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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5)붓에 의한 들숨과 날숨, 전영희의 회화적 호흡법 | 김지나

현대미술포럼



붓에 의한 들숨과 날숨, 전영희의 회화적 호흡법 



전영희(1961~)는 추상회화의 다양한 가능성들을 지속적으로 탐구하며 독자적인 작품세계를 구축해나간 작가이다. 그는 1984년에 이화여자대학교 미술대학 서양학과에서 학사를 마치고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1986년에 미국 롱아일랜드 대학원 회화과를 졸업했다. 작가는 1980년대에 추상미술뿐만 아니라 개념미술, 미니멀리즘 등 미국에서 발현하고 있던 다양한 예술 경향들을 직접 경험하고  바넷 뉴먼, 애드 라인하트, 케네스 놀런드, 엘스워스 켈리, 프랭크 스텔라 등의 작품들을 보며 영향을 받았을 테지만 그대로 수용하지 않고 자신만의 실험을 이어나갔다. 숨 가쁘게 변화해온 작업 중 90년대 작품들을 집중적으로 살펴보며 그의 예술적 성취를 들여다보고자 한다. 

1992년에 열린 갤러리 현대 개인전이 전영희의 90년대 작업 성향을 알 수 있는 출발점이 된다. 이때 선보인 작품들은 기하학적인 형태가 화면 전체를 견고하게 구성하고 있다. 작가는 중립적인 색을 사용하여 다양한 크기의 삼각형, 사각형, 원, 별 등의 독립된 도형들로 캔버스 전면을 채우며 분할된 면들을 형성한다. 이렇듯 선, 면 그리고 색의 구성이 기하추상의 기본적인 조형 요소를 이루지만, 전영희의 작품을 일방적으로 기하학적 추상으로 분류하기에는 표현적 특징들이 강하게 나타나고 있다. 그의 반듯한 형상들 위로 거칠게 긁어낸듯한 자국들이 전체적으로 덮고 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기하학적 추상과 표현적인 추상이 대립된 개념으로 간주된다. 하지만 전영희는 이 이분법적인 분류를 제쳐놓고 차가운 논리성과 뜨거운 감성이 교차하는 자신만의 추상 언어를 구축해나가기 시작했다. 

1년 후 전영희의 작업은 급격한 변화를 보였다. 1993년 갤러리 이콘에서 열린 개인전에서는 형과 색이 기하학적인 윤곽을 형성하고는 있지만 색면이 주를 이루고 있다. 명확한 형태의 삼각형이나 사각형이 곳곳에 발견되는 것처럼 기하학적인 형태가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화면을 분할했던 도형들의 윤곽선이 무너지면서 선적인 특성이 강했던 이전 작품들과 달리 이제 원색의 색채가 작품을 이끌어나가는 채색적인 면모가 돋보인다. 더불어 즉흥적인 작업 과정을 통해 붓으로 그리거나 나이프로 밀어내서 만들어내는 얼룩과 질감이 힘차게 숨을 내쉬듯 작가의 감정을 표출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1990년대 말 작가의 추상 실험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간다. 이제 화면에서 구체적인 형상은 전혀 찾아볼 수 없게 됐다. 캔버스 전면에 청색과 회색을 위주로 무채색의 색감들이 미묘한 변주를 일으키며 무한히 펼쳐지는 것과 같은 공간감을 형성한다. 색이 더 진하게 맺혀있는 부분과 흐리게 퍼져 있는 부분이 공존하며 그 속으로는 비정형의 형상들이 떠다닌다. 이 작업들에 붙여진 ‘비온 후’, ‘안개’, ‘흰색의 섬’, ‘새벽’, ‘섬’과 같은 제목을 통해 전영희가 자연을 기초를 두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객관적이고 현실적인 자연의 재현이 아니라 대상의 본질에 대한 조형적 단순화를 추구하고 있다. 화면에서 풍기는 절제미는 보는 이로 하여금 숨을 들이마시고 멈춘 채 명상의 세계로 빠져들게 하고 있다. 

