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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 모성의 은유로서의 자연, 신금례의 꽃그림 | 김가영

현대미술포럼



모성의 은유로서의 자연, 신금례의 꽃그림



신금례(1926-)는 국내 미술대학을 졸업한 1세대로서, 어언 70년의 화업을 이어오고 있는 원로 화가이다. 1945년 이후 대학마다 막 설치되던 미술학과 중에서도 가장 처음 생겨난 이화여자대학교 서양화과를 졸업한 그는, 남관미술연구소의 초기 연구생이자, 서울 수복 시기 부산에서의 예술가 사회를 경험하기도 한 해방화단의 주요 인물이다. 그럼에도 그에 대한 변변한 연구를 찾아보기 어려운데, 이는 비단 그의 문제일 뿐 아니라 같은 세대 여성 미술가들의 공통된 한계이기도 하다. 1950년대에 활동을 개시한 여성 미술가들에 대한 연구 공백은 그들의 작품이 1960-70년대의 전위미술과 달리, 또한 1980년대 여성주의 미술과 달리 사회와 괴리를 보인다는 비판적인 편견으로 지속되었다. 

그러나 여성의 직업 활동이 매우 제한되었던 시절, ’여류’의 활약은 그 세부적인 형태를 떠나 언제나 적잖은 무게를 지닌 것이었다. 비단 그들의 그림이 사회적 발언과는 거리가 있다 하더라도, 가정생활과 병행하여 혹은 그것을 뒤로하고 작업을 지속하기로 하는 여성의 결심이 이미 일종의 반사회적 행동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들의 작품은 사회적이든 아니든, 저마다 독창적이며 미술사적 의의를 갖는다는 점에서도 충분히 주목할 만하다. 미술사학자 김경연 외 연구자들은 2010년 이와 동일한 문제의식에서 신금례의 구술채록을 실시한 바 있다. 약 반 년간 몇 차례에 걸쳐 단행본 한 권 분량으로 완성된 이 채록은 화가의 개인사와 작가로서의 삶을 충실히 담고 있다. 본고는 이를 주요 자료로 참고하고, 사실을 뒷받침하고자 전시도록 등 여타 자료를 함께 살폈음을 밝혀둔다.

2남 3녀 중 막내로 태어난 신금례는 화가가 되리라는 막연한 꿈을 갖고 서양화과에 진학했다. 집을 나섰다 돌아오지 못하는 사람들이 수두룩했던 수상한 시절, 그의 큰오빠는 아까운 막냇동생이 얌전히 집에 있기를 바랐다. 반대를 무릅쓰고 시작한 대학 생활은 훗날 ‘후회 없이 보람 있는 선택이었노라’ 회상할 만큼 즐거웠다. 학교에선 심형구(1908-1962), 김인승(1911-2001) 등으로부터 사실적인 묘사를 중시하는 서양화 교육을 받았고, 김원(1912-1994)으로부터는 해부학 수업도 들었다. 마땅한 모델이 없어 학생들끼리 속옷만 입고 서로의 모델이 되어주었다고 한다. 

학교를 마치고는 삼삼오오 모여 당시 몇 없던 화가들의 화실을 다녔다. 미술 ‘연구소’를 표방한 그곳에선 고등학생, 대학생부터 젊은 화가까지 구분 없이 함께 그림을 그리고 친목을 다졌다. 대학교 2-3학년생이던 신금례는 남관의 그림에 흠뻑 매료되어 틈만 나면 남관미술연구소를 드나들었다. 피카소, 마티스, 보나르 등 프랑스 화가들의 화집을 주로 보며 그림에 대한 조언을 얻었다. 훗날 회고하기로, 그는 이 연구소에서 학교에서 경험하지 못한 ‘느낌대로, 감성대로’ 그리는 법을 배웠다고 한다. 이는 이후 대상의 형태를 뭉개 배경과 섞고 느끼는 대로 색을 칠하는 그만의 기법을 개발하는 초석이 되었다.

