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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여성이 바라본 여성의 현실, 류준화 | 장하영

현대미술포럼



여성이 바라본 여성의 현실, 류준화



류준화(1963~)는 90년대부터 꾸준히 작품을 통해 여성문제를 탐구하고 성평등에 대한 자신의 목소리를 냄으로써 여성주의를 미술로 실천해 온 작가이다. 그는 1986년 경북대학교 예술대학 미술학과를 졸업하고 1990년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원 서양화과를 졸업했다. 1988년 대학원 시절에는 정치적 독재와 탄압하에 겪는 암울한 현실에 대한 저항정신을 표출하는 추상화 작업을 하였다.

대학원 졸업 후 류준화는 1991년에는 《여성과 현실전》에 참여하는 계기로 민족미술협의회 내 여성미술연구회에서 활동하였다. <짐승을 죽였습니다>(1991)는 제5회 《여성과 현실전》에 전시된 작품이다. 배경에 보이는 건물들은 성매매 여성들이 줄지어있는 윤락가로 보이며 아이러니하게도 건물 저편으로는 교회를 상징하는 십자가가 보인다. 이 작품에서 여성들은 윤락가 건물 사이로 움츠러들어 있거나 벌거벗겨진 채로 바닥에 눕혀져 있는 모습이라면 남성들은 옷을 입고 그러한 모습을 방관하고 있거나 여성의 몸을 짓밟고 서 있다. 이 작품의 제목은 아동 성폭력 피해 여성이었던 김부남이 1991년에 저지른 살인사건을 바탕으로 한 것이며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 성폭력의 심각성에 대한 인식이 미비했던 당시 사회에 경종을 울리고자 했다.1)  

90년대 초반에 출간된 도서 『결혼이라는 이데올로기』에는 류준화의 <미미의 하루>(1994) 연작이 실려있다. 미미라는 이름의 완구용 플라스틱 인형을 작가가 다양한 배경과 동작, 조명으로 세팅한 후 이를 사진으로 찍고 자신이 쓴 짧은 글을 곁들인 것이다. 헨리크 입센의 『인형의 집』 여주인공인 노라처럼 아내나 어머니로서의 역할 놀이를 수행하고 있는 미미는 언제나 얌전한 미소를 띠고 있다. 이 작품을 소개하는 첫 장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쓰여있다. “…어머니와 내 남편은 말했다. 여자는 정숙해야 한다. 여자는 깨끗해야 한다. 여자는 복종해야 한다. 여자는 희생해야 한다. 그리고 내 남편은 내가 음탕한 여자이기를 기대했다”

작가는 <미미의 하루>로 대변되는 사진 작업과 글을 통해 아내란 여러 도덕적 가치를 지키면서도 동시에 남편의 성적 욕구를 충족시켜야 한다는 남성중심적 사고의 역설을 지적했다.
1994년 당시 서울에 위치했던 한국미술관과 경기도 갤러리 한국에서 동시에 개막된 《여성, 그 다름과 힘》은 한국 여성주의 미술의 중요한 기록이 되는 전시로 류준화는 여기에 <소매를 리본으로 묶고...>(1994)와 <정숙한 아내>(1994)를 출품하였다. 

<소매를 리본으로 묶고...>는 설치작으로 전시장 벽면에는 한 여성이 흰옷을 입고 손에 물이 뿜어져 나오는 호스를 쥔 사진 8개가 동일하게 복제되어 붙여져 있고 그 옆에는 사람 키만 한 봉제 인형이 서 있다. 이 분홍색 잠옷을 입은 단발머리 인형은 화장을 한 채로 눈을 감고 손에 천으로 만든 길쭉한 줄을 들고 있다. 《여성, 그 다름과 힘》 전시도록에는 이 작품에 사용된 사진이 본래 실렸던 잡지의 설명 글이 그대로 적혀있는데 사진 속 여성이 입은 셔츠와 바지, 그가 바른 로션과 신발 각각의 제품 이름이 나열되어있다. 류준화는 이 작품을 통해 대중 매체 안에서 고도로 상업화된 여성 이미지의 허상을 비판하고자 했다.

