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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생명의 울림, 김윤신의 추상조각 | 이슬비

현대미술포럼



생명의 울림, 김윤신의 추상조각 



2022년 성북동에 위치한 갤러리 반디트라소에서 원로 조각가 김윤신(1935~)의 개인전이 열렸다. 전시장 한 벽면에서 재생되는 자료 영상에는 팔순이 훌쩍 넘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전기톱으로 나무를 자르며 작업에 열중하는 작가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엄청난 노동을 혼자서 감행하는 모습을 보며 경외심마저 들었다. 그는 전시를 위해 한국에서 짧게 거주하는 동안에도 작업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고 했다. 무엇이 그를 끊임없이 작업하게 만드는 것일까. 

김윤신은 1955년 홍익대 조각과를 입학해 4학년 재학 중인 1958년 《제7회 대한민국전람회》에서 <아침>으로 특선을 받았다. 인체를 길게 변형한 시멘트 재질의 작품은 당시 섬세한 표현과 운동감으로 호평을 받았다.1)  대학교 3학년 때 미국에서 유학하고 홍대에 막 부임한 김정숙 교수로부터 용접 기술을 배운 바 있는 그는 1963년 부산 공보원에서 열린 첫 개인전에서 철제 용접 조각을 선보였다. 전쟁 직후라 조각 재료를 살 경제적인 여유가 없어 친구의 도움으로 전쟁 때 파괴된 쇳조각을 구할 수 있었다. 당시 철제 조각은 동양의 고대 신화에서 해를 상징하는 삼족오를 형상화한 것으로 추상적이며 구축적인 형태를 띠었다.  

1963년 파리 국립미술학교에 조각과에 입학한 그는 한국의 박, 유리그릇, 계란 판지 등을 조각내거나 해체하고 풀물에 풀어낸 약솜이나 석고를 활용해 재조합하는 부조 작업을 주로 선보였다. 하지만 조각 전공 교수가 작고하면서 석판화로 전공을 바꿔 1967년에 제작한 판화 작품 <예감>이 최우수 학생작에 선정됐다. 이 작품은 사방으로 뻗어나가는 선의 표현에서 이후 조각과 회화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선적인 요소의 원형을 엿볼 수 있다. 

한국에 귀국한 김윤신은 1969년 두 번째 개인전으로 《대리석판화전》을 개최해 이색 전시로 주목을 받았다. 1950년대 후반부터 판화는 한국에서 새로운 표현의 도구로 인정받기 시작했지만 당시 판화과가 없었고 특히 석판화는 국내에서 기법을 배울 수가 없었다. 1970년에는 추상화가 윤지현, 오민자와 함께 개최한 《여류신작전》에서 국내는 물론 외국에서도 그 예를 찾기 어려운 캔버스에 찍은 판화를 선보여 화제가 되기도 했다.2)  1973년 《제12회 상파울루 비엔날레》 조각 부문에 출품한 작품은 여러 개의 직육면체 나무상자를 쌓아 올린 구조물 <평화를 사랑하는 자유인들의 영원한 수호신>으로 상자는 기하학적 형태와 상형문자 등을 판화 기법으로 찍은 한지로 표면을 감싼 것이 특징적이었다. 

1970년대 중반 이후부터 그는 조각에 집중하면서 조각가의 정체성을 확립했다. 포플러, 향나무, 호두나무, 미송 등 다양한 나무를 두루 사용하며 목조각에 집중했다. 당시 대표작인 <積, 기원쌓기>는 사람들이 산길을 오가며 쌓아 올린 돌탑처럼 여러 개의 목재를 조각해 쌓아 올려 조합방식에 따라 끊임없이 변형이 가능했다. 이후 그는 하나의 목재를 깎아서 형태가 만들거나 두 개의 조각을 한국의 전통적인 결구 방식으로 조합해 물질의 근원과 다양한 관계성을 드러냈다. 1978년부터 그의 조각은 현재까지 대부분 ‘합이합일 분이분일(合二合一 分二分一)’이라는 동일한 제목으로 계속된다. 둘을 보태어도 하나가 되고, 둘을 나누어도 하나가 된다는 철학적 개념과 일치된 형식을 추구한 것이다.  

김윤신은 1970년대에 특정한 이념이나 학연에서 벗어나 열린 네트워크를 지향하는 조각가 단체들의 창립을 주도하기도 했다. 귀국 후 국내 여성 조각가들의 작업을 활성화하기 위해 1973년 ‘한국여류조각회’ 발족에 앞장서 1974년 창립전을 열었으며, 같은 해 김광우, 정관모 등과 ‘한국미술청년작가회’를 출범시켜 조각계에 새로운 활력을 불러일으켰다. 

조각가로 왕성한 작업을 선보이고 1980년부터 상명여대 교수로 재직하며 화단에서 입지를 굳힌 그는 1984년 돌연 아르헨티나로 이민을 떠나 미술계에 충격을 선사했다. 1983년 12월 조카가 사는 아르헨티나를 방문해 한 달 간 여행을 다닌 것이 그의 인생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푸른 하늘과 광활한 대지가 맞닿아 끝도 없이 펼쳐지는 푸른 초원과 한국에서는 보기 힘든 다양한 종류의 나무와 돌 등 광활한 자연과 조각적 재료의 풍부함, 순박한 사람들이 그를 매료시킨 것이다.  

