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누구도 시도하지 못했던 수묵 누드화라는 장르의 독보적 경지를 개척한 그의 족적이 결코 간과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한편으로는 역사에 길이 남을 이른바 ‘주류’ 미술가가 되기 위해서는 작품의 높은 판매고가 전제조건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되어 씁쓸한 생각이 든다. 나체를 그리는 것이 터부시되었던 수묵화 장르에서 누드를 주력하여 선보인 문은희의 패기가 그 시도 자체는 높이 평가되었을지 몰라도, 화단의 지속적인 관심을 이끌어내지 못한 이유는 결국 작품의 시장성 부족에 그 원인이 있기 때문이다. 

허나 작품이 많이 팔리지 못했다고 해서, 혹은 그 이름이 보다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문은희의 작업 안에 깃든 순수한 예술혼이 결코 퇴색되거나 사그라들지는 않을 것이다. “화가가 되기 위해서도 누군가에게 재능을 보이기 위해서도 아닌, 삶 이자 생명인 그림을 그려야 사는 사람” 4) 으로 자신을 지칭한 문은희의 말이 이를 뒷받침한다.

끝으로 개인적인 이야기를 조금 덧붙여 마무리를 해보고자 한다. 임신과 출산, 육아라는 통과 의례를 겪으며 자연스레 소위 말하는 경단녀(경력 단절 여성)가 되어버린, 늘 나를 둘러싼 상황에 의해 어쩔 수 없이 날개가 꺾여버렸다고 생각했던 그런 나의 모습을 문은희 화백의 그림 앞에 대비해 보았다. 내가 처한 현실의 한계를 하릴없이 헤아리는 그런 고민이 아닌, 앞으로 무엇을 어떻게 해 나가야 할 것인가에 대한 진정한 고찰과 끊임없는 정진. 예술가로서, 여성으로서, 인간으로서 문은희가 우리에게 주는 귀감이 바로 여기에 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박주연(1985~), 이화여대 대학원 미술사학과 석사, 전 재단법인 아름지기 문화기획팀 



ㅡㅡㅡㅡㅡ
1) 문은희, 「나의 인생 나의 예술」, 『언론과 비평』, 1992년 2월호.
2) 와시오 도시히코, 「융합(融合)되는 서양의 형태(形態)와 동양의 선묘(線描)」, 『삼채(三彩)』, 1989년 6월호. 
3) 장 뤽 샬뤼모, 「아라베스크의 박진성(迫進性) - 소원 문은희의 누드화」, 『OPUS』, 1992.
4)  문은희, 「나의 인생 나의 예술」, 『언론과 비평』, 1992년 2월호.




문은희, <무제(無題) >, 1987, 한지에 먹, 140x70cm




문은희, <무제(無題) >, 1988, 한지에 먹, 70x140cm




문은희, <무제(無題) >, 1999, 한지에 먹, 91x 91cm




문은희, <회귀_넋>, 2000, 한지에 먹, 180x180cm






하단 정보

FAMILY SITE

03015 서울 종로구 홍지문1길 4 (홍지동44) 김달진미술연구소 T +82.2.730.6214 F +82.2.730.9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