1949년 대학을 졸업하고 변변히 꿈을 펼칠 기회도 얻지 못한 채 신금례는 가족과 함께 부산으로 이주한다. 피난지에서도 예술가들은 작업 활동을 놓지 않았고, 그 역시 이 시기 작은 사이즈의 정물을 주로 그리며 천경자, 김환기 등과 함께 《3.1기념예술전》에 참여하고, <북어>라는 작품을 대한민국미술협회전에 출품하는 등 나름의 활동을 이어나갔다. 그 시절 우연히 재회한 남관과는 1951년 혼인했다. 혼인 후에도 신금례는 1953년 50호가량 되는 <여인상>으로 제2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 입선하는 성과를 거뒀다. 그러나 이후로는 동문전 격의 ‘녹미회’전에만 참여할 뿐 작가로서 별다른 족적을 보여주지 못했다. 1950년대 말부터 홍익대학교 조형대학 산업디자인과 교수로 부임한 1966년까지는 고등학교 미술교사를 지내면서 작가로서의 활동에 더욱 소홀해질 수밖에 없었다. 졸업한 지 꽤 지났지만 아직 개인전도 한 차례 열지 못한 이유였다.

1972년에야 신금례는 신문회관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다. 교수직을 얻고 난 이후 등록한 이화여자대학교 교육대학원을 막 졸업하고서였다. 그 사이 박석호(1919-1994)의 화실을 다니며 형태가 아주 사라진 기하 추상을 시도하기도 했다. 모노크롬 회화가 곧 주류로 부상할 즈음이었다. 그러나 완전한 추상은 ‘내 것이 아닌 것 같다’고 느낀 그는 절충을 시도했다. 그 시기에 그린 <돌배>(1971)가 초기 형태 실험을 잘 보여준다. 절제된 색으로 그려진 정물화 속 두 개의 배 중 왼쪽은 사실적인 형태로 그려진 반면, 나란히 놓인 오른쪽 배는 공간 속에 녹아들어 형태가 해체되어 가고 있는 모습이다. 온전한 하나의 형상 옆에 그와 비슷하되 옅어진 윤곽선과 배경색으로 뭉개진 형상에서 시공간과 사물을 주관적으로 바라보고자 하는 작가의 의지가 엿보인다. 동시에 왼쪽의 배를 남겨놓았다는 건 구상으로부터 떠나지 않겠다는 결심이기도 했다. 실로 그는 추상이 대유행하던 시기에도 흔들리지 않고 꽃 그림을 그려나가며, 1978년엔 구상계열 그룹 ‘상형전’ 창립멤버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유화와 수채화로 그린 인물화, 풍경화 등 50여 점을 망라한 첫 개인전의 하이라이트는 단연 <해바라기>였다. 그는 집 마당에 심은 해바라기들이 시들어 꺾이고 마른 형태가 유독 마음에 들어 그림의 대상으로 삼았다. 형태를 먼저 택하곤 모노크롬 화가들처럼 제한적인 단색으로 꽃잎과 이파리를 칠했다. (이후 이 작품은 1982년 파리 그랑팔레에서 열린 《살롱 도톤》에도 출품했다고 한다.) 같이 출품한 <과꽃>에서는 꽃병과 배경을 아예 하나의 색으로 칠하고 윤곽만으로 구분하기도 했다. 이처럼 주변에서 관심을 끄는 형상을 찾다보니 그게 다름 아닌 꽃이었고, 꽃이라는 대상을 놓고 나름의 색 실험을 이어나갔다. 때문에 이때는 주로 형태가 뚜렷한 관상용 꽃이 작품의 중심에 있었다. 그러나 동시에 <들국화>, <창포>, <화실에서>, <봄 풍경>, <가을 풍경> 등 나란히 걸린 작품들엔 들꽃도 나타났다. 야생화에 대한 작가의 각별한 관심이 이미 이때부터 발현된 것이라 볼 수 있다.

