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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양광자의 붓질, 그 끝에는 | 김태이

현대미술포럼



양광자의 붓질, 그 끝에는




1960년 당시, 광주 수피아 여고에 재학 중이던 양광자(1943~)는 같은 반 외국인 동급생 ‘메리’를 보고 처음 유학을 꿈꾸게 되었다고 한다.1) 정확히는 메리의 양말을 보고 꿈꾸게 되었다고 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검정색 세일러복 만이 허용되던 엄격한 교칙 틈새로 유일하게 빨강, 노랑 양말을 뒤섞어 착용한 외국인 친구의 모습은 어린 그로 하여금 막연한 이국의 자유를 향한 동경을 키우게 하기 충분했다. 


이듬해 4·19 혁명의 여파와 박정희 정권의 출범으로 어수선한 사회 분위기 속에서 양광자는 광주 전남대학교 간호학과에 입학하게 된다. 이러한 선택은 간호사에 대한 직업적 선호도가 아닌 지극히 현실적인 이유로부터 기인한 것이었다. 1961년에 체결된 파독 근로자 채용 협정은 어린 시절부터 예술가가 되고 싶었던 그에게 해외에 나갈 발판을 마련해 줄 수 있는 가장 빠른 수단이었다. 1966년 24세의 양광자는, 파독 간호사로서 3년 간 일하는 조건으로 베를린에 첫 발을 내딛었는데, 이는 그가 훗날 독일과 스위스를 중심으로 50여 년 넘게 예술가로 살았던 긴 여정을 알리는 시작이었다. 


1960년대 독일에서의 유학 경험과 스위스 취리히예술종합대학 최초의 동양인 교수라는 당시 여성으로서 보기 드문 이력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국내 연구는 물론 소개 자료 역시 극히 드문 실정이다. 이는 비슷한 시기 여타 구미 지역에서 활동한 중견 남성 작가들에 대한 연구가 시기별로 세분화되어 진행되어 온 것과는 다소 상반되는 지점이기도 하다. 따라서 본고는 동양화의 방법론을 기반으로 유럽에서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견고히 지탱해 온 그의 삶과 작업의 일부를 소개하는 것에 의의를 두고자 한다. 


양광자는 1968년, 아직 1년이 남은 근로 계약을 끝내는 조건으로 지원받은 보조금을 모두 한국 정부에 반납했다. 이 시기 그는 베를린 예술종합대학 회화과의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본격적인 예술가의 길을 걷게 된다. 야심 찬 포부와 함께 건너온 독일이었지만, 나고 자란 고향 땅이 그립지 않을 리가 만무했고, 이제 막 작가로 걸음을 뗀 그가 가장 잘 표현 할 수 있는 것 또한 고향이었다. 드로잉, 콜라주, 템페라 등 다양한 기법을 활용하여 1970년대 초반까지 집중적으로 제작한 풍경 산수화를 연상케 하는 <Mountainpath>(1968~83) 시리즈와 한글 서체를 담은 <Korean Writing> (1968~69) 연작들은 이러한 그의 마음을 보여주는 듯하다.  


특히 서체 작업의 경우, 당시 사회주의 리얼리즘에서 신표현주의의 태동으로 이어지던 독일 미술계의 지배적인 화풍에 편승하는 대신 스스로의 화풍을 구축하고자 한 그의 노력을 반영한다. 장지 등의 종이 위에 묵화 기법으로 한글을 그려 넣은 연작들은 한글이 조형성이 강조된 채 빨강, 노랑, 파랑 등 다양한 원색들과 만나 기하학적인 문양으로 발현된다. 