90년대 전영희의 작업 기법뿐만 아니라 재료에서도 계속 변화가 있었다. 90년대 초기의 작품들에는 아크릴 물감 혹은 유화를 사용하고 있다. 하지만 작가는 점점 재료의 본성에 관심을 가지며 다양한 재료들을 화면 위에 적극적으로 도입하기 시작했다. 그는 다양한 색조의 안료들을 묽은 농도로 타서 표면에 번지게도 하고 계속 겹쳐 바르기도 하며 때로는 안료의 입자가 생생하게 맺히도록 건조한 붓으로 갈필효과를 내기도 한다. 혹은 석고를 바른 표면위에 물감을 발라 올리며 깊고도 투명한 발색효과를 구현해냈다. 두텁게 바른 석고는 평면적인 화면 위에 부조와 같은 입체감을 내는데도 사용된다. 그는 또한 경석(硬石, coarse pumice gel)과 같은 여러 가지 돌가루를 표면에 뿌려서 촉각적인 질감과 함께 팽창해 나가는듯한 공간감을 연출하기도 한다.

전영희의 추상회화는 미술사적으로 추상표현주의와 하드 에지 페인팅의 맥락에서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추상표현주의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1940년 말에서 1950년 사이 미국을 중심으로 활발히 일어났던 미술운동으로 자동기술법이나 우연과 충동을 통해서 그림을 그린다는 행위 자체에 가치를 부여했다. 반면 약 10년 후에 등장한 하드 에지 경향의 작가들은 표현주의적인 요소를 제거한 추상작품들을 제작했다. 날카로운 테두리를 가진 단순하고 비개성적 형태들을 그려내며 개인의 감정 혹은 현실 세계를 배제한 채 차가운 화면을 구성해냈다. 비록 전영희의 작업을 이 두 사조와 연관시킬 수 있지만 그가 자생적 조형어법이 없기 때문에 이를 따른 것이 아니라 새로운 조형질서를 개척하기 위함이었다. 그는 절대 한 가지 경향을 고수하지 않으며 도전에 한계를 두지 않고 지속적으로 추상회화의 가능성을 실험해왔다. 

최근 전영희가 선보이는 <숨> 연작은 한국을 비롯한 동양의 수묵에 뿌리를 두고 있는 추상회화 작업이다. 그는 회색계열의 무채색이나 청색으로 캔버스에 위에 선을 긋거나 면을 만들어 나가며 만들어지는 번짐의 효과로 ‘자연의 숨결’을 드러내고 있다. 작가는 우선 경석을 나이프로 바른 뒤 그 위에 넓적한 평붓으로 선을 그리거나 때로는 테이프를 이용하여 깔끔한 면들을 형성한다. 전영희는 경석이 완전히 마른 이후 물의 양을 조절하며 아크릴 안료로 촉촉한 번짐의 효과를 냄으로써 까칠까칠한 경석의 입자가 자아내는 특유의 질감이 돋보이도록 한다. 신비감을 자아내는 질료와, 숨을 들이쉬고 내뱉는 반복된 작가의 호흡과 동시에 탄생되는 추상회화를 통해서 전영희는 비로소 자신만의 호흡법을 찾은 듯하다. 

전영희는 “특정한 사물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기보다는 보이는 것 뒤에 숨어있는 본질을 파헤쳐 보도록 하는게 더욱 의미가 깊다는 생각에서 추상 쪽을 택했다”고 전한다. 그는 급변하는 현대미술의 중심에서 지금까지 쉼 없이 다양한 형태의 추상실험을 이어왔다. 작가는 추상이라는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은 채 캔버스의 평면성, 물감의 색조와 질감, 그리고 그 사이 유발하는 시각적 일루젼 속에서 무한한 표현의 가능성을 모색해왔다. 하지만 그에 대한 연구가 아직 미진하다. 남성 중심으로 주도되어온 추상미술의 역사에서 두려움 없이 전진해온 그의 여정이 재발견되기를 기대한다. 



김지나(1988~), 이화여대 대학원 미술사학과 석사, 스페이스 포 컨템포러리아트 프로젝트 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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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희, <잊혀진 시간들>, 1993, 캔버스에 유화, 53x33cm




전영희, <잊혀진 시간들>, 1993, 캔버스에 아크릴, 73x50cm




전영희, <섬#7>, 1997, 경석, 캔버스에 아크릴, 264x208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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