개인전이 열린 당해 신금례는 조선화랑에서 열린 《개관기념 여류화초대전》에도 참여했다. 이 전시는 1973년 여류화가회의 발족으로 이어졌다. 서울대, 이대, 홍대 등 주요 대학 졸업자 중심으로 작품활동을 진지하게 이어가는 ‘여류’ 화가들이 주축이 됐다. 신금례는 1974년부터 1983년까지 이 모임의 회장을 역임했고, 최근까지도 회원과 고문으로서 꾸준한 참여를 보여줬다. 그는 이 단체의 시작을 “가정에 있다가 다시 작품 활동을 하고 싶어서 모인” 것이라 회상한 바 있다. 작가로서의 오랜 공백 끝에 첫 개인전을 연 시점에 이 단체에 적극 가담한 것은 그렇기에 의미심장하다. 1972년은 그의 외동아들 남윤(1952-)이 성인이 된 해이기도 했다. 그제서야 신금례는 부모의 역할을 한풀 내려놓고 작가라는 오랜 갈망을 좇을 틈을 마련했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과연 1978년 희화랑에서 열린 두 번째 개인전은 꽃이라는 주제를 고집하면서도 화풍에 변주를 꾀하는, 성장하는 작가의 모습을 보여준다. 출품작들의 주조색이 프루시안 블루인 데엔 화가 남편의 영향도 없지 않아 있었지만, 당시의 마음이 크게 작용했다. 아들을 유학 보내고 홀로 된 그는 온통 그리움에 사로잡혔다고 한다. 오색 빛 꽃이 매한가지의 한색으로 느껴졌을 터였다. <소식>(1981)에서처럼 꽃과 함께 까치를 그려넣은 것도 외아들을 먼 타국에 보내놓고 늘 길상을 빌던 엄마의 마음에서였다. 1985년 아들이 무사히 돌아오고서야 까치는 더 이상 그의 화면에서 보이지 않게 된다. 신금례는 단순히 형태와 색을 실험하던 데서 나아가 이처럼 꽃에 자기 심상을 적극 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내면의 처음 자리엔 모성이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후 점차 자신의 그림이 밝아진 까닭에 대해서도 그는 손주들이 주는 기쁨을 첫째 이유로 꼽았다.

그러한 어머니의 마음을 자연에 투영하는 것은 그 스스로 자연을 어머니의 품으로 느끼는 데서 비롯한다.

_“인간은 자연에서 태어나서 자연으로 돌아갑니다. … 그렇기 때문에 저는 자연을 기초로 그림을 그립니다.”

1980년 중후반에 이르러 그는 더욱 대담한 방식으로 각종 야생화와 들풀을 화폭에 담아냈다. <엉겅퀴>, <민들레>, <할미꽃>, <호박꽃>, <봉숭아>, 이름 모를 <초봄>의 꽃, <보라색 꽃>, <노란 꽃> 등 자연이 내어준 아름다움에 벅차 하며 반복해 그렸다. 대상만큼이나 그리는 방식도 더 자유분방해졌다. 1985년 신세계화랑에서 열린 세 번째 개인전 출품작부터는 물감을 뿌리듯 올려 흐르게 놔두거나 나이프로 윤곽을 긁어내는 등, 전에 없거나 혹은 소극적으로 나타났던 특징이 전면에 드러난다. 통제 바깥에서 자라나는 들꽃을 더 너른 마음에서 품듯이, 어떤 부분에선 마치 미완성인 것처럼 선만 그어 대강의 윤곽만 표현했다. 빠르게 스케치한 듯한 분위기를 풍기는 이런 기법은 그가 꽃을 더는 정물이 아닌 풍경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주기도 한다. 평론가 오광수(2006)의 언급대로, 어느 면에서 “야생화는 작가와 대등한 존재로서 만나게 되고 소유의 대상이 아니라 더불어 존재하는 대상으로 위상됐다.” 외양을 탐구하거나 개인의 심상을 녹여내는 전 과정을 통과해 이제는 어머니 대자연의 품에 안겨 그 일부로서 더 자유롭게 다른 일부인 꽃을 그리게 된 것이다. 

잘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신금례는 1990년대엔 산도 많이 그렸다. “좀 묵직한 것도 그리고 싶어서 그렸다”곤 하지만, 자연을 바라보고 느끼는 감각이 전과 달리 한층 넓어졌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꽃그림에서와 동일하게 자유로운 필치와 색 사용이 관찰되는 한편, 사사로움에서 벗어난 어떤 호방함이 느껴진다.

작가의 길을 걷는 동안 신금례는 한국여류화가회를 지켜온 것은 물론 한국미술협회 부이사장, 각종 미술대전 심사위원, 운영위원을 역임하는 등 그의 들녘 꽃처럼 꿋꿋이 제자리를 지키며 미술 생태를 유지하는 데 이바지했다. 100세를 바라보는 지금까지 자신과 가족을 돌보며 주변의 꽃을 보듬어 그리는 그의 한평생 작업이 이룬 지평 역시, 은은히 한국 미술의 한편을 풍요롭게 하고 있다.



김가영(1992~) 이화여대 대학원 미술사학과 석사, 가나아트갤러리 전시기획팀 재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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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금례, <돌배>, 1971, 캔버스에 유채, 15×30cm




신금례, <소식>, 1981, 캔버스에 유채, 116.7×90.9cm




신금례, <엉겅퀴>, 캔버스에 유채, 45.5×53cm




신금례, <형제봉>, 2006, 캔버스에 유채, 92×117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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