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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전준자, 회화와 삶의 ‘축제’ | 이주민

현대미술포럼



전준자, 회화와 삶의 ‘축제’ 



1981년 대한민국 미술전람회(國展)의 서양화 비구상 부문 추천작가 최초로 여성이 선정된다. 주인공은 전준자(1944~)로, 같은 해에 국전이 막을 내리며 그는 국전 서양화 비구상 부문의 유일한 여성 추천작가로 남는다. 그는 이미 홍익대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이던 1964년부터 국전에서 입선과 특선을 연달아 수상하며 일찍부터 작업을 알린다. 

1962년부터 1968년까지 전준자는 서울의 홍익대학교와 동 대학원의 서양화과에서 공부한다. 그는 당시 지도교수 이봉상에게 가르침을 받으며 다양한 서구 화풍을 실험한다. 그의 초기 작업에는 인상주의나 상징주의 등 서구 근대 미술사조의 요소들이 혼재되어 있다. 일종의 형식실험이자 회화성의 탐구로, 이 시기를 거치며 전준자는 곧 자신만의 화풍을 만들어 간다. 그는 특히 앵포르멜 정신에 관심을 가지고, 추상적 붓 터치와 대담한 선을 실험한다. 그의 화면에는 언제나 대상이 존재하지만, 작가는 그것을 면밀히 묘사하는 데에는 관심이 없었다. <좌상 B>(1964)와 같은 작업을 보면 그가 인물이나 누드를 그릴 때조차도, 대상을 자세히 설명하기보다는 그것의 인상과 호흡 등 시각 감각을 넘어서는 것을 그리고자 함을 알 수 있다. 그는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의 1호 연구조교가 되고, 강의를 맡는다. 또한 당시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교수로 재직 중이던 유경채의 추천으로 창작미술협회의 회원 활동을 시작하고, 이후 구상전에 참가하며 두각을 나타낸다.

서울에서의 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1969년, 갑작스러운 부친의 작고로 전준자는 부산으로 돌아간다. 만주에서 태어나 부산에서 성장한 그는 교육적이고 예술적인 집안에서 자랐고, 보수산 중턱에서 살며 자연을 풍부하게 경험하였다. 또한 고교 시절, 작가의 평생 스승으로 남는 송혜수의 미술 연구소를 다니며 그림을 시작하고 새로운 회화를 접한 곳이 바로 부산이었다. 홀연한 귀향이었지만, 작가는 그의 상상 속에 내내 아름답게 존재하던 유년의 공간을 다시 마주하게 된다. 덕분에 당시의 작업에는 풍부한 자연의 감각이 등장하며, 그는 이를 서정적이고 추상적으로 그린다. 

때때로 <작품 1>(1971)과 같이, 추상적 경향을 넘어서서 완전히 추상적으로 보이는 작업도 등장한다. 또한 그는 제목으로 ‘추상’이나 ‘작업’, ‘작품’을 반복적으로 사용하며 추상 형식에 관한 관심을 드러낸다. 그에게 추상 형식의 탐구는 그 자체가 목적이라기보다는, 자신의 감각을 시각화하는 과정이자 방법이다. 그는 당시의 작업을 통해서 회화적 표현을 다양하게 실험하고 그 범위를 넓힌다. 작가는 큰 캔버스에 대담하게 색면을 그리고, 진동하는듯한 붓질로 대상의 외곽선을 흐린다. 화면 위의 이미지는 부유하는 듯 보이며 때때로 자연스럽게 배경에 녹아들어 회화적으로 표현된다. 또한, 작가는 드로잉처럼 이미지를 그리며 대담함 중에 세밀한 감각을 보여준다. 

한편, 미술 작업은 그것의 물리적 크기가 커질 때 주제를 기념하는 의미가 강해진다. 그는 작업 초기부터 큰 캔버스를 선호했고, 1970년대에는 100호 이상의 캔버스에 반복적으로 작업을 한다. 여기서 화면은 그가 마주하는 자연을 개인적인 시선으로 보고 느끼며 그리는 지극히 사적인 공간이다. 전준자는 자신이 감각하는 자연을 마치 대작의 시리즈처럼 그리며, 그의 상상과 감각의 세계를 긍정하고 기념한다. 또한, 20대부터 줄곧 쉬지 않고 일하며 바쁘게 살아온 작가에게 그림과 그리기는 말 그대로 그의 전부였다. 그는 고된 삶 속에서 일구어낸 예술을 기념하듯 펼쳐낸다.

