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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여성 신체미를 추구한 김혜원 | 김지나

현대미술포럼



여성 신체미를 추구한 김혜원



김혜원(1941~)은 청동을 주재료로 독자적인 여체 조각의 경지를 이룩한 조각가이다. 그가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한 1970년대는 최소한의 형태로 물질성이 부각되는 추상조각이 태동한 시기이자 단색화로 대변되는 추상화들이 한국 현대미술의 주요 사조로 부상했을 때이다. 그럼에도 김혜원은 여체를 주제로 한 구상조각에 끈질기게 매진하며, 50여년에 걸친 작업 활동을 통해 끝내 자신만의 미의 원리를 정립시켰다. 

김혜원은 일찍이 조각가의 길을 선택하며 정규 교육과정을 밟았다. 중학교 때 원래 피아노를 쳤던 그는 ‘짧은 손가락’을 핑계로 전공하기를 주저하고 있을 때 조각을 공부하게 될 결정적 계기가 찾아왔다. 서울예술고등학교와 가까이 살았던 김혜원의 집에 교무주임이었던 조각가 백문기가 하숙을 하게 된 것이다. 어느 날 김혜원은 고무찰흙으로 낙타를 타고 가는 대상들을 만들어 피아노 위에 올려놓았고, 그걸 본 백문기는 그에게 조각의 길을 권유했다. 여자가 무슨 조각을 하냐고 어머니의 반대에 부딪치기도 했지만 결국 설득 끝에 김혜원은 1958년 서울예고에 진학하게 됐다. 당시 교사였던 백문기의 철저한 모델링 교육을 받으면서 3년간의 학교생활은 작가로서의 길을 가기 위한 든든한 밑거름이 됐다. 그 후 그는 홍익대학교 조각과에 입학해서 2학년 때 국전에 출품하여 입선하는 등 탄탄한 기초를 바탕으로 한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할 수 있었다. 

1966년 펜실베니아 아카데미 오브 화인아트로 유학을 떠난 김혜원에게 한동안의 공백기가 찾아왔다. 그는 바로 다음 해 미국에서 조각가 정관모와 결혼을 하며 8년간 학업을 중단하고 아내와 엄마의 역할에 충실했다. 하지만 귀국한 후 생활이 안정되어가고 있을 무렵 다시 자신과 예술을 위해 살아가야겠다는 마음으로 홍익대 대학원 조각과에 진학하여 1977년에 졸업했다. 그리고 작업실을 얻어 창작에 몰두하며 1980년에 선화랑에서 <평화로 잇는 미소>라는 일련의 작품들로 첫 개인전을 발표하면서부터 그의 작가적 위치를 확고히 했다. 

<평화로 잇는 미소>는 김혜원의 기독교 신앙에서 출발한 여성 인체상들이다. 그는 죄악을 알기 전 에덴동산에서 행복하게 노닐던 이브와 같이 순수함을 지닌 여인을 표현하고자 했다. 김혜원이 그리는 이브는 ‘숲속의 요정처럼 아름답고 신비스러운 자태’를 갖고 얼굴에는 ‘혼탁과 죄악으로 상처받은 우리의 영혼을 평화로움으로 이어줄 수 있는 미소’를 띠고 있다. 작가는 빼어난 비례미와 양감, 매끈한 표면감을 지닌 사실조각들에 이를 담아내며 이상화된 신체적 아름다움보다는 여체를 유미주의적 관점에서 조형화했다. 청순한 면모를 가진 그의 피조물들은 때로는 나체로, 때로는 얇은 옷을 걸친 채 발끝을 세워 서있거나 다리를 모으고 앉아있는 등 다채롭고 자유분방한 자세를 취하고 있어 율동미의 순간들을 영원으로 이끌고 있다. 

