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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 심현희의 그냥, 그림 | 조현아

현대미술포럼



심현희의 그냥, 그림 



1990년대 심현희(1958~)의 ‘그림’이 선취한 것은, 그가 활발히 활동했던 시기 유행했던 민중미술이나 그의 스승들이 강조했던 수묵화의 계파 중 어디에도 속하지 않고 독자적인 노선으로 향했다는 점이다. 심현희가 기성 동양화 화단의 문법에서 벗어나 작업 세계를 구축했던 시기는 1988년 서울올림픽을 계기로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개최된 《한국현대미술전》이 ‘서양화가’들의 작품을 대표적인 ‘한국 현대미술’로 소개하며 동양화가들에게 공분을 샀던 시점과도 겹친다. 그로 인한 반동으로 한국성과 한국화에 대한 개념과 용어가 굳어져갔고, 1980년대 후반에서 1990년대 발표된 심현희의 작품은 한국화나 민중미술의 범주로 분류되어왔다. 그러나 작가는 언제나 흔들림 없이 장르의 구분이나 작품이 덧입는 수사적인 어휘들을 개의치 않아 했다. 

대구에서 태어나 1980년 서울대 회화과를 졸업하고 1982년 동 대학원에서 동양화 전공으로 석사학위를 받은 심현희는, 졸업 후 8년만인 1990년 4월 금호미술관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다. 물론 그 사이 작가는 결혼과 출산과 육아를 병행하며 《이원전》(1983~89), 《누드 크로키전》(1986), 《사람들-방배동에서》(1987), 《인상전》(1988), 《한국화-의식의 전환전》(1988) 등의 기획전에도 꾸준히 참여해왔다. 그중에서도 작가가 늦게나마 첫 개인전을 추동할 수 있는 동력을 만들어준 전시는 1989년 금호미술관에서 열린 《80년대의 여성미술전》이었다. 1부 서양화, 2부 한국화, 3부 조각으로 나뉘어 진행된 해당 전시에 심현희는 <내일(來日)>(1989)을 출품했다. 이는 177x141cm 규모의 천에 선거철에 무료로 제공되는 국수를 먹는 노인들의 모습을 수묵채색으로 그려낸 작품으로, 동양화 재료를 사용해 인물의 얼굴을 화면 전면에 그려내는 경우가 희소했던 시기 발표되어 이목을 끌었다. 해당 작품은 심현희의 첫 개인전에도 출품되었는데, 당시 심현희의 작업 규모와 그가 중점적으로 그려냈던 대상 및 주제의식을 살필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한다. 

첫 번째 《심현희展》에 출품된 작품에는 노인들의 얼굴과 그 배경에 식물 및 전통적인 문양이 담겨 있다. 전시 도록에는 1989년부터 1990년 제작된 작품들이 제목 없이 실렸지만 다수의 작품에 먹과 담채 및 농채가 혼용되었으며, 그 규모가 약 200~300호 정도의 대작이었다는 점이 기록되어 있다. 이로 미루어보아 당시 작가는 먹의 사용을 고수하면서도 그 규모만은 정형에서 탈피해 대상을 거대하게 나타내고자 했음을 알 수 있다. 큰 화폭을 채운 얼굴들은 그 인상이 ‘하나의 선으로’ 정밀하게 묘사된 것이 아니라 여러 겹의 선과 붓질로 이루어져 시시각각 변하는 얼굴 표정이 한 화면에 담긴 듯한 인상을 준다. 