1973년 신세계 갤러리에서의 첫 개인전을 시작으로 전준자는 활발히 작업을 발표한다. 평론가 이일은 “보기 드문 규모의 것”으로 “대담한 구도를 시도”한다고 그를 평가한다.1) 또한 평론가 오광수는 “추상표현주의에서 출발하여 그것을 자신의 체질로서 재해석한 독특한 조형언어를 보여주는” 드문 작가라고 그를 지칭한다.2) 1970년대를 거치며 전준자는 자신만의 화풍을 공고히 한 작가로 자리매김한다.

‘축제’가 등장하는 1979년은 전준자의 작업 인생에서 중요한 변곡점이라고 할 만하다. 그는 1978년 미국 여행 중에 아메리카 원주민의 처량한 축제의 춤을 보았고, 이듬해에 여행 당시 느꼈던 특유의 서글픈 이미지를 기억하며 <인디언 축제>(1979)를 그린다. 축제라는 단어와 아메리카 원주민의 슬픈 몸짓, 아득히 먼 과거의 흔적과 안타까운 그들의 현실이 모두 섞여 작가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기 때문이다. 뒤이어 뉴욕의 맨해튼에서 본 군상의 모습을 그리며 ‘축제’라는 제목을 다시 붙인다. 그는 뉴욕에서 형형색색의 사람들이 마치 한 덩어리가 되어서 거리를 걷는 모습을 보았고, 그것의 움직임과 리듬, 에너지를 강하게 느꼈다고 이야기한다. 덧붙여서 여행 이후, 그전과 같이 서정성이 짙은 작업은 할 수 없었다고 소회를 밝힌다.3) 축제라는 주제와 맨해튼에서 본 군상의 모습이 합쳐지며, 그의 관심이 지극히 개인적인 것에서 보편적인 인류에 관한 것으로 확장되기 시작한다. 

전준자의 축제에는 언제나 무명(無名)의 군상이 등장한다. 1980년을 전후한 초기 축제 작업에서 군상의 인체는 크고 강인한 움직임을 보여준다. 또한 강렬한 직선으로 표현되어 원시적인 감각을 풍긴다. <평화로운 축제>(1981)에서 볼 수 있듯이, 이 시기 군상은 넓은 선 또는 면으로 그려지며 때때로 군상과 배경의 구분이 명확하지 않다. 또한 작가는 화면에 주로 사용된 색의 보색을 이용해서 점과 같은 짧은 붓질을 남기기도 하는데, 마치 인간 생명의 원천이나 영혼에 대한 암시 같기도 하다. 이는 긴 붓질과 대비되어 또 다른 움직임을 보여준다. 나아가 그는 <축제>(1983)와 같이 추상화된 군상의 모습을 그린다. 이 작업은 가까이에서 보면 다양한 붓질을 보게 되고, 제목을 보거나 거리를 두고 보면 군상의 형상을 눈으로 이어볼 수 있다. 그의 작업에서 움직임은 관람자의 보는 행위로까지 확장된다.

1985년을 전후하여 축제의 배경은 더욱 파편화되고 추상화된다. 그는 짧은 붓질을 반복적으로 사용하여 배경을 추상적이고 서정적으로 표현한다. 이때 군상은 곡선으로 그려지고 신체의 움직임이 부드럽게 등장한다. 군상의 신체가 부분부분 생략되고 상반신만 등장하기도 하며 얼굴이 강조되기 시작한다. 그들의 얼굴은 묘사되지는 않았지만 주로 화면 밖을 응시하고 각자의 시선은 미묘하게 다른 쪽을 향한다. 이로써 화면에는 작가가 직접 그려서 드러나는 움직임과 암시된 움직임이 다층적으로 교차한다. 이후 축제의 분위기는 점점 밝아진다. 축제의 푸른색은 이전의 다소 어둡고 차가운 계열에서 밝은 파란색으로 변화하고, 더불어 색채가 다양해진다. 배경의 분위기로 미루어보아 군상의 표정 또한 온화하게 느껴진다. 축제의 화면은 다채로운 색과 붓질의 향연처럼 느껴지며 감각적인 움직임으로 가득하다. 당시 그는 회화성을 극대화하여 그리기를 실험한 것이다.