김혜원은 1980년대 후반부터 <섬> 연작을 통해 10년간 추구해온 여체의 사실적 표현에서 벗어나 새로운 구상작업을 모색했다. 그는 인체의 추상적 원형에 집중하며 유기체와 기하학을 사용해서 최소한으로 단순화시킨 와상들을 선보였다. 이는 마치 수면위에 떠있는 무인도와 같아서 작가는 이 시리즈에 <섬>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김혜원은 당시 스스로가 섬과 같이 느껴졌다고 전한다. 작가의 사고방식이 외적인 조형이념을 중요시하던 ‘외향적 반응자세’에서 ‘내면으로의 수용자세’로 바뀌면서 이를 직접적으로 시각화하고자 했고, 그 방법으로는 ‘묵시성’을 택했다. 
 
“외부로의 발산보다는 내부에서 인내하고, 수다한 발언보다는 침묵으로 경청하고, 민감한 반응보다는 이해와 포용으로 잠재우려는 나의 의지와 생활방식은 그간의 아내 몫에서, 엄마 몫에서, 작가로서의 삶 몫에서, 그리고 90이 넘으신 친정어머니의 딸된 몫에서, 자의반 타의반으로 바뀌어간 나의 자화상이었을가도 모른다.”1)

김혜원은 <평화로 잇는 미소> 때와 달리 이제는 절제된 조형언어로 자신의 내면을 표출하고 있다. 이제 인간형상은 인체라는 제한된 소재에서 벗어나 예술가 자신의 독자적인 정신세계, 더 나아가 범자연적인 형상 탐구로 확장됐다. 1990년대 후반에는 <섬>에 포크, 망치, 자동차, 칼과 같이 현대문명을 상징하는 오브제를 첨가시켜 자연의 원형을 파괴해가는 인간의 모습을 담아냈다.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김혜원의 조각은 다시 한번 변화했다. 그는 <관계항> 연작을 발표하며 사물과 공간 사이의 관계를 관찰했다. 작가는 2차원 직립평면에 <섬>에서 보여줬던 추상적인 인간상, 또는 십자가, 하트, 비둘기 등 여러 모양의 상형을 절단해내고, 잘려나간 형상을 완전히 제거하거나 곁에 함께 설치했다. 투각된 구멍을 통해 이쪽과 저쪽의 공간이 하나로 연결될 수 있으며, 이는 공간과 공간과의 관계, 공간과 인간과의 관계에 대해 고찰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 

이렇듯 김혜원은 여체를 다룬 사실조각으로 시작하여 점점 인체를 단순화하여 자연, 그리고 사물로의 형상화에 이르렀다. 그는 1975년 국전에서는 드물게 여성으로서 조각부문의 문공보부 장관상을, 1998년에 석주미술상을 수상하는 등 여류조각가로서의 선도적 면모를 갖추며 활발한 작품 활동을 전개해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연구가 아직 많이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작품에 대한 해석이 치우치는 경우도 발견된다. 특히 작가의 <평화로 잇는 미소> 연작을 논할 때 항상 동반되는 수식어는 ‘관능미’이다. 김혜원은 에로티즘적인 감흥이 아닌 정갈하고 성결한 정감만을 표현하고자 노력해왔다고 여러 번 밝힌 바가 있지만 그의 여체는 관조의 대상으로 간주돼왔다. 여성의 실존적 주체성에 대해 탐구하고 여체 조각의 가능성을 개척해 온 그의 노고가 앞으로 한국 미술사에서 재정의 되기를 기대해본다. 



김지나(1988~), 이화여대 대학원 미술사학과 석사, 스페이스 포 컨템포러리 아트 프로젝트 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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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창작, 그 희열:  : 석주미술상 10주년 기념 수상작가집』, 석주문화재단, 1999, p. 188.




김혜원, <평화로 잇는 미소>, 1980, 브론즈, 155x50x50cm




김혜원, <평화로 잇는 미소>, 1985, 브론즈, 134x57x70cm




김혜원, <섬>, 1988, 브론즈, 42x72x33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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