그의 그림이 민중미술 계열로 평가되었을 때, 심현희는 자신의 주변 인물들에 ‘민중’이라는 근엄한 의미를 붙이는 일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고 솔직하게 반응했다. 여기에는 그의 작품이 민중미술로 논의되기에는 지극히 개인적인 주제로부터 출발하며, 그것보다는 아카데믹한 기반을 단단히 갖추었다는 이유도 작용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실제로 작가의 작품에는 인물 데셍과 수묵화를 강조했던 서울대 미대의 교과 과정이 미친 영향이 남아 있다. 심현희는 선묘와 수묵, 인물 중심의 교육을 성실히 이수한 자로서 ‘인물’이라는 주요한 주제이자 소재를 작품세계의 핵심으로 남겼다. 이는 대학원 졸업 시기인 1982년 심현희의 제5회 중앙미술대전 장려상 입상 작품이 인물군상이었다는 점에서도 드러난다. 그러나 그는 종래에는 인물화의 ‘틀’, 즉 전형적인 초상화의 구도와 비례를 맞추어 전신상을 그려야 한다는 압박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이에 더해 작가는 ‘색은 바르는 것, 선은 긋는 것’이라는 개념을 관철시켰던 스승들이 재료나 기법에 이념을 과잉 투사했다고 비판하며, 채색을 배제하고 수묵화를 강조하는 경향에서 과감히 이탈했다. 첫 개인전 이후, 심현희는 장지에 농채를 적극적으로 더했다. 1991년 송원화랑에서 열렸던 두 번째 개인전에 출품된 작품들은 ‘장지에 채색’으로 완성되었는데, 이 때 장지에 채색을 두껍게 덧바르는 행위는 수묵화의 전통에 반하는 형식 및 재료 실험이기도 했다. 심현희는 동양화 재료로 짙게 채색을 올렸을 때, 물감과 종이가 서로를 당기는 방향이 달라 물감이 덩어리째 떨어지는 상황을 인지하고, 이후에 더욱 진한 채색을 하고자 종이가 아닌 캔버스를, 스며드는 동양화 물감에서 아크릴 물감으로 재료를 바꾸었다. 이렇게 작가는 종이의 귀퉁이를 찢어낸 듯 전형에서 벗어난 화면에, 선과 색 모두를 ‘그리는’ 도구로서 사용하며, “벽 하나씩”을 넘어섰다. 

이에 더해, 심현희는 ‘한국화가’로 분류되어 왔다. 대표적인 예는 그가 참여한 기획전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한국화의 오늘과 내일 ‘91》(1991), 《’91 서울, 현대한국화전》(1991)에서 작가는 모두 한국화의 범주로 묶여 소개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현재 심현희의 작품도 아르코예술기록원의 한국예술디지털아카이브(DA-Arts)에서 별다른 설명 없이 ‘한국화’로 명시되어 있다.1)  작가는 1988년경 ‘한국화’라는 용어가 미술계에서 굳어지던 시절을 몸소 체험한 이로서, ‘무엇’에 반하는 개념으로서의 ‘한국화’는 사라져야 하며, 또 한국 작가들이 서양에서 유입된 재료와 기법을 사용해 제작한 작품에도 한국인의 정체성이 드러나므로 한국화는 서양화와 동양화 모두를 포괄한 그림으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서울대 강사생활 5년간 그는, 작가는 한국화뿐만 아니라 동양화와 서양화를 나누는 교과 과정이나 명칭도 없어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에 따르면 이는 재료를 구분한 것으로 “별 게 아니며,” 신진들의 “그리고자 싶은 충동”을 소거하는 구속으로 작용할 뿐이다. 

심현희의 작품은 장르적인 구분보다도, ‘인물, 꽃, 민화, 생활’이라는 네 가지 요소를 중심으로 살펴볼 때 개별 그림의 생김과 의미를 더 정확히 파악할 수 있다. 심현희의 그림에서 인물은 그가 살아온 궤적과 희로애락을 응축하고 있는 노인의 모습으로 다수 등장한다. 수묵에서 채색으로, 그 후 농채에서 아크릴화로 변모한 작품의 흐름에도 노인들의 모습은 꾸준한 탐구의 대상이 되었다. 동시에 작가는 관용적인 속뜻이 두드러지는 꽃을 인물의 얼굴과 함께 담아 작품이 다층적인 함의를 지닐 수 있게 했다. 1992년 이전에는 얼굴이 작품의 중심이 되고 꽃은 부차적 요소로 자리했으나, 이후 심현희의 그림에는 두 요소가 거의 비등한 비중으로 표현되었다. 

특히 ‘대통령 연작’이라 불리는 일련의 시리즈는 그 변화를 명확히 드러내고 있다. 1994년 서경갤러리에서의 개인전에 출품된 <박정희 대통령과 무궁화>(1994), <전대통령과 진달래>(1994) 등은 얼굴과 꽃의 의미가 엮이면서 인물에 대한 사회문화적인 시각과 작가의 시선을 담아낸다. 두 작품에서 박정희는 군인을 대변하는 무궁화를 배경으로 미소 짓고, 전두환은 피를 상징하는 진달래를 배경으로 나타난다. 하지만 이들의 동세와 표정, 꽃은 관람자에게 역사적·문화적 흐름을 포함한 명확한 의미를 제시하거나 강요하지 않는다. 이렇게 꽃과 인물을 거대하게 그려내는 방식은 대상에 대한 호오(好惡)의 감정을 일으키기 이전에 인물과 도상이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먼저 읽어내게 만든다는 점에서, 해당 인물에 대한 단순한 비판을 넘어선다. 더불어 거대한 작가의 인물상 옆에는 탈이나 화투에서 볼 수 있는 형상, 민화에서 건져올린 모티브들이 다수 묘사되어있다. 심현희는 이렇게 민화의 조형성과 색감이 지닌 힘을 화면에 끌어들이면서도 ‘소박한 일상의 그림’에 과도하게 거대한 의미와 역사성을 투영하는 경우를 지적해내는 작가였다. 