서체라는 소재 만큼이나 그에게 중요했던 것은 서양화와 구분되는 동양화만의 특징적인 전통 종이와 붓이라는 재료였는데, 기존의 장지와 서예용 붓이 아닌 무명천에 초를 녹이는 방법으로 서체를 수 놓은 <Textil(그림 이야기)>(1970~74)는 재료에 대한 그의 지속적인 실험을 보여준다. 이처럼 서양 주류 미술계 속에서 동양적 소재를 돌파구로 삼는 것은 비슷한 시기에 구미 지역에서 활동하던 다른 한국 예술가들의 작업에서도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러나 당시 한국 독재 정권의 여파로 유럽에 거주하던 유학생과 문화예술인들을 향한 검열과 감시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건인 1967년 동백림 사건이 암시하듯, 양광자에게 풍경화와 서체 작업이란 단순히 동양인 작가로서의 개성과 입지를 공고히 하려는 전략을 넘어 당장의 내일을 살아 내기 위한 생존 전략임과 동시에 차츰 잊혀가는 모국을 되새김하기 위한 지극히 개인적이고도 현실적인 선택이었다.


시간이 흘러 졸업이 다가왔지만, 양광자는 동일한 해인 1973년에 베를린 자유대학에 서양미술사 석사 과정으로 새로이 입학을 하여 공부를 이어간다. 이는 그 이후에도 베를린 예술종합대학 사범대학에서 미술교육학 석사를, 베를린 자유대학에서 교육학 박사 과정(수료)을 밟으며 이론 — 특히 미술교육 — 공부를 부단히 이어갈 그의 행보를 알리는 전조이기도 했다. 모국어가 아닌 타지의 언어로 쉽지 않은 이론 연구를 지속해 나간 이유에 대해 그는 한국 화가로서의 진정한 정체성을 모색하기 위해서는 실기를 넘어 동서양의 미술사적 이론 숙지의 필요성을 체감했기 때문이라고 답한다.  


한편, 그가 부지런히 공부에 매진했던 1970년대 독일에서는 파독 간호사들의 장기 체류가 법적으로 문제시되기 시작하며 독일 정부 측의 일방적인 귀국 조치가 취해지기 시작한 때였다. 이에 반대하는 베를린, 프랑크푸르트, 뮌헨 등을 포함한 열 다섯 개의 대도시 주변에 거주하는 독일 전역의 한국 간호사, 유학생 등 신분의 여성들은 거리에 나와 적극적으로 시위를 열었는데, 이 때 결성된 것이 바로 ‘재독한국여성모임’이다. 그 당시 양광자는 간호의 길을 떠난 지 꽤나 시간이 흐른 뒤였으나 기금을 모집하고 서베를린 지역 모임의 설립을 주도했을 뿐만 아니라 회원들의 목소리를 담은 문집의 표지, 포스터, 우표 디자인 등을 통해 여러 방면으로 적극적인 연대지원에 나선다. 


1977년 양광자는 스위스 출신의 서양화가 마이클 비스(Michael Wyss)와 혼인 후 1980년 스위스로 거처를 옮긴다. 새로운 삶의 터전에서 이어진 그의 작업들은 다양한 양상을 보이는데, 구상화의 등장이 그 첫번째이다. 주로 추상화의 양상을 띠던 그의 이전 작업들에 비해 1970년대 후반~1980년대 초반으로 이어지는 작업들은 사회 비판적인 메세지를 내포한 인물화나 자전적인 의미를 담은 자화상 등의 형태로, 인물의 형상이 집중적으로 등장한다. 이는 당시 동료 화가였던 남편에게 일부 영향을 받은 결과이기도 했다. 비록 첫 결혼생활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으나, 주로 인물화를 그렸던 남편과 함께 자유롭게 목탄, 크레용, 수채 등 다양한 기법을 혼합해 가며 색채 실험을 할 수 있었던 시기라고 그는 회고한다.  