1990년을 지나며 축제의 배경은 다양하게 변주된다. 작가는 배경을 언제나 군상과 밀접하게 그려 왔는데, 절제된 인체의 움직임의 에너지가 배경을 통해 발산하는 듯하기도 하고 때때로 인물은 배경에 가려지며 신비로운 느낌을 주기도 한다. 반면 이 시기의 군상은 <축제>(1996)에서처럼 배경과는 상반되게 명상적이고 정적으로 등장한다. 2000년을 전후하며 그는  선에 더욱 집중하며 변화를 보이는데, <축제>(2002)와 같이 군상을 그리는 선이 마치 한 호흡처럼 이어지며 배경과 구분되는 작업이 눈에 띈다. 작가는 일필휘지하듯 선을 긋고, 그의 호흡과 움직임이 곧 군상의 모습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이는 축제에 대한 작가의 메시지가 더욱 적극적으로 변하는 것과 겹친다. 그는 “축제란 그저 하나의 이벤트가 아니라 우리가 (...) 추구해야할 목표이자 (...) 통과하고 싶은 과정”4)이라고 말한다. 그는 보편적 인류애를 담아 작업을 하고, 축제 작업은 곧 인류를 향한 작가의 메시지이다.

작가는 평생에 걸쳐 붓의 움직임 즉, 선을 탐구해왔다. 작업 초기부터 병행해 온 드로잉과 여행 스케치를 보면 그가 그리고자 하는 선의 의미가 분명하다. 그에게 여행 스케치란 반드시 현장에서 그려진 것으로, 당시의 시공(時空)과 기후, 예민한 관찰자의 호흡이 담긴 것이다. 이는 곧 그가 추구하는 제스쳐 드로잉(Gesture Drawing)으로, 이를 통해서 그는 지금껏 추구해온 움직임의 탐구를 더욱 밀고 나간다. 결국 작가는 기운 생동(氣韻生動)한 선을 긋고자 하며, 전통적 예술관에 닿았음을 밝힌다. 최근 축제의 모습이나 스포츠 축제를 그린 작업에서 그의 기운 생동한 선이 두드러진다. 그는 축구 경기와 선수를 좋아하며, 훌륭한 선수와 좋은 작가는 일맥상통한다고 생각한다. 그에 따르면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훈련된 선수는 결정적인 순간에 계산하지 않는다. 마치 저절로 이루어지는 듯 무아지경의 순간에서 최상의 결과를 만든다.5) 그것은 평생의 붓질이 축적된 작가가 화폭 앞에서 영감의 순간을 마주하는 것과 같다.

전준자의 붓질은 앵포르멜에서 시작되어 기운 생동한 선에 이른다. 이로써 작가는 평생의 회화적 실험을 통해 서양 미술사조와 전통적 예술관을 잇는다. 더불어 그의 시선은 자신의 내부에서 출발하여 인류를 향해 확장하며 지금에 이른다. 동·서양이라는 서로 다른 예술의 갈래와 보편적인 인류애가 평화롭게 그의 작업으로 수렴하는 것이다. 축제의 화면 속, 무명의 얼굴은 마치 누구의 모습이 들어가도 상관없는 듯 관람객을 비춘다. 전준자는 그의 작업을 통해 우리를 삶이라는 축제에 초대하고 있다.



이주민(1983~), 이화여대 대학원 미술사학과 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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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일, 「이달의 전시회-전준자 제1회 개인전」, 『신동아』, 1973년 5월호, p. 273.
2) 오광수, 「전준자씨의 근작을 보고」, 전준자 제5회 개인전 팸플릿, 1976.
3) 작가와의 인터뷰, 2023년 2월 10일, 작가의 작업실.
4) 전준자, 「축제–만남의 축제」, 2001, 『전준자 WORKS 2009-1962』, 2009, p.72.
5) 작가와의 인터뷰, 2023년 2월 10일, 작가의 작업실.




전준자, <작품 1>, 1971, Oil on Canvas, 162×130cm




전준자, <평화로운 축제>, 1981, Oil on Canvas, 200×330cm




전준자, <축제>, 1996, Oil on Canvas, 130×97cm




전준자, <축제>, 2002, Oil on Canvas, 72.7×60.6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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