노인의 얼굴과 식물, 민화의 도상을 모두 포함한 작가의 작품으로는 270x180cm의 수묵 채색화 <부부상(Ⅰ)>(1990)을 꼽을 수 있다. 해당 작품은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개최한 《젊은모색 ‘90-한국화의 새로운 방향》에 출품한 것으로, 노부부의 반신상과 함께 도교의 영향이 가미된 문양, 당시 중산층 가정에서 볼 수 있었던 장식과 물품을 적재한 생활공간의 모습을 모두 내포한다. 1990년 갤러리아미술관 개관기념전 《오늘의 얼굴》 2부에서, 회화 부문에 출품한 작품 <회상>에도 노인과 꽃, 화투 속 오동의 봉황 머리가 노인들의 얼굴과 함께 그려져 있다. 당시 작가는 작가노트에 다음과 같이 썼다. “우리의 정서가 담긴 우리의 그림을 그릴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2)
  
덧붙여 심현희 작업의 큰 특징 중 하나는 작품의 제목이 직관적이고 간결하다는 점이다. <머리 묶은 애>(1999)에는 말 그대로 머리를 묶은 여성의 옆모습이 등장하고, <꽃을 보다>(1999)에는 꽃을 보고 있는 인물과 꽃이 ‘있다.’ 종이에 아크릴릭으로 채색한 <가족도>(1994)에도 작가의 친정 부모와 두 아들, 화분, 개 한 마리가 묘사되어 있다. 인물들이 위치한 구도는 가족사진의 전형과 유사하지만, 크기가 다른 종이에 그려진 나무와 구석에 자리한 개는 딱딱한 가족관계에서도 일상적인 친밀함을 발견하게 한다. 

작가는 이렇게 그림과 제목을 일치시킨 이유는, 그가 전달하고 싶은 것이 “바로 그것이기 때문”이라고 술회했다. 그래서 심현희는 추상화에 ‘선’ ‘공명’ ‘무제’ ‘원형’ ‘공(空)’ 등 사변적인 제목을 붙이며 이념에 집착하는 작업 일체에 비판적 시각을 견지해왔다. 그는 바쁘고 절실한 일상에서 정신적인 유희나 거창하고 권위적인 표피를 쓴 작품은, 그리는 사람과 감상자에게 솔직한 울림을 주지 않는다며, 차라리 설거지할 그릇이나 곧 먹을 배추 하나처럼 일상에서 짧게나마 주목한 대상을 그린 작품이 더 현실적인 공감을 준다고 언급했다. 그는 근엄한 작가의 모습이 아니라, 생활 속에서 스스로를 반성하며 번드르르한 껍데기를 훌훌 벗어버리고 나름의 고민과 일상에서 우러나온 정서를 직관적으로 그리는 화가로서의 길을 선택한 것이다. 

인물화와 주제, 그리고 그것의 규모나 재료로 한 작가의 작품을 어느 갈래에 끼워넣어 평하는 것은 부족한 비평의 선택지를 노출하는 것과도 다름이 없다. 심현희는 ‘이것 아니면 저것’으로 젊은 작가의 작품 경향을 분류했던 주류의 편협한 관점에 편승하지 않았다. 이러한 그의 노력을 일상적이고 친밀한 대상 그리기에만 천착해온 수세적인 여성 작가의 그림 정도로 폄하하는 것은 크게 그릇된다. 그의 작업은 기성 화단과, 글로벌한 동시대 미술 개념이 국내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던 시절의 유행을 따르던 미술계와 거리를 두려 부단히 애썼던 실천의 산물로 재고되어야 할 것이다.



조현아(1993~), 홍익대 대학원 예술학과 석사, 현 월간미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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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국예술디지털아카이브(DA-Arts) 미술작가 500인 中 심현희 블로그 www.art500.or.kr/blog/shimhyunhee.do

2)   심현희, 「작가노트」, 『젊은 모색 ‘90-한국화의 새로운 방향』 도록, 1990, 국립현대미술관




심현희, <내일(來日)>, 1989, 천에 수묵채색, 177x141cm  




심현희, <박정희 대통령과 무궁화>, 1994, 장지에 채색, 260x190cm




심현희, <가족도>, 1994, 장지에 채색, 263x193cm, 서울시립미술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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