물론 이 같은 매혹이 어떻게 삶의 터전을 떠나 이국의 땅에서 새롭게 뿌리내리는 도전으로 이어질 수 있는지 쉽게 납득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는 분단과 전쟁으로 인한 극단적인 이데올로기의 대립, 권위적인 독재 군부, 당시 미술계의 이분법적 파벌 구도, 보수적인 교수 집단 등 한국 사회의 구속과 압박에 지친 상태였다. 게다가 풍부한 재료를 바탕으로 순수한 자연과 교감하며 오로지 작업에 집중할 수 있는 남미의 일상이 지상 낙원처럼 느껴졌다. 결정적으로 1985년 부에노스아이레스 시립현대미술관 초대전으로 국립 식물원 옥외 공간에서 개최한 개인전이 현지의 높은 관심을 받으면서 귀국을 포기하고 아르헨티나에 정착을 결심하게 되었다.  

하지만 작업에 대한 열정과 이국의 땅에서 삶을 안정적으로 영위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였다. 그는 지난한 삶의 여정을 인내하면서 작업에 매진할 수 있는 환경과 조건을 개척했다. 1987년에는 아르헨티나 국적을 획득했고 남미 지역의 주요 미술관과 갤러리에서 개인전을 열었으며, 2008년에는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자신의 이름을 내건 김윤신미술관을 설립했고, 주아르헨티나 한국문화원에 작품을 기증해 그의 작품을 상설 전시하는 공간이 따로 마련되는 등 중남미에서 활동하는 한국 작가로서 입지를 다졌다.   

아르헨티나 정착 초기에는 동네 사람들이 가져다준 쓰러진 가로수 등을 작업 재료로 사용하기도 했지만 오랜 재료 연구 끝에 알가로보(Algarrobo)와 빨로산또(Palosanto) 등의 남미 목재를 주로 사용한다. 이 재료들은 석재에 가까운 특유의 단단함 때문에 전기톱을 사용해야만 자를 수 있다. 그는 작품의 이미지를 따로 구상하지 않고 작업하는 순간, 재료와 교감하며 자신의 감각과 몸의 느낌을 따라간다. 그의 작업은 힘으로 재료를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조각적 몸짓을 통해 나무의 생명력과 상호작용하는 순간을 담아낸 흔적과도 같다. 물질과 교감하며 오랜 시간 동안 축적해온 통찰과 경험을 통해 궁극적으로 도달할 수 있는 작가만의 경지이다. 한 인터뷰에서 그가 말한 바 있듯이 그에게 작업은 새롭게 창조된 공간에 기둥을 쌓으며 절대자를 향해 기원하는 구도의 과정이다.3)   

그가 특히 목조각을 선호한 것은 나무 자체가 가진 생명력 때문이다. 그는 죽은 나무에 새로운 생명을 주입하는 것이 아니라 나무의 생명력을 더욱 돋보이게 만든다. 나무의 껍질 일부를 그대로 활용하거나 남미 목재의 밝은 외피를 남겨 투박하면서도 나무 본연의 자연스러운 느낌을 최대한 살리는 데 집중한다. 나무에는 특유의 다양한 결이 있고, 이것은 생의 약동을 의미하며 수많은 변화와 파동의 순간을 응축한다. 그는 나무의 속살을 펼쳐내 무수한 시간의 궤적을 보여주고, 물질과 인간 사이의 공간에서 마법적이고 물리적인 관계를 탐구한다. 

그는 주로 목조각을 제작하지만 1989년 멕시코에서 열린 개인전에서 멕시코산 석재 오닉스(Onix) 작품을 선보인 이후 청색 소달라이트(Sodalite Azul), 녹색 석영(Cuarzo Verde) 등 브라질산 준보석에 해당하는 석재로 작업하기도 했다. 이 같은 돌은 화려한 색조와 독특한 결 조직을 가지고 있어 예리하게 재단되어 나타나는 재료 본연의 상태와 작가가 인위적으로 가공한 흔적이 자연스럽게 조화를 이루며 목재로 표현할 수 없는 신비로운 분위기를 연출한다.   

김윤신의 조각은 구체적인 형상을 띄지 않는 추상 조각인데 수많은 방향과 움직임으로 가득 차 있다. 그의 작업은 특정한 사조나 개념, 전통, 문화적 전망으로는 해석할 수 없다. 한국과 유럽, 남아메리카 등을 가로지르며 낯선 땅에서 새로운 재료로 자신만의 독특한 조형언어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의 작업은 대체로 수직적인 구조가 많지만, 또 횡적으로 펼쳐지며 생명의 다양한 관계성을 드러낸다. 2000년대 들어서 작품에 일부 채색이 더해져 원시적이고 이국적인 느낌이 더욱 두드러지기도 했다. 

그는 회화도 꾸준히 병행하는데 조각 작업이 약동하는 생명의 리듬을 함축적으로 담아낸 것이라면, 평면 작업은 화려한 색채와 빛의 파동과 같은 움직임을 더욱 극적으로 표현해 자유분방한 화면을 일구어낸다. 최근 전시의 제목은 ‘지금 이 순간’이었다. 생명은 삶의 찰나가 모여 영원한 빛을 발한다. 그의 작업 철학처럼 합침과 나눔의 원리는 본질적으로 하나를 의미한다. 



이슬비(1982~), 이화여대 대학원 미술사학과 석사,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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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조각 특선 아침 김윤신작」, 『조선일보』, 1958.10.09. 4면

2) 「캔버스에 판화 《여류신작전》 마련한 화가 김윤신 씨」, 『조선일보』, 1970.12.01. 5면

3) [인터뷰] ‘1세대 조각가’ 김윤신, “김윤신 KIM YUN SHIN 展, 폴란드와 한국 간 문화 교류 확대의 교두보가 되길” 




김윤신, <생명의 근원 – 희열>, 1977, 호두나무




김윤신, <合二合一 分二分一 No.509>, 1994, 알가로보, 100×100×30cm 




김윤신, <分二分一 No.316>, 1990, 오닉스, 32.5×19×25.5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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