<정숙한 아내>는 화려한 장신구를 하고 옷자락을 펄럭이는 세련된 여성 전신 초상화의 치마 쪽에 검은 마네킹의 하반신을 연결한 설치작품이다. 그림의 좌측 상단에는 ‘정숙한 아내-남성의 경제권’이라는 문구가, 마네킹의 둔부 상단 쪽에는 ‘남성의 경제권-매춘부’라는 문구가 적혀있다. 이 두 가지 문구를 이어보면 ‘정숙한 아내-남성의 경제권-남성의 경제권-매춘부’라는 문구로 이어진다. 이 문구를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 있는데 한가지는 정숙한 아내는 남성의 경제권 여부에 달려있으며 역설적으로 남성의 경제권은 그가 원한다면 성을 구매할 수 있게 한다는 것이다. 다른 한 가지는 조신한 아내와 매춘부를 결코 같은 여성으로 바라보지 않으면서 동시에 아내에게 성스러운 모성의 수행자로서의 역할과 매춘여성에게 바라는 성적만족감 모두를 요구하는 이중성을 비판하는 해석이다. 두 가지 해석 모두 남성중심적 사회가 여성을 바라보는 양가적인 시선을 드러낸다.

1995년의 <매춘시장(買春市場)>은 세 개의 검은색의 프레임 안으로 각각 한 명의 여성들이 그려져 있다. 이 작품에서 우선 주목할 것은 제목인데, 작가는 ‘매춘’의 통상적 한자표기인 ‘팔 매(賣)’자를 쓰지 않고 ‘살 매(買)’자를 사용했다.2) 매춘이란 단어에 ‘팔 매(賣)’를 쓰며 성매매의 ‘판매’에 원인과 책임을 돌리는 사회의 암묵적 관념을 성을 사는 사람들에게도 분명 책임이 있다는 것을 짚어낸 것이다. 이 작품을 《해방 50주년 역사미술전》에 전시함으로써 류준화는 해방 이후 50년 동안 더욱 거대해진 성매매 시장의 암울한 현실을 시각예술을 통해 고발했다. 채도와 명도가 낮은 붉은색과 갈색, 회색, 검은색으로 표현된 이 여성들은 공통적으로 발가벗고 있고 각 프레임에는 노랑, 파랑, 빨강의 노리개가 그들의 얼굴 이미지 앞에 달려있다. 또한 여성들은 각각 소녀, 청년, 중년의 모습으로 이 작품은 여성을 성 노리개로 삼는 사회의 어두운 면을 꼬집고 있다.

1999년에 류준화는 여성주의를 내건 대규모 미술전인 《팥쥐들의 행진》에 참여했다. 이 전시에 출품된 <내가 너를 본다>는 열 개의 캔버스에 각각 한 명의 남성들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이 중 절반인 다섯 개의 캔버스에는 남성의 얼굴 부분이, 다른 다섯 개에는 주로 남성의 상반신과 하반신 윗부분이 그려져 있다. 클로즈업된 남성의 얼굴들은 성적 절정에 오른 표정이고 전신이 표현된 남성들은 레이스가 달린 란제리를 입고 있거나 면도하거나 옷을 반쯤 걸친 채로 있는데 음울한 표정을 짓고 관람자의 시선을 똑바로 마주하지 못하고 있다. 미술의 역사에서 여성은 남성의 관음증적인 시선의 대상물이 되어왔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 작가는 그러한 등식을 도치시켜 남성을 관음증적 시선의 대상으로 만들고 있다.

1997년 류준화는 여성미술연구회에서 함께 활동했던 곽은숙, 우신희, 정정엽과 연구회 밖에서 만나게 된 제미란, 김명진, 하인선, 윤희수와 ‘페미니스트 아티스트 그룹 입김’을 결성하였다. 국내 여성문화 운동과 여성 인권에 대한 의식이 고조되던 1990년대 후반에 활동을 시작한 입김은 2000년대에 대중의 성 평등의식을 일깨우려 예술적 실천을 시도한 여성 예술가 그룹이다.

그들의 첫 번째 기획 프로젝트는 2000년에 갤러리보다에서 열린 《페미니스트 아티스트 프로젝트 그룹 입김 전(展)》으로 이 전시에 선보인 류준화의 <집사람> 연작은 다양한 여성들의 얼굴 부분을 확대하여 그린 연작이다. 이 여성들은 머리모양, 이목구비는 각자 다르지만 모두 눈동자가 뚜렷이 나타나지 않아 그들이 어디를 응시하는지 알 수 없고 보라색과 푸른색 안료가 변져있어 생기 없는 유령과 같은 모습으로 표현되었다. 

우선 이 작품의 제목인 ‘집사람’이란 단어의 사전적인 정의는 ‘남에 대하여 자기 아내를 겸손하게 이르는 말’이라고 하나, 기혼 여성의 활동반경을 집으로 제한함으로써 그들의 사회활동에 부정적인 암시를 드러내는 단어로 볼 수 있다. 작가는 이 작품에서 수동적이고 유령 같은 여성들의 얼굴을 ‘집사람’이라는 공통적 제목으로 묶어 제시함으로써 기혼 여성의 개성을 묵살하고 그들을 집이라는 제한된 장소에 가두어 두려는 사회의 관념에 일침을 가하고 있다. 