그의 구상화는 전체 그림에서 도려내진 듯한 구도를 보이는 것이 특징으로, 하나의 소실점을 두고 화면 내부에서 바깥으로 시선이 뻗어 나가는 구도인 ‘1점 투시도법(central perspective)’을 근간으로 한 서양화들과 달리, 가장자리에서 안 쪽으로 그려지는 방식을 보인다. 하여 작업이 완성된 후에도 해당 화면에 이어지는 내용을 연결해서 얼마든지 화면의 전체 크기를 확대 할 수 있는 독특한 특성이 발견된다.2)  


1979년부터 1980년대 전반에 걸쳐 양광자는 일련의 연극들에 무대장치와 의상 디자이너로 참여하기도 했다. 그 중 대표적인 작업으로는 독일 메민겐 시립극장에서 당시 스위스 출신의 저명한 연극감독 우르스 비셔(Urs Bircher)와 협업한 헨리크 입센(Henrik Ibsen) 원작의 ‘인형의 집’ 연극 등이 있다.


부지런한 작업 활동 중에도 양광자를 이론 공부를 놓지 않았다. 부단한 노력 끝에 마침내 그는 국가고시 통과 후인 1986년, 취리히예술종합대학 최초의 동양인 교수로 임용되어 향후 20년 간 부임하게 된다. 1980년대 중반은 유럽과 한국에서 그의 첫 개인전이 열린 뜻 깊은 시기이기도 했다. 동서양의 강렬한 융합이라는 찬사와 함께 성황리에 개최된 스위스 베른에서의 1985년 개인전에 이어 이듬해, 서울의 박여숙 화랑과 공간 미술관에서 동시에 90여 점을 공개하며 한국에서도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3)


이후, 주한 독일문화원 괴테와 금호 미술관 등을 포함한 여러 기관에서 개인전이 열렸지만, 1990년대와 2000년대는 그에게 쉽지 않은 시기였다. 약 30여 년에 가까운 세월을 해외에서 지내온 중견 작가에게 오랜 만에 돌아온 모국은 상대적으로 낯선 무대일 수 밖에 없었다. 다른 시기에 비하여 비교적 적은 작업의 수가 이에 대한 방증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한 번도 붓을 놓지 않았다. 1993년부터 최근까지 꾸준히 제작된 <Postcard>(1993~2022) 시리즈에서는 서양화의 전통 기법들로 여인의 초상화나 꽃이 그려진 엽서들의 뒷면에 수묵 담채화로 새로이 해석된 이미지가 등장한다. 이어 그의 붓질은 사람의 키를 훌쩍 넘는 대형 크기의 종이로까지 확장되는데, 최근 제주 돌문화공원 오백장군 갤러리(2017)와 타이페이 시립미술관(2019)에서 이러한 수묵화 작업들을 선보인 바가 있다. 


여든을 바라보는 지금, 양광자의 붓질은 계속되고 있다. 작은 엽서에서 대형 종이를 넘어, 이제는 실제 공간의 벽면 전체를 수묵을 덧입힌 손바닥 크기의 수 십 조각의 장판지들로 콜라주 하듯 뒤덮은 대형 설치작업을 제작 중이다. 모국을 떠났던 그 시절 특유의 한국 주거 공간의 온기 어린 노란 장판을 상기시키는 신작이다. 어떤 완성물이 나올 지 아직은 예측하기 어렵다며 웃어 보인 그였지만, 하나 분명한 점은 그의 붓이 닿을 다음 행선지들은 여전히 무한하다는 점이다.  




김태이(1994~), 이화여대 대학원 미술사학과 석사, 현 필라델피아미술관 큐레토리얼 어시스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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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양광자와의 화상/메일 인터뷰, 2022년 11월 14일~12월 8일

2) 문정희, 《동아시아의 현대화: 기호와 오브제》 전시도록, 2017, 이응노미술관

3) 「량광자씨 국내 첫 개인전」, 『매일경제』, 1986. 6. 20.





양광자, <그림이야기>, 1970-74, 무명천에 녹인 초, 사진: 작가 제공





양광자, <Goldmann>, 1981, 캔버스에 유채, 74x182.5cm, 사진: 작가 홈페이지





양광자, <Waterwave>, 2004, 종이에 먹, 97.3x179cm, 사진: 작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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