같은 해인 2000년 《아방궁 프로젝트》는 조선시대 유교 사상의 궁극적 제의 공간인 종묘를 여성의 몸 중 탄생을 담당하는 자궁으로 재구성하는 목적으로 입김이 기획하고 실행한 장소특정적 프로젝트였다. 프로젝트 제목의 ‘아방궁’이란 ‘아름답고 방자한 자궁’의 줄임말로 가부장제와 신분제 이데올로기가 지배하는 종묘에 깃든 위계질서를 전복시키고자 하는 입김의 의지가 담겨있다. 

그러나 종묘 내부에서 전시는 금지되어 그 앞에 위치한 종묘시민공원에서 2000년 9월 29일부터 10월 1일까지 3일간 전시가 열릴 예정이었으나 이 프로젝트를 알게 된 전주이씨 종친회는 9월 27일 행사 진행을 포기하라는 통보를 해왔다. 전시 당일 오전에는 전주이씨 종친회 및 성균관 유림 남성들 백여명이 종묘시민공원으로 와서 작품을 훼손하는 등 전시를 무력으로 방해하였다. 전주이씨 종친회는 9월 29일 입김 멤버들에게 프로젝트 중단을 요구하는 공문을 보냈고 9월 30일 입김은 결국 전시를 포기하였다.3) 

비록 순조롭게 진행되지 못하였으나 입김은 다양한 언론 매체를 통해 입장을 발표하고 전시를 방해하는 세력에 적극적으로 대응함으로써 이 프로젝트는 당시 미디어의 주요 이슈로 부상했다. 전시 진행이 좌절된 약 한 달 뒤 10월 29일에 입김은 여성문화 활동가, 여성문화인, 여성단체들과 연대하여 종묘시민공원에서 《여성문화축제》를 진행했다. 

이 축제에 참가한 여성들은 ‘가부장제의 문화적 야만성과 성차별적 폭력성을 규탄한다’는 현수막을 내걸고 전주이씨 종친회와 성균관 유림으로 대표되는 뿌리 깊은 한국사회의 남존여비 사상과 가부장제를 비판했다. 이 프로젝트가 유교 이데올로기를 수호하는 남성들에 의해 좌절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한국사회의 가부장적 경직성을 드러낸 것이며 이후 입김의 《아방궁 프로젝트》는 한국 여성주의 미술의 역사에 획을 그은 상징적인 사건으로 평가되었다.

류준화는 90년대 초반에 주로 회화라는 평면 양식을 통해 여성에게 가해지는 사회적 폭력, 성평등 구조의 모순과 불합리함을 고발했고 90년대 초중반 이후로는 사진, 글, 설치 등 다양한 매체와 양식으로 작가가 바라보는 여성의 현실을 폭로했다. 90년대 후반에는 여성주의 예술가들이 모인 예술활동 그룹인 입김에서 전시와 프로젝트를 기획 및 창작하여 미술을 통해 여성주의의 저변을 넓혀왔다. 2000년대 이후로 류준화는 바리데기나 여성 독립운동가들처럼 신화와 역사 속에서 여성주의를 실천한 인물들을 그림으로써 자칫 잊힐 수 있는 여성들의 역사를 이미지로 재조명하고 있다.



장하영(1986~), 이화여대 대학원 미술사학과 석사, 전 더컬럼스 갤러리 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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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김부남은 어린 시절 이웃집 아저씨였던 송백권에게 성폭행을 당하고 21년간 트라우마를 겪다가 1991년 송백권을 살해하였다. 김부남은 공판에서 '나는 짐승을 죽인 것이지 사람을 죽인 것이 아니다.'라고 진술하였고 이 사건은 아동 성폭행의 피해와 심각성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류준화와의 전화 인터뷰, 2023년 1월 12일

2)  류준화와의 전화 인터뷰, 2023년 1월 4일

3)  김현주, 「페미니스트 아티스트 그룹 ‘입김’의 개입으로서 연대와 예술실천」, 『미술사논단』, 42호, 한국미술연구소, 2016, p.171.



류준화, <짐승을 죽였습니다>, 1991, 혼합재료, 60x80cm, 작가 제공




류준화, <정숙한 아내>, 1994, 마네킹, 캔버스에 아크릴, 160x80cm, 작가 제공




류준화, <집사람 연작>, 2000, 면천에 아크릴, 각 25x18cm, 작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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